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15
115화 여자냐?
“계속 이렇게 세워 둘 건가?”
싹둑.
내 물음에 가위질 소리가 멈췄다. 가위를 내려 놓은 노인이 뒤를 돌았다.
노인은 심통이 난 듯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몸은 조금 왜소했지만, 구부정한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실제 나이를 생각해 보면 말라 비틀어진 고목이 되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스스로 거동이 가능한 것 자체가 기적인 나이였으니.
주대현이 입을 꾹 닫고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내가 그 맞은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물었다.
“마실 건?”
“…….”
주대현이 손짓하자 허공에서 물결이 치더니 고풍스러운 다관茶罐 하나가 공중에 나타났다.
이어서 테이블 위로 손을 휘젓자 어느새 나와 주대현의 앞에 각각 손잡이가 없는 고른 찻잔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쪼르륵.
공중에 뜬 다관이 긴 물줄기를 늘어뜨리며 컵 위로 차를 따랐다.
주대현 것만.
“…….”
후루룩.
주대현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를 마셨다. 내가 어이가 없어 물었다.
“내 건?”
“알아서 따라 마셔라.”
괴팍한 노인네 같으니.
그러라는데 별수 있나. 셀프로 잔에 차를 따르고 마셨다. 그래도 따뜻한 기운의 차를 마시니 언짢았던 기분이 한결 누그러졌다.
모르긴 몰라도 대기업 회장님이 마시는 차는 다르긴 다른 모양이다.
“…….”
“…….”
피차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 침묵이 이어졌다.
차 맛을 즐기기엔 딱 좋았지만,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나보고 뻔뻔한 놈이라 했지?”
주대현이 슬쩍 눈을 치켜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말했는데 뭐 어쩌라고. 그런 당당하기 짝이 없는 눈빛이었다.
“달리 할 말이 있을 줄 알았는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이 자리에 엄연한 손님으로 와 있는 거였다. 몰래 침입하거나 정면에서 돌파한 불청객이 아니라, 정식으로 초대를 받은 손님이었다.
주대현이 원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없었다.
심지어 그룹의 후계자와 그 자매의 목숨을 구한 공로가 있으니, 귀빈貴賓이라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었다.
살갑게 환영 받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찬바람이 불 줄은 몰랐다.
“감사 인사라도 전할 줄 알았나?”
주대현의 목소리는 차갑고 건조했다.
화를 내는 것도, 냉정을 가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정말 어떠한 유감도 느끼지 아니하는 것처럼.
단조로운 보고를 읽는 것 같은 목소리로 주대현이 말했다.
“그 일은 네놈이 아니었어도 그룹 내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네놈이 한 건 일의 진행을 방해하고, 뒤늦게 수습한 것에 불과하지. 쓸데없는 오지랖에 배상을 청구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라.”
“…….”
탁.
내가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후계자를 살리고자 장손녀를 죽이려 하지 않았나.”
그게 주대현의 선택이었다.
주예린과 주하린. 두 사람 중 하나만 살릴 수 있다면, 주저없이 후계자인 주하린을 선택해- 선택받지 못한 쪽을 제거하는 것.
냉정한 판단이었지만, 자신의 피붙이를 상대로도 그렇게 기계처럼 정확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는 건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필요에 따른 선택이었을 뿐이지.”
하지만 주대현은 그걸 당연하다는 듯이 행했다.
“가지치기와 같은 거다. 과실을 맺을 수 있는 가지만 남기도록, 곁가지는 자르고 쳐내는 것.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 않나.”
주대현의 방 안에는, 가지런히 다듬어진 분재들이 가득했다.
크기와 모양이 가지각색인 분재들이 각각의 화분에 담겨 방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이 잘 관리된 걸작들이었다.
이곳의 예스럽고 정갈한 분위기는, 모두 주대현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 것이었다.
“그래서, 네겐 손녀가 가위로 잘라 내면 그만인 가지나 마찬가지란 거냐.”
“…….”
내 말에 대답이 없던 주대현이 불현듯 말머리를 돌렸다.
“그 흉내질은 어디서 배운 거냐?”
“뭐?”
