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78
제78화
20.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3)
– 휴일에 미안합니다. 통화 괜찮나요?
“네, 말씀하세요. 길드장님.
– 박신주 헌터가 흥미로운 보고를 하더군요. 윤가호 헌터 작품이죠?
신주는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최권영은 정황을 단번에 알아냈다. 정말이지 쓸데없이 예리하다니까. 불만을 목 뒤로 삼키며 답했다.
“작품이랄 것까지는 아니고요. 걸리는 게 있어서 개입했습니다.”
– 과연 윤가호 헌터로군요.
“어디까지나 우연이었습니다.”
최권영의 추임새에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보조개가 움푹 파일 정도로 웃고 있을 것이 보지 않아도 훤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데, 돌연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윤가호 헌터는 이 일이 히든퀘스트와 연관 있다고 확신하시나요?
확신이라는 말이 새삼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주저 없이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24층이 바다사람 계층과 유사함을 근거로 들자 최권영이 수긍했다. 왜 이렇게 쉽게 동조하나 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타워즈에 올라온 글의 게시자를 찾던 중이었다고 한다.
– 좀 더 윤곽이 드러난 뒤에 공유하려 했는데 덕분에 수고를 덜었습니다. 김지화 헌터도 천산 건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거든요.
“그럼…….”
– 네. 큰 이변이 없는 이상 다음 목적지는 24계층이 될 것 같군요.
공개적인 장소에 정보가 공유된 만큼 되도록 빠르게 진입하길 바란다며 최권영이 덧붙였다. 다른 정보는 모이는 대로 전달해 주겠단 말 역시 따라붙었다.
– 그럼 이만 끊도록…….
“잠시만요, 길드장님. 히든퀘스트 건 말고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여간 이래서 높은 분들이란. 제 할 말이 끝났다고 그대로 통화를 종료하려는 걸 간발의 차로 막았다.
– 윤가호 헌터가 저를 붙잡다니. 좋습니다, 말해 보세요.
“슬슬 의뢰를 받아 볼까 합니다. 적당한 헌터를 소개해 주실 수 있습니까?”
– 이거 원, 저로는 모자라셨나 봅니다.
“아, 예.”
꼭 말을 해도…….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십중팔구 오해할 법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진 최권영이 잠시간 침묵했다.
– 흠, 윤가호 헌터 모레 시간 괜찮나요?
“오후에는 근무가 있습니다만.”
– 빼 드릴 테니 세 시에 제 사무실로 오세요. 그럼.
최권영은 그 이상 설명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저 인간에게 전화 예절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툴툴대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모레 고객님, 아니 의뢰인을 소개해주겠단 말이겠지?”
지난번 최권영의 무기, 만파를 인챈트 했을 때 제법 수익이 짭짤했더랬다. 새로 활을 마련하느라 바닥을 보인 통장 잔고를 채울 좋은 기회였다.
“조금 있으면 월급도 들어오고. 팔자 폈네, 윤가호.”
똑똑-.
단꿈에 빠져 있던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이런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뻔했다. 그새를 못 참은 신주가 달려온 거겠지. 둘러댈 말을 생각하며 현관으로 향했다.
“네, 나갑니다, 나가요!”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언니,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그치만…….”
파자마를 입은 차태양이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찼다. 어쩐지 허전하다 싶어 자세히 보니 웬일로 한 몸처럼 붙어 다니던 도깨비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일단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의자에 마구 걸쳐진 옷가지를 치우고 차태양을 앉혔다. 음료라 할 만한 게 맥주뿐이어서 하는 수 없이 생수를 따라 건넸다.
“드릴 만한 게 물밖에 없네요.”
“제가 불쑥 찾아온 거잖아요. 괜찮아요!”
이유는 모르겠으나 잔뜩 긴장을 집어먹은 것 같기에 물 잔을 다 비울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유독 부산스럽게 굴던 차태양이 말문을 연 것은 5분 정도가 지난 다음이었다.
“있죠, 언니. 처음에 만났을 때 그러셨죠? 특성에 관한 건 아무한테나 말하는 게 아니라고요.”
“네, 그랬었죠.”
“그래서, 그래서 언니를 찾아왔어요.”
차태양이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 낼수록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원래 이런 거예요, 언니? 저 정말 모르겠어요.”
“……일단 축하드립니다.”
축하의 말을 뱉는 와중에도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웠다. 원래 그런 것일 리가.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이 애는 도대체…….
또 하나의 고민거리가 얹어지는 순간이었다.
***
“이 정도면 됐으려나.”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흰 셔츠에 어두운 베이지색 정장, 평소라면 대충 틀어 올렸을 머리도 오늘만큼은 단정하게 묶었다. 굳이 흠을 잡자면 어색한 표정 정도?
내가 이렇게 차려입은 이유는 하나였다. 오늘이 바로 최권영과 고객님을 만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자고로 첫인상이 좋으면 안 될 일도 잘 풀리는 법 아닌가. 대학도 졸업하지 못하고 헌터계에 뛰어들었지만, 이만하면 나도 번듯한 사회인으로 보이리라.
마지막으로 재킷 단추를 여미는데 헌터워치가 울렸다. 긴급한 현장이 생기기라도 한 건가 싶어 서둘러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 오늘 한차현 헌터랑 같은 현장이었구나.”
갑작스레 명단에서 빠진 날 걱정하는 메시지였다. 아무래도 내가 병가를 낸 것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편하게 말하라는 대목에서는 한차현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엄한 사람을 더 걱정시키기 전에 빠르게 답장해야겠다.
“그나저나 좀 의외네.”
