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55
55화 실력 좀 보자 이거군
센터장 영감과의 통화를 마치고 돌아오니 도은이와 클레어가 진지한 얼굴로 쑥덕거리고 있었다. 작전이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 얘기를 그리 진지하게들 하고 있냐?”
내가 그리 묻자 도은이와 클레어가 화들짝 어깨를 움츠렸다.
“까, 깜짝이야! 기척 좀 내고 다녀라!”
“…그냥 평범하게 걸어온 건데.”
특별히 기척을 숨기고 조용히 다가가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무림에서의 생활이 몸에 뱄다고는 하지만 각성자인 클레어도 못 알아챌 정도는 아니었다. 알아채지 못한 건 얘기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얘기였나.
“그래서 무슨 얘기 하던 중이었는데?”
“아니, 아무것도…….”
도은이는 얼버무렸고 클레어는 어색하게 눈길을 피했다.
나는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여자끼리 나눌 얘기가 있었던 거겠지. 아니라면 둘이 뒤에서 내 욕이라도 하면서 놀았거나.
“앗!”
도은이가 나를 가리키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왜?”
심각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말을 돌리기 위한 연기라고 치기엔 지나치게 진지했다.
도은이가 내 셔츠 자락을 확 젖혔다. 단추가 없는 탓에 가슴 한복판이 훤히 드러났다. 길거리에 보일 만한 꼴이 아니었다.
“이, 이게 미쳤나!”
“미친 건 너지!”
팍! 하고 도은이의 손가락이 내 가슴의 상처를 찔렀다.
“잠깐 안 본 사이에 무슨 짓을 하고 온 거야!”
…그 위에 있는 건 진한 입술 자국이었다.
아무리 화장품으로 덮었다고 하지만, 깊은 흉터 자국까지 완전히 가릴 순 없었다. 어두운 술집 화장실 조명으로 봤을 땐 그럴싸하다 생각했지만, 화려한 밤거리로 나오니 티가 났다.
그러나 도은이는 그 입술 자국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긴 듯 흉터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이제 보니 이거 완전 묘수였군.
“뭐 하는 놈이냐고, 너!”
도은이가 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주의를 돌린 건 좋았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이걸 뭐라고 변명한다.
“진짜 남자란 것들은 믿을 게 못 된다. 어떻게 이런 여자를 옆에 두고도 한 눈을 팔 수가…….”
“도은아…….”
“언니도 뭐라고 좀 해!”
도은이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클레어를 살피다 불현듯 몸이 굳었다. 직후 파고들듯 클레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클레어는 시선을 피하며 입술이 보이지 않게 입을 앙 다물었다.
“웁!”
도은이가 클레어의 뺨을 주물러 입술을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그녀의 입술 위엔 평소 답지 않은 붉은색 화장품이 칠해져 있었다.
“우…….”
도은이가 엄지로 클레어의 입술 위를 훑었다. 붉은 안료가 손가락 위에 묻어나왔다. 그리고 그걸 내 가슴 위에 새겨진 입술 자국 옆에 두고 비교했다.
고작 색이 비슷한 것뿐이지만 도은이는 눈치챘다, 이 자국의 주인이 누군지. 그야 클레어는 평소에 입술에 뭔가를 바르지 않으니까.
오랜 침묵 끝에 도은이가 입을 열었다.
“그……. 언니, 몸으로 유혹하는 건 싫다고 하지 않았어?”
“그, 그런 거 아냐!”
클레어는 도은이가 무슨 말실수라도 할 것처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둘은 티격태격 대고 있었다.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넘어져서 그래.”
“머어……?”
“화장실 바닥이 미끄러웠거든.”
나는 클레어의 손목을 잡아당겨 품에 끌어왔다. 클레어의 입술과 자국 위치는 높낮이가 얼추 비슷했다.
“봐, 비슷하지.”
이 정도면 제법 그럴싸한 변명이다.
도은이는 생각할 게 있는지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시간이 지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전부 이해했으.”
“내 말 맞지?”
“아……. 그건 그렇다 치자.”
어쩐지 관심이 없어진 듯이 대충 넘어간 도은이가 히죽 웃으며 지적했다.
“알겠으니까 그만 좀 놔줘. 우리 언니 익겠다.”
내려다 보니 클레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도은이의 말대로 손을 놔주니 그녀는 스르르 미끄러지듯 도은이의 등 뒤로 숨었다. 내가 뭐, 못 할 짓이라도 했나.
혹시 부끄럼을 타는 건가 싶었지만…….
‘그럴 리는 없나.’
