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609
◈ 609. [Side Story] 학창 시절
5년 전.
황실 아카데미, 369기 졸업식 당일.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맑은 오전 햇살이 내리쬐는 교정 복도. 아카데미의 교훈(校訓)이 쓰인 현판 아래에서.
“후우…….”
19살의 헤카테는 연신 숨을 몰아쉬며 침착하려 애쓰고 있었다.
짧은 베이지색 머리칼의 소녀는 목까지 꽉 조이는 생도 교복을 빈틈없이 차려입은 채였다. 완벽하게 다림질된 교복은 마치 군복처럼 보일 만큼 빈틈이 없었다.
“앗, 헤카테 선배님이다!”
“멋져, 369기 수석……!”
“오늘도 늠름하셔라…….”
지나는 후배들, 그리고 동기들이 선망의 눈빛을 그녀에게 보냈다.
제국에서도 내로라하는 재능 있는 아이들이 모이는 이곳 아카데미에서도 압도적인 실력으로 수석.
그녀는 실력만으로도 선망받는 존재였지만.
반듯한 체격과 촘촘하게 붙은 근육, 검술 수련에 방해가 될까 봐 짧게 친 머리칼에, 우수에 잠긴 표정까지.
여러 점이 겹쳐 중성적인 매력을 뿜어냈고, 아카데미의 생도 사이에서 남녀 가리지 않고 인기가 넘쳐났다.
그리고-
저벅.
반대편 복도에서, 갑자기 이 맑은 햇살이 비치는 교정을 쿰쿰한 어둠으로 일그러뜨리며, 누군가가 등장했다.
앞섶이 풀어 헤쳐져 목이 훤히 보이는 교복. 탐스러운 흑발은 잔뜩 흐트러졌고, 무저갱 같은 흑안은 아래가 퀭하다. 몸에서는 니코틴과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고, 어떻게 봐도 건달 같은 자세로 휘적휘적 걷는 20살의 애쉬가 등장했다.
기겁한 후배들이 일제히 헉소리를 냈다.
“히이이익! 화, 황자님이다!”
“369기의 걸어다니는 재액(災厄)!”
“황실의 오욕(汚辱)……!”
“하, 하지만, 저런 모습이 또 위태로워서 좋앗……!”
마지막에 필사적으로 외친 일부 소수 취향을 제외하면, 아카데미의 모두가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황실의 문제아- 애쉬는 태연하게 복도를 가로질러 헤카테에게 향했다.
“어이, 수석.”
“아, 황자 전하. 좋은 아침이에요.”
애쉬가 태연하게 손을 휘둘러 헤카테의 어깨를 툭 쳤고, 헤카테는 서글서글하게 눈웃음을 쳐 보였다.
후배들은 복도 멀찍이 숨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대체 어떻게 저 수석과 꼴지가 같이 어울리는 걸까?”
“전교 최고의 모범생과, 전교 최악의 문제아…… 진짜 이상한 조합이야.”
“황자님도 참, 말썽만 안 부리시면 그림은 좋은데.”
“말썽을 부리니까 문제잖아…….”
“분명히 오늘 졸업식에서도 엄청난 사고를 치실 거야……!”
그렇게 수근수근거리는 후배들 쪽으로 애쉬가 고개를 슥 돌리더니.
“캬-악!”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두 팔을 위로 홱 들었다.
“히이이익!”
“꺄아아아앗-!”
“도망쳐어어! 잡히면 끔찍한 일을 당한다!”
혼비백산한 후배들이 일제히 내달려 도망쳤다. 애쉬는 콧방귀를 뀌었다.
“참 나. 누가 보면 내가 사람 잡아먹는 줄 알겠다. 내가 뭐 얼마나 나쁜 짓 했다고 저렇게 도망 다니는 거야?”
“하하…….”
헤카테가 어색하게 웃었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애쉬는, 본래는 순하고 착한 도련님이었는데. 같은 기수 안에서 제일 나이가 많긴 했어도 선하고 배려심 깊은 소년이라 모두가 좋아했는데.
