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65
165화 거래 하나
“이거 참…….”
백우진과 마주 선 남자가 거북하다는 얼굴을 하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처음 보는 얼굴의 외국인이었다. 잘 알지는 못했지만 추운 지방에서 왔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덜 풀린 기온에, 해가 떨어져 쌀쌀하기 그지없는 날씨에도 남자는 갑갑하다는 듯 얇은 티셔츠 한 장만을 걸치고 있었다. 그 위로 탄탄하게 새겨진 근육이 선명했다.
“잠귀도 밝으시군.”
눈치를 보아하니 남자는 백우진을 알고 있는 듯했다.
백우진에겐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고 있는 일의 특성상 얼굴을 자주 팔고 다녔으니, 자신이 모르는 자가 자신을 알고 있는 건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뒤로 넘긴 백발에 갈색 눈동자. 높은 콧대가 눈에 띄는 서양인.
기억력이 좋아 한 번 만나 본 사람은 대개 기억할 수 있었지만, 남자의 얼굴은 분명히 처음 보는 것이었다.
“누구지?”
“안드레이 노비코프.”
안드레이 노비코프.
역시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이름의 뉘앙스는 슬라브어권의 이름이 났다. 그렇다면 역시 그쪽 출신인가. 아니면 이름만 그럴 뿐, 실제 활동지는 다를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국내에서 활동하는 각성자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왜…….”
그런 자가 이런 곳까지는 왜 온 거지.
그 이유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남자의 곁에 백수아가 있었다. 가볍고 튼튼한 가방이 빵빵하게 보일 정도로 무언가를 가득 채운 채.
그 가득 찬 가방이 의미했다. 백수아는 제 발로 걸어 나간 것이라고.
갑작스럽게 끌려 가는 것이었다면 짐을 쌀 시간도 뭣도 없었을 테니까. 소리를 죽여 짐을 싸고 밤중에 몰래 빠져나왔고, 남자는 단순한 길잡이를 하고 있는 것.
그러니 이건 백수아의 의지로 집을 나가는 거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백우진이 말했다.
“돌아가자.”
그 말에 백수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등을 돌리고 있어 어떤 표정인지 백우진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 안드레이가 대답 없는 백수아를 대신해 백우진을 상대했다.
“그쪽이야말로 들어가 잠이나 마저 자지 그래.”
“네게 한 말이 아니다.”
그러자 안드레이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고 손바닥을 펼쳤다.
“이상하군. 당신 꽤 머리가 돌아가는 편 아니었나? 이 상황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거 알고 있을 텐데?”
역시 안드레이는 백우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백우진이 플레이아데스의 부길드장으로 활동할 시기의 모습이었다.
예전.
보스와 담화를 나누고 떠나는 백우진의 장면을 몰래 지켜보던 안드레이가 모습을 드러내며 물었다.
-의외로군요.
-뭐가 말이지?
안드레이의 시선은 멀리 떠나는 백우진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른 각성자가 모습을 숨기고 숨어 있다는 사실도, 누군가 자신의 등 뒤를 훔쳐 보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는 일반인.
그런 자가 플레이아데스 길드의 부길드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저쪽 길드장은 욕심이 많아 보이는데. 저런 자를 높은 자리에 앉혀 둘 작자로는 안 보였습니다.
보통의 길드라면 수뇌부라 하더라도 각성자가 그 자리를 채운다.
현장에서의 경험이 있는 은퇴자이거나,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현역이거나. 헌터 업계의 사정을 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건 각성자라는 의식이 팽배했다.
과연 정말 그럴지는 사람마다 다른 거라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세간의 인식은 그랬다.
그러자 보스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띄웠다.
-저자의 진가가 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친족이라는 이유로 가까이 둔 거 아닙니까?
-그 구렁이가 그럴 리가 없지.
보스는 고개를 저은 후 설명했다.
-처신이네.
-처신?
그때 백우진의 진가는 다른 무엇보다도 처신이었다.
주제를 알고, 불필요한 것을 궁금해하지 않고, 상관인 길드장의 명령에는 불합리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아도 따르는 것.
말하자면 꼭두각시와 같이, 귀찮은 일을 훌륭하게 도맡아서 하는 것. 그리고 과한 참견은 하지 않는 것.
머리가 잘 돌아가는 동시에 쓰기 편한 자는 좀처럼 없다. 백우진은 바로 그 귀한 인재였다.
