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90)
190화. 꿈 그리기
“부모님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가져 볼 거예요!”
생각지도 못하게 특기분야인 수업이 등장해버렸다.
사실 예상하고는 있었다. 부모가 참여하는 수업이 하나쯤은 있을 거라고.
관전만 하는 건 아무래도 조금 루즈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게 내 특기분야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지만.’
한편 아이들은 교사의 말에 환호성을 보냈다.
“와아!!”
“나 그림 짱 잘 그리는데! 히히!”
연두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폈다.
반응을 보니 아이들도 이런 수업을 할 거란 걸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방금 속담 빈칸 맞추기도 그랬지.
‘그건 아직인가 보네.’
저번에 연두와 대화할 때 알아챈 사실이 있었다.
아이들이 야심차게 준비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
비밀이라기에 더 묻지 않았지.
‘뭐, 그건 기다리면 나올 거고.’
지금은 현재 수업에 집중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유미경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그림을 그려서 발표하는 시간을 가져 볼 거예요. 어떤 그림을 그릴 거냐면……”
말을 늘이는 걸 보면 정해진 주제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교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교사는 그림의 주제를 얘기했다.
“바로 꿈 그리기예요!”
꿈. 최근 들어 다시금 눈과 귀에 익은 단어였다.
나보다도 연두와 관련해서 보고 듣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근데 아이들이 그릴 그림의 주제라 하기에는 다소 추상적인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교사의 부연설명이 이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어른이 됐을 때의 자기 모습을 그리는 거예요. 어른이 되면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상상해 보면 그림을 그리는 데에 도움이 되겠죠?”
한 마디로 요약하면 미래의 꿈을 그림으로 옮기라는 뜻이었다.
학부모들은 전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좋아할 거 같으니까.’
부모님과 함께 그린다는 사실만으로 좋은 모양이다.
어떤 말이 귀에 들어와도 꺄르르 웃고 떠드는 걸 보면.
교사의 시선은 이제 뒤에 있는 우리 학부모 측을 향했다.
“학부모님들께서는 아이가 그림을 그리는 걸 도와주시면 됩니다! 조력자 역할인 거죠. 그럼 앞으로 나와 아이들 옆에 앉아주시겠어요?”
“네.”
“유람아! 엄마 왔어!”
“흐하하, 아빠가 왕년에 그림 좀 그렸지.”
학부모들도 다들 신이 난 모습이었다.
모두 자식의 옆에 자리잡고는 아이들과 정답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나도 빙긋 웃으며 연두의 옆으로 향했다.
그런데 앉기도 전에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사라졌다.
‘이걸 어쩐다..’
아직 신세연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 진행할 수업은 학부모가 아이와 함께하는 수업이었고.
즉, 시은이는 함께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걸 알아서인지 연두도 마냥 기뻐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윽.
우선 자리에 앉아서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귀에 음성이 들어왔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교사의 목소리였다.
“시은아.”
“네.”
“어머니가 늦으신다고 들었는데 아직 안 오셨나 보네?”
시은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랫입술을 깨무는 걸 보니 심정이 짐작이 갔다.
교사는 안쓰러운 표정을 짓다가 웃으며 얘기했다.
“그럼 시은이는 선생님이랑 같이 할까?”
자연스레 다시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아빠가 오지 않았을 때 나도 똑같은 얘기를 들었으니까.
‘주원이는 부모님이 못 오셨으니까 선생님이랑 하자.’라는 말을.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당시에는 그게 싫었다. 선생님을 싫어했던 게 아니었는데도.
뭔가 특별취급을 받는다는 게 싫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시은이가 그럴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어떤 관점에서는.’
내가 지금 하려는 말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고.
그래도 속상해하는 표정을 보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자연스레 입 밖으로 한 마디가 나갔다.
“제가 같이 해도 될까요?”
교사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되묻는 말이 들려왔다.
“연두 아버님이요?”
“네, 제가 시은이랑 되게 친하거든요.”
“…?”
표현이 우습긴 하지만 보는 그대로였다.
고개를 돌린 시은이가 물음표 어린 시선을 내게 보냈다.
역시 갑작스러운 친분 어필은 조금 무리였나.