주대현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네놈은 처음부터 내 계획을 모두 눈치채고 있었지. 보통 사람은 그걸 단번에 떠올리지 못한다. 네놈 또한 깨달았겠지.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
“얄팍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네놈은 처음부터 날 만나고 싶었을 뿐이잖나.”
그 말대로, 당초의 내 목적은 주대현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주하린을 도왔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의도가 어찌 됐든, 내가 그녀에게 도움을 주었고 주예린의 목숨을 구한 결과를 이끌어 낸 건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대현이 조소를 품었다.
“만약 그와 정반대의 일이 필요하다 했어도, 네놈이 같은 선택을 했을까?”
주대현을 만나기 위해 해야 했던 일이, 주하린을 돕고 주예린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주하린을 막고 주예린을 제거해야 하는 일이었다면.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불타는 숲에서 주하린이 애원하는 걸 뒤로한 채로. 확실히 목숨을 끊기 위해 손을 쓰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나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의 일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한 일도 필요에 의해 한 일이니 감사할 필요는 없다 이거지.”
주대현이 완고하게 입을 닫았다.
도저히 감사 인사를 할 줄 모르는 듯한 이 무뚝뚝한 노인네가 고운 시선으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우리가 동시에 향유하는 진실이 있었다. 주고받는 대화 속에 녹아내려 있는 사실은, 우리 둘 다 그걸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한 발자국 물러서 양보했다.
“그래, 그렇다 치고. 내가 필요해서 한 일이니까 감사 인사는 됐어. 그럼, 적어도 내가 하고자 했던 일에 대해선 도움을 주는 거겠지?”
내가 하고자 했던 일.
그건 바로 주대현을 만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일이었다.
수락인가, 거절인가. 주대현은 명확하게 의사를 내비치지 않고 반응이 없었다. 나는 그걸 수락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물었다.
“말 돌리지 않고 곧장 묻겠는데. 너도 나와 같은 상태인 거 맞지?”
그러자 주대현이 엄숙히 입을 열었다.
“영혼 분열을 말하는 거라면, 맞다.”
“역시.”
내게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저번에 ‘망량’이라는 녀석에게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 내 영혼은 둘 이상으로 쪼개져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혼이란 개념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개념적인 무언가라고 여겼다. 그게 쪼개져 있다는 얘기를 들어도 와닿는 얘기는 없었지만.
주대현이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상황이라는 건… 이런저런 정황적 이유들도 있었지만,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직감이었다.
아마 주대현도 똑같이 내게서 무언가를…….
“애송이가.”
주대현이 작게 윽박질렀다.
“쌓아 온 세월이 다르다. 내가 네놈처럼 어리숙한 방식으로 알게 됐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아, 예.”
나도 저쪽 세상에서 적지 않은 세월을 보내고 오긴 했다만. 그래도 주대현이 이 저주의 선배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럼 역시 네가 그 오랜 기간을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안식에는 대가가 필요하지.”
주대현이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나 네놈에겐, 값으로 치를 대가가 모자란 거다.”
그게 정확한 이유가 되는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주대현이 나와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나는 역사의 산 증인과도 같은 노인에게 물었다.
“오래 살아서 다행이란 생각은 없고?”
어떤 문제가 있건 간에. 누군가가 꿈꿔 마지않던 불사가 이뤄진 건 사실이었다. 죽지 않는 몸을 가지게 되어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자 주대현이 역정을 냈다.
“이 같은 짓을 당해 놓고 그딴 소릴 지껄이고 싶나?”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나 싶었지.”
아무래도 그런 부분에선 의견이 일치하는 듯했다.
“네놈에 대해서 알아봤다. 상당히 어리더군. 이제 고작해야 서른 언저리인가? 호적상으로는 말이다.”
“…….”
대현 그룹의 회장님이시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조사할 수 있었겠지.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데 이렇게 눈앞에 마주 두고 보면 보인다. 네놈의 영혼은… 그 이상으로 너덜너덜해져 있군.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닌 거냐?”
“얘기하자면 좀 길어서.”
주대현은 딱히 궁금한 건 아니었는지 캐묻지 않았다.
“인간사엔 순리라는 게 있다. 우리와 같이 굴레에서 벗어난 자들이 감히 그 흐름에 손을 대려 하면 안 되는 거다. 네놈과 나같이 시간이 멈춘 자들은 속세를 떠나는 것이 예의란 걸 모르나? 그런데 네놈은…….”