이전엔 비슷한 짓을 해도 잘만 장단에 맞춰 주던 클레어였다. 그리 자주 있던 기회는 아니지만, 몇 번 카메라 앞에 설 때면 곧잘 조신한 아내 행세를 하곤 했다. 이제 와서 창피하다고 생각할 리가.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도은이의 존재였다. 아무래도 친동생처럼 여기는 도은이 앞에서 깨소금 연기를 하는 건 자괴감이 들 테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조금은 그렇다.
턱. 도은이가 내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오빠.”
“뭐.”
“다른 회사 가서 여직원이랑 일하게 되면, 무조건 나한테 보고.”
“…왜?”
어차피 같이 일할 사람은 할아버지 한 명뿐이긴 하지만.
“그냥 그런 줄 알아.”
도은이가 단호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 * *
“그럼 아내분 좀 빌리겠습니다~”
“…그것 좀 그만 해라.”
“히힛.”
운전대를 쥔 도은이가 창문을 열고 팔을 걸쳤다.
도은이가 몸 건강히 복귀한 지금, 운전을 비롯한 모든 매니저 업무를 소화하는 중이었다. 거기에 내가 굳이 손을 거들 필요는 없었다. 원래 나 없이도 오래 손발을 맞춰 온 사이니까.
도은이가 낫고 나면 헌터 생활에 미련이 없을 거라던 클레어는 의외로 아직 활동을 이어 가고 있었다. 지금 속한 팀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의무감이 아니라 즐거움을 느끼는 듯하니 좋은 징조였다.
클레어는 마중하러 서 있는 나를 지나쳐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러자 도은이가 그녀의 옆구리를 마구 찔렀다.
왜 애꿎은 사람 괴롭히냐고 하려는데, 클레어가 내게 말했다.
“…다녀올게요.”
“…아, 예.”
얼떨결에 대답했더니 도은이가 이번엔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대답이 시원찮다는 이유였다.
“…다녀오세요.”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해 죽겠는데, 도은이는 그런 우리 둘을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요즘 애가 이런 식이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가 출발하자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주인인 클레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넓은 집을 차지하고 있는 건, 나 혼자만의 얘기가 아니었다.
「대협, 혹시 백수 됐습니까?」
티비를 보며 간식이나 먹고 있는 진짜 백수(짐승)가 여기 있었다.
놈은 소파 위에 드러누워 낄낄거리고 있었다. 클레어 앞에선 애완동물 행세를 하지만, 그녀가 없는 사이엔 이런 방탕한 생활을 즐겨온 것이었다. 나도 클레어와 함께 밖에 돌아다니고 있었으니, 녀석은 완전히 제 세상이라도 된 것처럼 늘어져 있었다.
앞뒤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공사 구분이 철저하다고 해야 하나.
「너 좀 찌지 않았냐?」
「이 정도면 애굣살입니다, 대협.」
그런 생활을 하고 있으니 살이 찌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림에서 튀어 나온 놈도 살이 찔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하긴, 매끼 먹는 양이 얼만데 그게 살이 되지 않으면 오히려 억울하지.
「나가자.」
「예?」
나는 놈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녀석이 허공에 매달려 아둥바둥거렸지만 그래 봤자 저항할 순 없었다. 땅이 다리에 닿질 않으니.
「자, 잠깐만요! 대협! 말로 합시다! 갑자기 가긴 어딜 간다는 겁니까?!」
내가 향한 곳은 동네 뒷산.
처음으로 흰돌이를 주워 왔던 장소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루마리를 펼쳤던 곳이다.
「서, 설마…….」
그 추억의 장소를 알아본 녀석의 안색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여태까지 단둘이 이곳에 온 건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으니까.
「절 내다 버릴 생각입니까?! 아, 아무리 대협이라도 이러면 안 돼죠! 사장님이 절 얼마나 귀여워 하는데요! 분명 찾을 겁니다!」
「시끄러워.」
주워온 곳에 다시 내다 버리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었다. 굳이 여길 온 이유는 가까운 곳 중에서도 그나마 인기척이 없고 조용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때 굵은 나뭇가지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다시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예의 바른 인사. 그 인사를 건넨 건 다름 아닌 저 까마귀였다.
며칠 전 내게 바람을 맞고 얌전히 물러났던 녀석이었다.
흰돌이가 두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이 주위에 사람이라곤 나 하나 뿐이었다. 동물을 포함해도 녀석과 저 까마귀 둘 뿐. 목소리를 낸 건 저 까마귀가 맞았다.
녀석은 사람 말을 하는 까마귀를 보고 무척 놀란 눈치였다. 그러는 자기는 전음을 보내는 주제에.
까마귀가 정중하게 물었다.
“이렇게 다시 한번 찾아 주신 건, 이번엔 초대에 응하실 생각이라 받아들여도 좋을지요?”
“그래.”
클레어에게 물어봤더니, 의외로 흔쾌히 수락했다.