‘.. 그냥 넘어가 주라, 시은아.’
어차피 이미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일.
이렇게 된 이상 더 철판을 깔기로 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그림도 좀 그려서 충분히 연두랑 시은이 둘 다 잘 도와줄 수 있을 거 같고요.”
내 자뻑에 말문이 막힌 걸까. 대답이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괜스레 당황한 나는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시은이 엄마가 곧 온다고 했으니까 도중에 올 수도 있고, 선생님은 관리도 하셔야 할 텐데 바쁘시니까..”
혼자 쓸데없이 말을 잔뜩 늘어놓은 느낌이다.
다행히 내 말이 끝나고 교사가 입을 열었다.
“호호, 물론 잘 알죠. 연두 아버님 그림실력은. 그럼 그렇게 하시겠어요?”
“네, 시은이가 괜찮다면요.”
나는 시은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림 그리는 거 아저씨가 도와줘도 괜찮을까, 시은아?”
내 말에 시은이가 빤히 나를 바라봤다.
그러다 왜인지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거절의 의미인가 했는데 다행히 아니었나 보다.
“괜찮아요.”
“하하, 그래.”
어떻게든 이야기는 잘 마무리된 듯했다.
연두도 안심했는지 다시 입가에 맑은 웃음이 번졌다.
이렇게 나는 연두와 시은이의 중앙에 자리잡았다.
어쩌다 보니 잠깐이나마 두 아이의 부모 역할을 하게 되어버렸다.
***
“시은이는 꿈이 뭐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던지는 심오한 질문.
연두와는 이전에 꿈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래서 먼저 시은이에게 질문을 던진 거고.
의외로 시은이는 바로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러다 자그마한 목소리로 답했다.
“작가요.”
작가? 다섯살이 꿈꾸는 직업이라기에는 흔치 않은 직업이었다.
놀란 나머지 되묻는 말이 나갔다.
“작가?”
“네.”
“어떤 작가?”
작가라고 해도 종류가 무척 많았다.
방송작가, 웹툰작가, 소설작가, 그리고 사진작가까지.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열 개의 손가락으로는 부족했다.
시은이는 조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재밌는 이야기 만드는 작가..”
아직 딱 잘라 정의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당연했다. 이제 다섯살인 시은이니까.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시은이는.. 재밌는 책을 쓰고 싶은 거야?”
“.. 맞아요!”
높은 텐션으로 답하는 걸 보니 정확히 맥을 짚은 모양이었다.
사실 이제 다섯살인 걸 감안하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꿈이긴 했다.
허나 시은이와 상당히 어울리는 직업으로 보였다.
‘또래들에 비해 어휘력이 뛰어나고 똑똑한 아이니까.’
뭐, 어릴 적 꿈이 그대로 이어져 실현될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고.
아무튼 감을 잡았으니 나는 이야기했다.
“그럼 그렇게 그리면 되겠다, 시은아.”
“어떻게요?”
“우선 어른이 됐을 때의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리는 거야. 연두는 어떨 거 같아? 어른이 된 시은이의 모습.”
내 물음에 연두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어른이 된 시은이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윽고 연두의 입가에 세상 환한 웃음이 번졌다.
“…… 예뻐요!”
“응?”
“시으니 진짜 예뻐요! 우아…”
예쁠 거 같아요도 아니고 예뻐요라니. 예상을 너머서 확신하는 모습이다.
심지어 혼자 상상하고는 감탄사까지 터트린다.
이런 연두의 반응을 보니 궁금해질 정도였다.
‘연두의 머릿속에 그린 시은이의 모습은 어떨지.’
한편 연두의 말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시은이.
이윽고 시은이의 입에서도 한 마디가 나갔다.
“연두도 진짜 예뻐..”
“헤헤.. 고마어, 시으나…”
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장면이다.
사이좋은 딸이 두 명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뭐, 부모 역할을 하기로 했으니 잠깐이나마 이 기분을 만끽하기로 하자.
나는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스스로의 모습을 그리고, 예쁜 책을 하나 그리는 거지.”
“예쁜 책이요..?”