-그게 바로 저 남자의 쓰임새지.
그런 게 중요한 건가?
관리자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안드레이는 그다지 공감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높으신 분들은 나름대로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는 듯했다.
어쨌거나 백우진이 그런 성격을 갖고 있는 거라면. 이렇게 ‘회수’하는 광경을 본다 하더라도 크게 반발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제를 아는 것.
그게 백우진의 특기라니까.
‘그런데…….’
백우진은 지금 이 상황에 저항하려 하고 있었다.
안 보는 사이에 성격이 변한 건지.
아니면 그 정도로 이 아이가 중요한 건지.
‘부길드장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들었는데.’
이유가 어찌 됐든, 안드레이의 임무는 아이를 무사히 회수하는 것이었다. 저항하는 자가 있다면 곤란했다.
“큰 소란을 벌이고 싶진 않은데 말이야, 이쪽은 얌전히 손을 떼 줬으면 하는 바람이야.”
그 말을 들은 백우진의 표정은 태연했다. 그렇게는 못 둔다는 태도가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알았다며 홀로 돌아갈 것 같은 분위기였다.
백우진이 몸을 돌렸다.
“말귀를 알아들었다니 다행…….”
다시금 돌아선 백우진의 손에 권총이 들려 있었다.
“왓!”
피슉!
커다란 총성은 들리지 않았다. 화약이 아닌 내장된 마석에서 마력을 터뜨리는 방식의 총에는 불필요한 소음을 만들지 않아도 탄환을 내보낼 수 있었다.
카각!
총알은 딱딱한 무언가를 긁는 소리를 내고 멈췄다.
얼음이었다. 안드레이가 만들어 낸 얼음 속에 총알이 갇혀 있었다. 투명한 얼음은 총알이 파고든 자국부터 멈춰 선 총알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였다.
“놀래라……. 이런 걸로 당할 놈을 보내겠냐고.”
마나 건.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저항 중에선 그나마 위력적인 물건이지만. 그래 봤자 충분한 수준을 갖춘 각성자 상대로는 의미가 없었다.
동시에 백우진의 손발에도 얼음으로 만들어진 고리가 생겼다. 그것은 땅에 붙어 백우진을 바닥 위에 납작 엎드리게 만들었다.
안드레이가 백우진의 곁에 가 쭈그려 앉았다.
이 일에 방해가 들어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의 소유권을 결정하는 싸움은 모두 한참 전에 끝났다. 나름대로 덩치가 있는 세력들 사이에선 모두 합의가 된 상태였다.
백우진이 저항한 건 그 상황을 모르기 때문이겠지.
나중에 경찰이나 협회에 신고해도 귀찮은 일이니. 안드레이는 한 가지 사실을 전해 두기로 정했다.
“우린 고르곤이다.”
“……!”
백우진 또한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길드의 이름이라기보다는, 마피아나 카르텔과 같은 범죄 조직에 가까운 집단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집단은, 플레이아데스 길드와도 연이 있었다.
“이만하면 알아듣겠지? 이 꼬마는 진짜로 네 사촌인 것도 아니고. 왜 내가 이 먼 이국 땅까지 와야 했는지.”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백우진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지시를 넘어 습관으로 굳어 버린 행동 원리가 백우진의 생각을 좀먹고 있었다. 저항할 의지가 옅어졌다.
그 얼마 남지 않은 의지를 모아 백우진이 입을 열었다.
“…길드는 사라졌다.”
플레이아데스 길드의 부길드장이었던 남자가 아니라, 백우진으로서.
“네 이름은 백수아야.”
백수아에게 하는 말이었다.
백수아는 무언가 손에 쥘 것이 필요한 듯 책가방 어깨끈을 꽉 쥐고 있었다.
안드레이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이 어떤 결론에 다다르든, 이 자리에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 남자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떼를 써도 이뤄지지 않는 일을 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즐거웠어요.”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는 살을 칼로 잘라 내는 것 같은 목소리로.
“가족 놀이.”
그 말을 들은 백우진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얼어붙은 손과 발. 마력 하나 없는 일반인인 백우진은 그 속박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설령 이 자리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안드레이의 배후가 고르곤이라는 걸 알아 버린 이상. 그것까지 계산에 넣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상책. 그 사실을 금세 깨닫고 마는 것이 백우진이었다.