조금 늦을 수도 있어 저녁 준비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말에도 싫어하지 않았던 걸 보면, 도은이랑 둘이서 외식이라도 하고 들어올 생각으로 보였다.
“어려운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깍듯이 감사 인사를 전하는 까마귀. 귀한 손님이라도 대접하는 듯한 태도였지만, 그게 본심이라고 여길 순 없었다.
이 녀석들이 나를 꾀어내기 위해 했던 말이 원인이었다.
“내가 복수할 대상을 알려 주겠다고 했지.”
까마귀가 나를 처음 찾아왔을 때.
기를 통해 평범한 동물이 아니란 건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몬스터라고 하기엔 근처에 게이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사람 말을 하기까지.
그때 까마귀는 나를 자신들이 머무는 곳으로 초대하겠다는 말과 함께, 내 힘이 진정으로 멸해야 할 존재는 따로 있다는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냐는 질문에, 녀석은 복수하고 싶지 않냐고 되물었다.
…복수라.
동생을 그렇게 만든 놈들에 대한 복수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에 대한 복수란 말인가.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나는 제대로 된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녀석들의 초대에 응했다.
“그럼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가지에서 뛰어내린 까마귀가 부리로 깃털을 하나 뽑았다.
투학!
공중에 날린 깃털로부터 먹물 같은 것이 힘껏 쏟아져 나오더니 검은 테두리를 그려 냈다. 테두리의 안쪽엔 색이 닳은 듯한 풍경이 보였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균열을 닮았군.’
까마귀가 먼저 들어가자 풍경 위로 물결이 요동치는 듯한 현상이 일었다. 뒤따라 그 너머로 걸음을 옮기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안개가 낀 산골이었다.
아니, 사실 안개가 낀 것처럼 보인 것은 구름이었다. 시선을 돌려 보면 산봉우리 대신 기둥처럼 서 있는 바위산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걸어야 하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괜찮아.”
그건 내가 할 게 아니었으니까.
「예? 저가요?」
「그래.」
「…왜요?」
흰돌이는 아직도 목덜미를 붙잡혀 대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자기가 왜 다른 사람을 태우고 험난한 산속을 달려야 하냐고.
「내가 널 왜 키우는지 잊었냐?」
「그야 기억하죠. 아픈 동생의 원기를 보충하기 위해…….」
「걔 다 나았다.」
그 말에 흰돌이가 딱딱하게 굳었다. 아까 농담으로 버리니 마니 하던 때와는 상황의 심각성이 다르다는 걸 깨달은 눈치였다.
「그 말인즉슨…….」
「너… 이제 쓸모가 없네?」
물론 그동안 함께 지내 온 정이 있긴 하다. 클레어도, 도은이도 녀석을 귀여워하긴 하고.
그렇다고 밥만 처먹고 뒹굴거리는 걸 가만히 지켜볼 내가 아니었다. 그런 내 성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게 녀석이기도 했고.
탁.
흰돌이가 땅 위로 착지했다. 녀석은 조그마한 모습에서 처음 봤던 날과 같이 커다란 덩치로 변했다. 사람 몇 명 정도는 등 뒤에 올라타도 거뜬한 모습으로.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대협.」
거대한 덩치의 백호가 내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 * *
과연 백호는 산골 출신이라 그런지 아무리 험난한 산속이어도 거침없이 잘 달렸다. 나무 위를 날아다니는 까마귀를 거의 뒤처지지 않고 쫓아갈 정도였다.
그때 벼락같은 노호성이 울렸다.
“멈춰라!”
우릴 멈춰 세운 건 나무 껍질 같은 피부를 가진 거인으로, 백호의 등 뒤에 올라탄 상태에서도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그 얼굴은 마치 대충 조각해 놓은 탈을 닮았다.
“이 너머로는 지나가지 못한다.”
거인의 말에 나는 머리 위를 맴도는 까마귀를 바라봤다.
“미쳤습니까, 장승! 이분은 수장님의 객입니다!”
“전해 들은 바 없다.”
장승이라 불린 거인이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장승과 까마귀는 서로 면식이 있는 듯했지만 얘기가 통하지 않았다. 까마귀가 몇 번 더 쫑알거리며 설득했지만 장승은 요지부동이었다.
“…죄송합니다, 도율 님. 뭐라 드릴 말씀이 없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아, 됐어.”
내가 백호의 등 뒤에서 뛰어내렸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막아서는 문지기가 길을 비켜 주지 않다니. 그 정도 정보 전달 하나 안 되는 막장 집단이라 보기엔 이곳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범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까마귀에게 비밀로 하고 그 수장이란 자가 따로 내린 지령에 가까워 보였다.
“요컨대… 실력 좀 보자 이거군.”
이 또한 환영 인사의 일부라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