주대현이 못마땅하게 나를 흘겨봤다.
아까 말했던 뻔뻔하단 건 바로 이걸 두고 하는 말이었나.
하지만 아무리 방에 틀어박혀서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해도, 사람 부려서 이런저런 일을 지시하는 사람이 할 말은 또 아니지 않나?
자기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인가.
“네놈의 인간성은 나 이상으로 옅어져 있다. 네가 하는 행동은 모두 편린에 불과해. 기억에 의존하는 흉내와 다름없지. 그래서야 짐승이다. 사람 무리 사이에 짐승을 풀어 놓는 얼간이가 어디 있나?”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지 말고, 혼자 조용히 틀어박혀 시간을 보내라고.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게 같은 증상을 앓고 있는 선배가 오랜 기간 숙고 끝에 내린 해답이라면. 그대로 따르는 것이 편하고 쉬운 길이었다.
그러나 내 대답은 달랐다.
“나는 살고 싶어, 이 세상을.”
이곳과는 다른 세상에서, 죽지 않는 몸으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자로 살았던 적도 있지만. 그런 건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게다가.
“조금 빚을 지워 버린 게 있어서, 내가 행복해지지 않으면 발 뻗고 못 자겠다는 사람이 생겼거든.”
내가 계속 이대로 지낸다면. 평생을 그런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멍청한 놈.
그런 소리를 하며 나를 경멸할 줄 알았던 주대현은, 의외로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자냐?”
“…….”
“함께하고 싶은 여자가 있다는 말을 길게도 돌려서 말하는군.”
주대현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내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내 생각이 어떤지는 나도 몰라. 네 말대로, 내가 하는 행동은 모두 흉내에 불과할지도 모르니까.”
내 마음을 확실히 알기 위해서는, 역시 이 상황을 해결해야만 했다.
주대현이 찻잔을 기울인 후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당부하지.”
“뭘?”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이야기였다.
“아이는 갖지 마라.”
“…갑자기?”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주대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하니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의아하게 묻는 내게 주대현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유는 네놈도 잘 알고 있지 않나.”
“내가?”
짚이는 부분은 없었다.
“온전하지 못한 영혼으로 아이를 낳았을 때 생기는 일. 바로 얼마 전에 몸소 직관하지 않았나.”
“그건…….”
설마.
최근에 겪은 일 중에서, 영혼과 관련된 일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주예린과 주하린의 사건이었다.
“네놈과 난 온전한 영혼이 찢긴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괜찮지만, 태어날 때부터 영혼이 모자란 아이들은 자라면 자랄수록 점점 더 온전한 영혼을 갈구하게 되지.”
“온전한 영혼…….”
“가까운 성질을 가진 영혼과 합쳐지려 하는 거다.”
그건 정말로 익숙한 이야기였다.
그 사건의 숨겨진 배경을 깨닫게 되면서, 주대현이 왜 그런 당부를 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확실히 문제였다.
이번엔 우연히 가지고 있던 ‘세이렌의 눈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다음에도 같은 물건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고.
집행부의 말에 따르면, 같은 세이렌의 눈물이라 해도 치유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건 흔치 않다는 모양이니까.
“…그래.”
그러던 와중.
문득 의문이 한 가지 떠올랐다.
“그런데, 손녀들에게 그런 문제가 있었다면 자식은?”
주예린과 주하린.
아이를 가지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손녀인 두 사람뿐만 아니라 부모님인 누군가에게도 문제가 생겼을 터였다.
떠올려 보면 두 사람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 여위기라도 한 건지.
하지만 일찍 죽었다 해도 알려져 있지도 않은 건 이상…….
“내가 아비다.”
“…뭐?”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
그런 충격적인 말을 꺼낸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주예린과 주하린의 나이를 역산해 봤다.
주대현이 아무리 시간이 멈춘 채라고는 해도, 나와 달리 제법 나이를 먹은 상태였다. 노인의 몸. 그것도 정신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을 보낸 상황일 텐데.
딸이라고?
‘남자는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주대현의 늙은 몸을 내려다보며.
오랜 격언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