“그럼. 그 얼음은 해 뜨면 녹을 거다.”
그렇게 말한 안드레이가 몸을 일으켜 백수아를 데리고 떠났다.
* * *
“저체온증?”
백우진이 입원했다는 소식에 병원에 와 보니, 그 이유가 의문이었다.
그 말을 전해 준 건 센터장 영감이었다.
“그래.”
“확실히 날이 좀 덜 풀리긴 했는데. 한겨울도 아니고 이런 시기에?”
환절기.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감기 정도엔 걸릴 수도 있지만.
백우진이 그런 관리를 놓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와 같은 생각인지, 영감이 턱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는 건데. 영 말을 안 해 준단 말이지.”
“흠.”
그때 백우진이 로비로 걸어 나왔다. 환자복이 아니라 평상복을 입은 채였다.
“자네, 괜찮나? 입원은?”
“지나친 걱정입니다. 그럴 정도는 아닙니다.”
나까지 와 있는 모습을 보더니 백우진은 잠시 침묵했다.
“지장을 초래했군요. 죄송합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싸울 일도 없는 양반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니 궁금해서 와 본 것뿐이다.
“돌아가죠.”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백우진의 말에 우리는 무어라 토를 달지 않고 그대로 말에 따랐다.
영감은 다른 볼일이 있다고 먼저 갔고. 백우진은 구급차를 타고 오느라 차가 없었다. 택시로 돌아간다곤 했지만.
“데려다 주겠습니다.”
“…….”
오늘은 반대로 내가 운전석에 앉아 백우진을 태웠다.
백우진의 집은 대충 알고 있지만 정확한 주소를 몰랐다. 네비게이션에 백우진이 주소를 입력하길 기다리는데, 백우진의 손가락이 시원스레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바라보자 백우진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데에 좀 들려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백우진이 목적지를 입력했다.
어디로 가는가 했더니. 백우진이 입력한 목적지는 어느 초등학교였다.
초등학교 정문에는 커다랗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신입생들의 입학을 환영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벌써 그럴 땐가.’
시간은 이르지 않았다. 안에서는 입학식이 한창인 듯했다.
백우진은 안에 들어가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초등학교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백수아를 기다리나?’
갑작스레 병원 신세를 지느라 배웅은 못 해 줬어도 마중은 하러 온 건가.
시간이 지나 학교가 학생과 학부모들을 토해 냈다. 구름처럼 몰려드는 아이와 어른들의 무리 속에 내가 아는 아이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단순히 지나친 게 아니다.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중에 백수아는 없다는 걸.
오늘 입학하는 게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여기는 왜 왔지?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백우진은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담배 한 개비를 입가에 물고 있었다.
‘끊은 줄 알았는데.’
그 짐작이 틀리지 않았는지 라이터는 찾지 못하고 있었다.
별수 없나.
멀찍이 초등학교가 보이긴 하지만, 여긴 사람이 잘 오지 않는 골목이었다. 조금 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손끝에 작은 불꽃을 만들었다.
백우진은 그걸로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고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이윽고 백우진이 불을 물렸다.
“…미안합니다. 역시 됐습니다.”
내가 처음 만난 백우진은 애연가였다. 담배를 피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왜 담배를 끊었는지. 왜 다시 피우려는 건지. 왜 기다릴 사람이 없는 초등학교 앞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백우진이 말했다.
“센터는 그만둘 겁니다.”
“그렇습니까.”
기억이 떠올랐다. 백우진이 말해 준 센터에서 일하는 이유가.
그렇다면 당연히 작전에도 참가할 리는 없었다. 사람을 새로 구해야겠군. 번거로운 일이 되었지만, 백우진을 탓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도율 씨.”
가명이 아닌 이름을 불렸다.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당신이 클레어 씨를 구하러 갈 때부터.”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게 제법 결정적인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백우진과 어울리다 보면 언젠가 눈치챌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백우진이 그런 걸로 협박 같은 걸 할 사람도 아니고.
눈치챈 후로도 굳이 말하지 않고 비밀을 지키고 있었으니.
이름을 말한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와 대화하는 건 전 부길드장도 아니고. 센터의 동료도 아니고. 백우진이라고 하는 한 명의 남자였다.
“나랑 거래 하나 합시다.”
그 남자가 동업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