“응. 어른이 된 시은이가 완성했을 재미있는 책.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읽었겠지?”
“아!”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온 모양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연필을 건네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시은이가 한 번 이걸로 쭉 그려봐. 지금 아저씨가 말한 거나 그리고 싶은 것들 모두. 그럼 아저씨가 도와줄게.”
특기분야라고는 하지만 그림 경연이 아니었다.
내 그림실력을 뽐내는 장소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디까지나 나를 포함한 학부모의 역할은 조력자 역할.
그런 만큼 기본적인 스케치나 그림은 아이들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굳이 따지면.’
나는 뼈대에 살을 붙이는 역할을 할 생각이고.
시은이는 이해했다는 듯 연필을 건네받았다.
스슥. 슥.
그리고선 잔뜩 집중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나는 연두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두는 그리고 싶은 게 있어?”
내 질문에 연두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과는 달리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연두는 꿈 업써요…”
전에 얘기했을 때와 같은 대답이었다.
그때는 ‘아빠랑 행보카게 사는 거!’라고 대답하긴 했지.
꿈의 정의를 알려주니 없다는 답이 돌아왔지만.
“괜찮아, 연두야.”
아직 꿈이 없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림의 주제는 어른이 됐을 때의 연두의 모습.
그런 만큼 그릴 수 있는 건 무척 많았다.
“대학생이 된 연두를 그리는 거 어때?”
정말 아득히 먼 얘기였다. 연두가 대학생이 된다니.
그래도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겠지.
‘물론 대학을 안 갈 수도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연두가 대학에 가길 원했다.
내가 가지 못해서 더 그런 마음이기도 한 거 같고.
한편 연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대학생..?”
“응. 어른이 돼도 가는 학교가 있거든. 그게 대학교이고.”
“연두 아라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하하, 맞아. 그러니까 대학교에 다니는 연두의 모습을 그리는 거지.”
멋진 학교와 가방을 멘 어른이 된 연두의 모습.
그게 내가 생각한 그림의 컨셉이었다.
“어때, 연두야?”
“.. 조아여!”
“그럼 연두도 그려볼래?”
“네!”
그렇게 연두도 스케치를 시작했다.
***
“.. 다 그렸어요, 아저씨.”
먼저 그림을 완성한 건 시은이였다.
진행상황을 보니 연두는 아직 꽤 시간이 걸릴 거 같았다.
나는 시은이가 수줍게 건넨 그림을 확인했다.
‘되게 열심히 그렸네.’
잘 그렸다고는 못해도 디테일이 살아있는 그림이었다.
직사각형 모양의 책이 그려져 있고, 가장자리에는 포인트도 있었다.
-지은이 : 연시은
이런 포인트를 보면 책을 많이 읽은 티가 난단 말이지.
그나저나 시은이의 풀네임이 뭔가 낯설게 느껴지네.
‘알고는 있었는데.’
맨날 이름으로만 부르고 듣다 보니 생각 못하고 있었다.
문득 되게 예쁜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이제 내가 참여할 시간이었다.
“잘 그렸어, 시은아. 이제 아저씨가 도와줄까?”
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 기대감이 묻어나는 표정.
착각이 아니라면 시은이는 내 그림을 꽤나 좋아하고 있다.
세연씨의 말에 의하면 내가 그려준 앵무새 그림이랑 초상화도 비밀장소 안에 넣어뒀다고 들었으니까.
‘그걸 시은이 앞에서 말할 생각은 없지만.’
내 그림을 좋아해 주는 건 나로서는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따라서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고 싶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잠깐 잡아도 될까?”
“아, 네!”
그렇게 말하며 펜슬을 건네는 시은이.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같이 잡아도 될까?”
“같이요?”
“응.”
내가 혼자 펜을 잡는다면 발생할 문제점이 있었다.
멋대로 다 바꿔버릴 거 같고, 그럼 시은이의 개성이 사라지겠지.
무엇보다도 이건 학부모와 아이가 함께 그리는 거고.
‘내가 아빠인 건 아니지만.’
적어도 최대한 그 취지에 맞게 조력자 역할을 하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시은이를 보고 나는 펜슬을 겹쳐 잡았다.
