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11
011화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을 중심으로 빙 둘러싸인 몇 개의 의자, 그리고 벽면을 따라 한 번 더 둘러싸인 더 많은 의자들.
안쪽은 주요 스태프를 비롯한 주·조연 배우들이, 바깥쪽은 일반 스태프들이나 배우들을 따라온 매니저들이 앉는 자리였다.
‘내 자리는 항상 저쪽이었는데.’
가끔 대본 리딩에 따라간다 해도 매니저였던 이정의 자리는 항상 바깥쪽이었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배우로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대본 리딩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인사한 이정은 제 역할과 이름이 쓰인 자리표를 슬며시 쓰다듬었다.
‘진짜 연기를 하긴 하는구나 내가.’
능력을 알게 되고, 연습하고, 오디션을 보고, 합격하고. 내내 반쯤은 꿈꾸는 것 같았던 기분이 단숨에 현실로 내동댕이쳐졌다.
“언니 오랜만~”
“진짜 오랜만이다. 주린아!”
“아이고 지겨워. 또 미자 씨야?”
“내가 할 말이거든?”
서로 안면이 있는 몇몇 배우들이 살갑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동떨어진 배우는 이정 하나였다.
‘적응해야 해.’
박민혁의 매니저였던 이정은 이제 없다. 이제는 배우 이이정일 뿐이니, 누구보다 저 자신을 잘 보여 줘야 했다.
“안녕하세요. 박재민 역의 이이정입니다.”
“어머, 서브 남주가 이렇게 잘생겨도 돼요? 반가워요. 우성연이에요.”
“언니 주책 좀! 안녕하세요. 백주린이에요.”
주요 인물이다 보니 자리가 붙은 세 명에게 인사했지만 되돌아온 답은 둘 뿐이었다. 남자 주인공 강현은 이정을 위아래로 훑고는 슥, 시선을 피했다.
“하여간 저 싸가지….”
“언니이!”
주린이 작게 성연을 타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예상했었던 이정은 역시나, 하고 넘겨 버렸다.
“슬슬 시작할까요? 강현 씨부터 인사해 주세요.”
하나둘, 자리에 앉기 시작하고 주연배우 4명과 조연 배우들, 스태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감독이 남자 주인공 역을 맡은 강현에게 인사를 권하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슬쩍 인사했다.
“최영호 역의 강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이 굵고 댄디한 미남으로 이런 재벌 로맨스 코미디에 자주 얼굴을 비추는 강현,
“이수현 역의 우성연입니다. 제가 뛰어다니는 씬이 정말 많은데 NG 안 나도록 연습 열심히 할게요!”
아역으로 시작해서 아이돌로 데뷔, 근래에는 또다시 연기를 시작해 나쁘지 않은 연기력과 함께 시청률을 보장하는 우성연.
“한예림 역의 백주린입니다.”
그리고 모델 출신이지만 연기자로서 더 인지도가 높은 백주린까지. 이정을 제외한 모두가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배우들이었다. 하물며 조연들조차도.
“안녕하십니까. 박재민 역할을 맡은 신인 배우 이이정입니다.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연 배우들에게 형식적인 박수가 이어지고, 곧이어 드라마의 감초 역할을 해 줄 조연 배우들이 연달아 인사했다.
“재민 역 맡은 저 친구는 어디 소속이래요?”
“글쎄요. 처음 보는 배운데.”
“모델 출신인가?”
“아이돌 아니에요?”
유일하게 오디션을 통해 결정된 주연배우.
하지만 아무도 그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여기저기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저런 추측들이 난무하는 와중에 이정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아는 얼굴은…… 절반 정도네.’
이정이 연예인에 대해 외우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년 뒤, 매니저 일을 시작한 이후부터라 지금 시기에 제대로 알고 있는 배우들은 많지 않았다.
‘저 사람은 마약으로 잡혀 들어갔고, 저 사람은 작품 연달아서 말아 먹고 서서히 인지도가 깎인 경우고….’