내가 아는 한차현은 이런 메시지를 보낼 사람이 아니었다.
흔히들 말하는 ‘교회 오빠’ 같은 외양의 한차현은 기본적으로는 세심하고 다정했다. 하지만 실상 알면 알수록 그만큼 선이 분명해 속을 내비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드물지만 속을 모르겠다며 그를 꺼리는 이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며칠간 같이한 정이 있다 이건가.”
잠시 고민하다 염려해주어서 고맙다는 문장을 덧붙였다. 남들의 평 따위 알게 뭐람. 나에게 한차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직장 동료였다. 가능하면 앞으로도 지금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메시지를 보낸 뒤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덧 약속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서둘러 숙소를 나와 복도를 가로지르던 중,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거기 멋진 언니. 번호 좀 주실 수 있으세요?”
나한테 이런 시답잖은 소릴 할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박신주.”
나를 보자마자 허리에 들러붙은 신주가 입에 발린 소리를 해 댔다.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신은 것을 보니 비번날인 모양이었다.
“옷 구겨지잖아. 떨어져.”
“힝,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신주는 우는소리를 하면서도 순순히 떨어졌다. 하지만 호기심은 수그러들지 않았는지 길드 건물까지 나를 졸졸 따라왔다. 자기도 볼 일이 있다고 우겨 댔지만 핑계가 분명했다.
“나 진짜 시간 없어. 이따 놀아 줄게, 이따.”
“아니, 나도 이쪽에 볼일이 있다니까. 음, 역시 우린 운명이야.”
그래도 따라오다 말겠지 싶었는데 신주는 내 기대를 멋있게 박살 냈다.
“너 어디까지 쫓아올 거야?”
“우리 운명이 쫑나는 그 순간까지?”
하지만 고집도 여기까지다. 여기서부터 있을 일은 공유할 수 없었다. 내가 길드장 사무실 앞에서 멈추어 서자 신주가 설마 여기가 목적지냐 묻는 듯 눈짓했다. 대답 대신 저리 가라 손을 홰홰 휘둘렀다.
“최권세와 영광 씨 만난다고 그렇게 입은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야. 쨌든 내가 어디 가는지도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가는 게 어때?”
“싫-어.”
어린아이처럼 혀를 내민 신주가 문고리를 돌렸다. 말리려 했으나 내가 손을 뻗었을 때 이미 사무실의 문은 젖혀진 뒤였다.
‘얘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야?’
그걸로도 모자라 신주는 나보다 앞서 안으로 들어갔다. 가벼운 구석이 있으나, 공과 사는 분명히 구분하는 박신주이다. 내가 나중에, 나중에 타령을 하는 통에 인내심이 바닥나기라도 한 건가?
“오셨군요.”
빠르게 사무실을 살폈으나 웬일로 제 자리에 앉은 최권영밖에 보이지 않았다. 외양만큼은 완벽한 인간답게 사무실을 독차지한 모습이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그와 신주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는 것으로 보아 다행히 고객님은 아직 같았다.
느릿하게 일어난 최권영이 사무실과 연결된 응접실 문을 열었다. 신주가 냉큼 따라 들어가려기에 뒷덜미를 낚아챘다.
“박신주. 여기까지.”
“넌 정말 사람 말을 제대로 안 듣는 게 문제라니깐. 나도 볼일 있댔잖아. 그쵸, 길드장님?”
“뭐?”
신주의 말은 꼭 그 볼 일이란 게 최권영과 연관이 있단 것처럼 들렸다. 순간 여러 개의 불안한 가정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예. 흔쾌히 시간 내주셔서 고마워요, 박신주 헌터.”
최권영의 한마디가 가정을 현실로 만들었다.
최권영이 장난스럽게 에스코트하듯 팔을 내밀자, 신주가 깔깔대며 손을 얹었다. 이래서 길드장님이 좋다니까, 따위의 유쾌한 대화가 오가고 최권영이 내게도 팔을 뻗었다.
“필요 없습니다.”
시답잖은 놀음을 받아 줄 기분이 아니었기에 최권영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첫 의뢰인이 신주였다니.’
이 인간 분명 고의로 말하지 않은 거다. 내가 정장까지 챙겨 입고 나온 걸 보고 얼마나 속으로 웃었을까? 놀림감이 되었다는 생각에 열이 올랐다.
“음료는 커피 괜찮으신가요?”
“오, 직접 타 주시게요? 그럼 전 다방 커피 찐하게 한 잔!”
“커피 말고 냉수, 정신 들게 아주 차가운 걸로 부탁드립니다.”
날이 선 말에도 최권영은 그림 같이 웃어 보였다.
방에 딸린 탕비실로 들어가기 전, 그는 응접실 문을 닫아 쐐기를 박았다. 내 속을 모르는 신주가 제 옆에 앉으라며 나를 불렀다.
“박신주, 너 여기 무슨 일로 온 거야?”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질문을 던졌으나,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다.
“네가 길드장님한테 역병호랑이 이야기 전달하라고 했잖아. 그랬더니 내 도움이 필요하다지 뭐야? 끝내주는 장비도 얻게 해 준다길래 바로 수락했지!”
“고객님은 무슨…….”
“응? 뭐라고 했어?”
“후, 그래. 너니까 보안 걱정은 없겠네.”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신주 옆자리에 착석했다. 때맞추어 탕비실에서 나온 최권영이 내 앞에 물보다 얼음이 많이 담긴 잔을 내려놓았다. 청력 좋은 S급답게 문 너머 대화를 모두 들었는지 볼우물이 깊게 패어 있었다.
“이런. 서프라이즈 선물을 들켜 버렸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