열다섯 살 무렵 어머니를 잃은 다음부터는…… 사람이 완전히 변해버렸다. 완전히 망나니 양아치 같은 성격으로 뒤바뀌었다.
교내에서 온갖 패악질을 부리더니, 수업도 제대로 안 들어오게 되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다른 생도들과 달리, 황자답게 별궁에서 등하교를 하다 보니…… 애쉬와 그 호위 루카스는 점점 학교에서 겉돌게 되었다.
그런데 애쉬는 고슴도치처럼 모두에게 사납게 굴었지만, 유독 헤카테에게만은 잘 대해주었다.
아니, 잘 대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멋대로 아는 척을 하며 들러붙었다. 억지로 일과를 함께하며 친하게 지냈다.
그전까지는 별다른 접점도 없었지만, 결국 반강제로 황자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니…… 어느새 애쉬, 루카스, 헤카테는 학창 시절 내내 함께 어울리게 되었다.
애쉬의 온갖 말썽과 함께한 지난 6년을 회상하던 헤카테가 후훗, 하고 웃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다른 일을 꾸미지 않으시는 건가요? 졸업식에서 또 엄청난 사고를 치지 않으실까 걱정했는데.”
헤카테는 몰랐다.
눈앞의 애쉬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방법으로 자신의 졸업식을 풍비박산 내어 본 남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말썽이 그 회차의 필요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음도. 이번 회차에서는 굳이 졸업식을 망칠 필요가 없기에 내버려 두기로 했다는 것도.
알 수 없었고 애쉬도 굳이 말해주지 않았다. 대신 애쉬는 피로가 그득한 얼굴로 늘어지게 하품했다.
“오늘따라 더 졸려서 말이야…… 후아암. 하루 정도는 얌전한 황자님이 되어 주기로 했어. 졸업장은 받아야 할 거 아니야.”
“후후. 얌전한 황자님이라니. 정말 안 어울리는 단어 조합이네요.”
“이쪽도 수요가 있거든…… 아무튼, 수석. 아침부터 왜 그렇게 결연한 얼굴이야. 어디 전쟁 나가냐?”
자연스럽게 헤카테와 어깨동무를 한 애쉬가 눈짓했다.
움찔 어깨를 떤 헤카테가 머쓱해 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전하. 그…… 루카스는, 지금 어디에……?”
“호오.”
그제야 상황을 눈치챈 애쉬가 휘파람을 휙 불었다.
“기어코 내 호위를 채갈 셈이냐. 이 고얀 청춘 같으니.”
“아니, 그게 아니라요…….”
수석 헤카테가 차석 루카스를 좋아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카데미 공인 눈새인 루카스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일 터였다. 정작 본인인 루카스만 모른다는 게 문제였지만…….
“오늘 고백할 거냐?”
“으으, 그게…….”
“6년 내내 속앓이했잖아. 이제 졸업하고 나면 찬스도 없다고?”
“알아요. 하지만…….”
헤카테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보기 힘들 텐데, 그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두는 게 좋을까, 싶기도 하고.”
“……글로리 나이츠로 간댔지?”
애쉬는 끌끌 소리를 내며 담배를 꺼내려다가, 교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얌전히 사탕을 꺼내 포장을 뜯어 입에 물었다.
“알고 있지? 그 기사단에 들어간다는 건……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야.”
“……네. 알고 있어요.”
황제친위대 글로리 나이츠.
이곳에 입단하는 것은 모든 기사가 바라마지 않는 영예였지만, 대신 기사 개인에게는 혹독한 ‘대가’를 요구했다.
그 ‘대가’는 극비 사항이었지만, 애쉬는 당연하다는 듯 알고 있었다. 아마도 황자이기 때문이라고 헤카테는 짐작했다.
“하지만, 제 목숨은 이미 제국에…… 그리고 황제 폐하께 바치기로 마음먹었는걸요.”