“자, 여기 시은이가 그린 예쁜 책 있잖아.”
“네.”
“이걸 좀 더 입체적으로 바꿔보자.”
“.. 입체적? 그게 뭐예요?”
이런. 아무리 시은이라도 너무 어려운 단어였다.
입시미술에나 쓰일 법한 단어니까.
나는 다시 알기 쉽게 설명해줬다.
“그러니까.. 좀 더 진짜 책처럼 보이게 그리는 거지.”
“어떻게요?”
“이렇게.”
슥. 슥.
겹쳐잡은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입체성을 부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은이가 그린 직사각형 모양은 그대로 살리되.’
선을 여러 개 추가해 모서리를 그리는 걸로 충분했다.
직사각형의 평면을 직육면체로 바꾸는 작업이라 할 수 있었다.
더 고급스럽게 말하면 원근감을 살린다고도 표현할 수 있고.
‘사실 그런 건 추임새일 뿐이고.’
변화는 그냥 눈으로 보는 게 가장 가장 빨랐다.
바뀌어가는 그림을 보는 시은이의 표정이 서서히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꼭 마법이라도 보는 표정이다.
그 표정을 보니 문득 전에 연두와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이런 말을 했었지.
‘아빠가 마법을 보여줄게.’
지금 생각하면 참 오글거리는 멘트였다.
연두튜브에서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대사이긴 하지만.
휙. 휙.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낸 후 말했다.
“어때, 시은아? 좀 더 진짜 책 같지 않아?”
“네.. 진짜 책 같아요…”
“이제 시은이도 좀 더 예쁘게 만들어볼까? 물론 지금도 잘 그렸는데, 아저씨가 생각할 때 어른이 된 시은이는 훨씬 더 예쁠 거 같거든.”
양심고백하자면 잘 그렸다는 건 빈말이다.
허나 뒤에 덧붙인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연두가 말했듯이 어른이 된 시은이는 무척 예쁠 거 같으니까.
끄덕.
다시 위아래로 살며시 흔들리는 시은이의 고개.
나는 다시 펜슬을 고쳐잡았다.
‘살릴 수 있는 건 전부 살리자.’
시은이가 표현해 놓은 그림의 특징은 전부 살릴 생각이었다.
예를 들자면 단발로 표현한 헤어스타일이나 얼굴형, 그리고 패션 등.
단지 스케치의 퀄리티를 최대한 끌어올릴 뿐이었다.
한참이나 나는 스케치에 몰두했다.
“이 정도면 스케치는 된 거 같은데?’
시은이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많이 느낌이 달라지긴 했지.
조금 지저분하긴 하지만 채색을 하면 해결될 수준이었다.
타이밍 좋게 연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그려써요, 아빠..!”
“오호, 어디 볼까?”
그림을 보자마자 상당한 뿌듯함이 일었다.
언제 이렇게 그림실력이 는 거지, 우리 연두.
처음 그린 그림과는 퀄리티가 차원이 달랐다.
‘이래서 환경이 중요한 건가.’
특히 어린아이는 환경의 영향을 엄청나게 받는다.
연두와 가장 밀접한 환경은 다름아닌 나였다.
당연히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을 테고.
그 결과 단기간에 그림실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연두였다.
쓰담. 쓰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나서 연두의 손을 겹쳐잡았다.
실력이 상승한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내가 도울 부분들은 많이 보였다.
“잘 봐, 연두야.”
다시 한번 연두에게 마법을 보여줄 시간이었다.
***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우습지만 연두와 시은이를 도와주는 와중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양손잡이였으면 훨씬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사실 그렇지도 않지.’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도 뇌가 두 개인 게 아니니까.
따라서 의미없는 가정이었다.
두 아이의 조력자로서 감당해야 할 무게였다.
어느새 연두와 시은이 모두 채색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여기는 이 색으로 칠하는 게 어때, 시은아?”
“네. 좋은 거 같아요.”
“연두는 배경을 이걸로 칠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네에..!”
시간이 흐른 끝에 완성된 두 개의 그림.
이 정도면 임무를 완수해냈다고 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지켜보던 교사가 말했다.