연예인들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의 감독 박승철입니다. 늘 그렇듯 무사고, 무펑크로 몸 건강하게 찍었으면 좋겠습니다~”
“작가 이수희입니다. 이미 눈치채신 분도 계시지만 이번 드라마는 제가 평소에 쓰던 것과 조금 다른 글이 될 예정입니다.”
이정과 눈을 마주친 이수희 작가가 크게 숨을 들이켜더니 생긋 웃으며 말했다
“모두 놀라지 마시고, 중간에 하차하지 마시고 잘 따라와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인사가 끝나고, 메이킹 필름용 카메라를 다시 한번 조절한 스태프가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대본 리딩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대본 리딩은 이미 대본이 나온 3화까지로, 이야기의 극 초반이기 때문에 이정의 대사는 매우 적었다.
“아우~ 어떻게 된 게 또 탈락이냐 또 탈락! 세상엔 회사가 이렇게 많은데 내가 갈 회사는 하나도 없네.”
통통 튀는 성연의 목소리가 밝게 대본 리딩실을 울렸다. 아주 좋은 연기라곤 할 수 없지만, 구김살 없고 밝은 캐릭터만큼은 잘 살린 목소리였다.
“아, 진짜! 저기요. 아저씨! 사람을 쳤으면 미안하다고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쌍방으로 길 가다 부딪쳤는데 왜 저만 사과를 합니까?”
강현 역시 비슷한 연기를 해 온 덕에 능숙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아저씨는 아무런 피해 없지만 지금 할부도 안 끝난 제 핸드폰은 박살 났거든요? 배상해 주세요!”
“똑같이 지나가다, 똑같이 부딪쳐서, 똑같이 핸드폰 떨어뜨렸고, 나는 잡았고, 당신은 못 잡았는데 왜 내가 배상해 줍니까?”
이정은 1화에 나오지 않는다. 주연 캐릭터 4명 중 유일하게 1화에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라 대본을 넘기는 그의 손놀림은 거침없었다.
“오늘 면접은 제발 붙게 해 주세요. 제발 제발.”
그리고 2화. 이정의 차례가 다가오자 모두의 시선이 이정에게 향했다. 오디션을 통해 뽑은 유일한 주연배우. 기대와 의심이 섞인 눈초리를 피하지 않은 그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수현 씨는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스펙이 떨어지는데, 우리 회사 최종 면접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조용히 들고 있던 대본을 내려놓은 그가 펜을 돌리며 수현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걸린 옅은 미소와 저음임에도 부드러운 목소리. 회사 직원들에게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며, 여유를 잃지 않는 젊은 CEO 그 자체.
“신선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선함이요?”
“지나치게 높은 스펙을 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천편일률적인 타 지원자들과 달리 새로운 모습이나 창의성을 보여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성연이 의도적으로 삑사리를 내자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지한 분위기의 극이 아닌 만큼 대본 리딩도 가볍고 쾌활한 상태에서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이수현 씨 옆에 계신 다른 지원자분들은 이수현 씨에 비해 신선함도, 창의성도 부족하다는 말씀이신가요?”
이정이 설핏 웃으며 성연과 눈을 마주했다.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장난스럽기도 한 말투에 그녀의 얼굴이 정말로 새빨개졌다.
“어, 그건…….”
지나친 긴장으로 과도하게 톤을 높이거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딱 상대 역만 바라보며 대사를 하는 모습이 신인답지 않게 자연스러웠다.
“수현 양의 신선함이 다른 지원자들의 능력을 뛰어넘을 정도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어,”
성연이 힐끗힐끗 이정을 보다 순간 대사를 놓쳤다.
“뭐, 좋습니다.”
이정은 그런 그녀를 기다리는 대신 자연스럽게 대사를 이었다.
“신입의 열정이 때론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풀어 주는 법이죠.”
전부 외워 필요없는 대본을 소리나게 덮은 이정이 생긋 웃었다.
“지원자분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나가시면서 교통비 받아가시고요. 합격 통보는 이번 주 내로 개별 연락이 갈 예정이니 참고해 주세요.”