헤카테는 씁쓸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마음먹었고,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수석 자리를 유지한 거니까요.”
“…….”
듣고 있던 애쉬가 작게 구시렁거렸다.
“……그걸 막으려고 매번 친해지는 건데. 이번에도 못 막았네. 하여간 기사라는 것들은 다 똥고집 드럽게 세서…….”
“예?”
“아냐. 사탕 드럽게 맛없다고.”
애쉬는 원래도 혼자 구시렁대는 버릇이 있었기에 헤카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헤카테는 오늘 졸업 후 떠나면 더 이상 볼 수 없을 아카데미 내부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리울 거예요, 이곳에서 보낸 날들.”
“……그래.”
웬일로 애쉬가 동의했다. 언제나 학교를 때려 부수려고 하던 불량학생답지 않은 태도였다.
“신물 날만큼 지긋지긋했지만…… 나도 조금은 그리울 것 같군.”
자신에게 허락된 마지막 회차.
그 졸업식을 앞둔 학교를 둘러보며 애쉬도 표정이 아련해졌다. 헤카테는 이런 표정의 애쉬는 처음 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까 더더욱.”
직후, 애쉬는 특유의 위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헤카테에게 눈짓했다.
“루카스에게 그 마음을 전하는 게 낫지 않겠어?”
“…….”
“못해본 일들, 후회 많이 남을 거야. 내일이면 세상이 끝난다 생각하고, 오늘 질러버리라고. 응? 어때?”
“그, 그게…….”
헤카테가 어쩔 줄 모르고 어버버거리는데,
저벅-
복도 저편에서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금발벽안의 소년이 등장했다.
369기 차석, 루카스 맥그리거.
열아홉 살의 루카스는 이미 성인 이상 가는 골격을 갖춘 훤칠한 소년이었다. 키가 계속 큰 탓에 교복이 조금 작아져, 소매 너머로 탄탄한 손목이 훤히 보였다.
그런 루카스를 보며 헤카테는 자신도 모르게 뺨을 붉혔다.
‘어쩌지, 어째야 하지…….’
좋은 친구로서 아름다운 추억만 남기고 헤어질 것인가.
아니면…… 용기를 내어, 전진해볼 것인가.
불확실한 성공과 실패 사이에서, 도전해볼 것인가.
애쉬는 이 귀여운 소녀와 소년을 번갈아 보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곧 루카스는 곧게 걸어와 애쉬와 헤카테의 앞에 섰다.
“헤카테. 안 그래도 찾고 있었다.”
“어, 응?”
루카스가 무표정하게 내뱉었고, 놀라서 어깨를 떤 헤카테는 이윽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 그래. 루카스. 나도 너에게 할 말이-”
헤카테는 말을 맺지 못했다.
휙!
루카스가 대뜸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을 헤카테에게 던졌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헤카테가 받아 들고 살피자, 그것은…… 칼집이었다.
그리고 칼집 안에는 날이 세워져 있지 않은 가검(假劍)이 들어 있었다.
“졸업 전에, 마지막으로 너에게 도전하겠다.”
그 앞에서 자신의 가검을 뽑아 들며 루카스가 으르렁댔다.
“검을 뽑아라, 헤카테.”
“…….”
“6년간 단 한 번도 너를 이기지 못했지만, 오늘에야말로 너를 넘어 보이겠다.”
헤카테는 멍하니 그런 루카스를 보았고, 애쉬는 그만 배를 잡고 웃고야 말았다.
“푸, 푸하하하핫! 에라이 진짜! 야, 호위!”
애쉬는 양손 검지로 루카스를 가리키며 선언했다.
“매번 말하지만, 넌 진짜 병신이야!”
애쉬의 이유 모를 폭언은 익숙했기에, 루카스는 애쉬에게 고개만 깊게 숙여 보인 뒤 다시 헤카테를 마주 보았다.
헤카테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아아, 그래.
저 올곧은 푸른 눈.
오직 무도(武道)만을, 그리고 제 주인에 대한 충성만을 추구하는, 저 흔들리지 않는 눈빛…….