“자, 이제 다들 그림 선생님한테 제출해 주세요!”
“네, 선생님!”
“히히. 엄마 나 발표 짱 잘한다?”
맞다. 발표 시간이 있었지. 아직 신세연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시은이가 발표하기 전에는 왔으면 좋겠는데.
예상보다 오는 데에 더 시간이 지체되는 모양이다.
“가따 올게요, 아빠..”
“그래, 연두야. 시은이도 제출하고 와.”
“네, 아저씨.”
이후 아이들의 그림 제출이 완료됐다.
지체없이 발표시간이 이어졌다.
제출한 순서대로 발표가 이루어지는 모양.
“자, 먼저 민우 나와서 발표해 볼까요?”
“네!”
와당탕.
민우가 요란하게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선 그림을 받아들었다.
척!
모두에게 민우의 그림이 공개됐다.
얼핏 보기에는 알아보기 힘든 그림이었다.
거대한 자동차에 타고 있는 거 같은데.
교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발표 시작해도 돼요.”
민우는 그림을 들고는 잔뜩 신난 표정으로 발표를 시작했다.
“어른이 돼서 저는 될 꺼에요! 머싰는 포크레인 운전사!”
그제야 그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저 거대한 자동차가 포크레인을 그린 거였구나.
자세히 보니까 포크레인의 형태를 띠고 있긴 하다.
‘시간이 지나도 바뀌질 않네.’
나도 그랬고 한 번쯤은 꿈꾸는 직업이었다. 포크레인 운전사.
마냥 멋있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날이 오지만.
아무튼 민우의 발표를 듣는 건 재미있었다.
“무거운 돌도 번쩍 들고요! 막 이러케 움직여서 아파트도 만들고, 포크레인으로 때려서 괴물도 무찔르고……”
점점 듣고 있자니 포크레인 얘기를 듣는 게 아닌 거 같다.
민우의 머릿속에 포크레인은 비밀병기같은 건가.
유쾌한 발표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발표 다 했니, 민우야?”
“네.”
“잘했어요. 민우한테 박수 부탁드려요!”
짝. 짝. 짝.
민우가 뿌듯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비록 어머니께서 못 살겠다는 표정으로 반기긴 했지만.
발표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음에 나간 아이의 꿈은 곤충 과학자였다.
사마귀, 사슴벌레, 장수풍뎅이 등의 곤충들을 잔뜩 그려놓은 그림.
“크크.”
도저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꿈 역시 나도 한때 가졌던 꿈이니까.
누구나 한 번쯤은 파브르를 꿈꾸는 시기가 있지 않은가.
‘역시 안 바뀌는 건가.’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아이들의 꿈이었다.
이후에도 다양한 꿈과 직업들이 등장했다.
선생님, 간호사, 가수 등등.
‘요즘 유투버가 꿈인 초등학생들이 그렇게 많다던데.’
다섯 살 아이들은 해당 사항이 아닌가 보다.
그러던 와중 교사가 말했다.
“다음은.. 시은이…”
교사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늘였다.
결국 시은이의 차례까지 신세연은 오지 않았다.
기왕이면 시은이는 마지막에 발표했으면 했는데.
교사도 무의식 중에 이름을 부른 거 같았다.
‘이미 불렀는데 철회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교사가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시은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아저씨랑 연두가 볼 테니까 발표 잘하고 와, 시은아.”
“네..”
그렇게 앞으로 걸어나가는 시은이.
열심히 그린만큼 엄마가 발표를 지켜보길 원했을 텐데.
그래서인지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교사는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건네며 얘기했다.
“그럼 시은이 발표 시작해 볼까?”
“네.”
그렇게 시은이는 그림을 건네받았다.
이윽고 그림을 들며 시은이는 입을 열었다.
“제 꿈은……”
그때였다.
띠리리리.
현관문 벨이 울렸다.
발표가 잠시 중지되고 교사가 현관으로 향했다.
끼익.
문 틈새로 보이는 낯익은 얼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입을 뗐다.
“헉..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급하게 오느라……”
자연스레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보다 훨씬 환한 웃음이 시은이의 입가에 번졌고.
시은이의 진짜 학부모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