짧은 이정의 씬이 끝나고 또다시 메인 주인공들의 대사가 이어지는 동안 이정에 대한 평가가 이어졌다.
“괜찮은데? 너무 튀지도 않고.”
“부드러운 서브 남주 역할로는 딱 맞는 거 같은데요.”
“난 또 저번처럼 소속사 낙하산인 줄… 왜 전에 JR 같은 애 있잖아요.”
“끔찍했지….”
오디션조차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가 싶었던 몇몇 스태프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힘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 중에는 그들의 야근을 유발하는 NG 천재도 있기 때문이었다.
‘혼자 연습할 때도 좋았지만 대본 리딩은 느낌이 또 다르네.’
정작 당사자인 이정은 배우들의 호흡을 따라가느라 바빴다. 스태프들의 칭찬 아닌 칭찬을 듣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충분히 들뜬 상태였다.
‘저런 식으로도 가능하구나. 대사는 똑같아도 느낌은 좀 다르네.’
능력으로 구현된 환상은 정직하게 대본을 기준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배우들이 흔히 하는 애드리브나 앞뒤 분위기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어조 등은 살리지 못했다.
‘확실히 한계가 있어.’
능력을 통한 연습도 절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그는 부지런히 펜을 놀렸다. 등장하지 않는 장면이라 해서 의미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다들 분위기 파악은 한 거 같은데, 슬슬 끝낼까요?”
2화 중반, 박승철 감독이 리딩을 끊었다. 분위기 파악과 인사가 주된 목적이었던 만큼 가볍게 넘어가려는 듯했다.
‘아 다음에 대사 있는데.’
몇 줄 뒤에 대사가 있었던 이정은 내심 아쉬웠지만 그를 제외한 모두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이 뒤로 일정 있으신 분, 손!”
박승철 감독이 의례적으로 사람들의 의견을 물었지만, 누구 하나 손을 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다들 그럼 시간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대본 리딩이 끝나면 곧바로 박 감독 특유의 회식이 이어지리란 걸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갑시다! 소고깃집으로!”
박 감독은 그들의 반응을 즐기듯 호기롭게 책상을 내려치며 외쳤다.
“내가, 쏜다!!”
“예!! 소고기!”
“소고기! 소고기! 한우! 꽃등심!”
이즈음엔 스태프나 배우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져있는 정도지만 후에 예능 방송을 타고 더 유명해진 박 감독의 소고기 회식은 여러모로 사랑받는 이벤트였다.
“감독님 최고!!”
“제가 이 맛에 감독님이랑 일하죠!”
“뭐 이놈아?”
기원제 비용과 박 감독의 사비, 그리고 원래 책정되어있는 회식비를 모아 아예 통째로 식당을 빌리는 소고기 회식.
“자 다들 빠르게 움직입시다! 주소 모르는 사람은 스태프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세요!”
쉽게 먹기 힘든 고급 소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으니 모두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죽하면 회식 한 번 경험해 보고 싶어 박 감독과 작업하는 배우도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 역시 지원에게 전해 들었을 뿐 실제로 참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드라마만 찍는 박 감독과 엮일 일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저 박 감독님 회식은 처음인데 기대되네요!”
“아 주린 씨 처음이시구나. 거기 소고기가 진짜 죽여 줘요. 원랜 더 비싼데 박 감독님 친척이 하시는 곳이라….”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흩어지고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는 이정은 지나가던 스태프를 붙잡았다.
“죄송한데 주소 좀….”
“이정 씨!”
그때 아까 보았던 조연출이 그를 불렀다.
“차 안 가지고 왔죠?”
“면허도 없습니다….”
이정이 뻘쭘하게 대답하자 조연출이 그를 잡아 이끌었다.
“에고, 차는 없어도 면허는 있어야죠. 일단 오늘은 제 차 타고 움직여요. 안 그래도 서 교수님이 부탁하셨어요.”
“서 교수님이요?”
“어? 말씀 못 들으셨어요? 재민 역 추천해 달라고 서 교수님한테 부탁한 거 저에요.”
동그란 은테 안경을 쓴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이정 씨가 여기 있을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한 은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