일절 굴절하지 않고 직선만을 그리는 저 시선에, 자신은 그만 마음을 빼앗겨버린 것이다.
스릉-
그러니까.
그 직선이 자신을 향한 지금 이 순간을 피하지 않는다.
헤카테는 천천히 칼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오전 햇살이 가검의 검면에 닿아 주위로 산산이 부서졌다.
어느새 다시 주위에 몰려들어 이쪽을 살피던 생도들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발검(拔劍)을 끝마치고서, 감았던 눈을 마주 똑바로 뜨고 루카스를 마주하며, 헤카테가 입을 열었다.
“그 승부, 받아줄게. 루카스.”
“감사한다. 헤카테.”
“다만. 내가 이 승부에서 이기면…….”
깊게 숨을 들이켠 헤카테가 생긋 웃었다.
“그때는 내 마음을, 피하지 말고 똑바로 마주해줘.”
오오오오……!
주위 생도들은 물론이고, 어느새 그 생도들 사이에 은근슬쩍 끼어든 애쉬까지도 그 멘트에 흥분하며 낮게 환호했다.
오직 아카데미 공인 눈치 제로인 루카스만이 고개를 갸웃할 뿐.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뜻인가? 좋다. 조건을 받아들인다.”
“좋아, 차석.”
양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헤카테는 천천히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승부하자.”
루카스는 자신의 검끝을 아래로 내리고, 몸을 한껏 낮췄다.
상단을 점한 헤카테와, 하단을 점한 루카스. 완전히 상반되는 자세를 취한 두 기사는 서로를 맹렬하게 응시했다.
그리고-
승부는 찰나지간에 이뤄졌다.
투학-!
땅을 박찬 루카스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헤카테에게 달려들며 일검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 돌진을 투우사처럼 매끄럽게 피해낸 헤카테는 자신의 검을 부드럽게 아래로 내리쳤다.
츠카악-!
헤카테의 가검이 눈부신 불꽃을 튀기며 마치 종이 자르듯 루카스의 가검을 잘라냈다.
가검이었으나 날만 세워져 있지 않다 뿐이지 틀림없이 장인이 연마해낸 최고급 철검이었다.
그런 두 검이 충돌했는데 헤카테의 것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으나 루카스의 것은 두 동강이 나버린 것이다.
잘려 나가 빙글빙글 돌던 루카스의 검끝이 바닥에 푹 박혔다.
“…….”
검을 내지른 채 가만히 서 있던 루카스는 천천히 자세를 바로 하고, 자신의 손에 들린 토막 난 장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졌군.”
간결하게 내뱉은 루카스는 한숨을 내쉬며 잘려 나간 장검을 자신의 칼집에 꽂았다.
“결국 한 번을 못 이기는군, 헤카테. 너는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질리지 않고 매번 도전해준 네 덕이야. 네가 없었다면, 나도 이만큼 단련되지 못했을 거야.”
자신도 검을 칼집에 정리한 헤카테가 크게 심호흡했다.
“그럼, 루카스. 이제 내 차례네.”
검으로 승부할 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긴장되었다.
헤카테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골랐고, 루카스는 의아하게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헤카테는- 둘 사이의 검술 승부가 그러했듯이, 피하지 않고 단숨에 내질렀다.
“좋아해. 지난 6년간, 계속 좋아했어.”
“…….”
“졸업하고 나면 다시 보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이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
루카스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굳어버린 듯 가만히 서서 그런 헤카테를 마주 볼 뿐.
헤카테는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그런 루카스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루카스. 너는……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
“솔직하게 말해줘. 괜찮으니까.”
주위의 생도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이 와중에 애쉬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사탕을 줄줄이 꺼내어 계속해서 입에 넣고 씹었다. 와작! 와작!
“…….”
오래도록 침묵하던 루카스는……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인생에, 그리고 황실 아카데미 369기에, 길이길이 남을 역사적인 대답이었다.
그 대답은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