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228
228화
“서 교수님이 이런 걸 추천해 주실 줄 몰랐네. 난 장르물일 줄 알았는데.”
“장르물이잖아?”
“그건 그런데… 판타지 장르일 줄은 몰랐지.”
서 교수가 추천해 준 두 개의 시나리오 중 드라마 쪽을 읽어보던 이정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그만큼 그녀가 추천해 준 드라마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이런 드라마니까 너랑 나랑 같이 나오는 거야. 일반 로코였어 봐. 너나 나나 서로 상대역이랑 로맨스 연기하는 거 볼 수나 있겠냐.”
이정을 밀어내고 소파에 누워 대본을 보던 지원이 말했다.
그녀의 말에 잠시 지원의 로맨스 연기를 지켜보는 상상을 한 이정이 얼굴을 구겼다.
‘차라리 진짜 연애라면 민혁과 연애하던 꼴을 오래 봐서 상관없는데.’
로맨스를 연기하는 모습을 본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거의 조건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으. 징그러워.”
“내가 할 말이거든.”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모두 한참 동안 대본에 집중했다.
“끝.”
두 시간 뒤, 이정이 대본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순히 시나리오를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대충이나마 캐릭터를 분석한 뒤 연습을 하기로 했다. 다시 말해 이정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어느 정도 캐릭터 분석이 끝났다는 말과도 같았다.
“벌써?”
“시나리오는 다 봤고 이제 대본 볼 거니까 천천히 해. 커피 안 마실 거지?”
“응.”
이정이 자기 몫의 커피를 내려 다시 소파에 기대앉았다. 지원에게 말한 대로 시나리오로 대략적인 캐릭터 분석은 끝났지만, 아직 정식 대본은 읽지 않았다.
“음….”
“야, 근데 이게 성공할까?”
“글쎄.”
그 점은 이정도 의문이었다. 회귀 전에 본 적 없는 드라마이기도 하고, 그가 알고 있는 성공 공식에서 벗어나 있는 드라마이기도 한 탓이었다.
“로맨스도 없어, 판타지풍이야, 스토리도 별로 안 가벼워. 이건 아무래도 이건 코어 소수 시청자들을 위한 드라마 같은데.”
“원래 그 코어 소수 시청자들이 제일 무서운 거지.”
이정은 서 교수가 왜 그와 지원에게 이번 드라마를 추천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여전히 방송계에서는 시청률이 곧 성공의 지표지만, 배우들의 인지도 상승은 꼭 시청률과 비례하지 않는다.
특히, 이번에 서 교수가 추천해 준 드라마처럼 소수가 열광할 법한 드라마의 경우, 시청률 대비 활발한 SNS 반응이 배우들의 얼굴을 알리는 데 더 도움을 주기 마련이었다.
“너는 팬 좀 더 붙으라고 추천해 주신 모양이고.”
지원도 이제 어딜 가던 알아보는 사람 한 명쯤은 있을 정도로 성장하긴 했지만, 이정에 비해 탄탄한 팬층은 부족한 상태.
소수의 시청자들을 확실히 사로잡을 법한 드라마인 만큼 제대로 된 팬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서 교수의 마음인 듯했다.
“너는?”
“나는….”
그러면 이미 탄탄한 팬층을 가지고 있는 이정에게 이 작품을 추천한 이유는 뭘까.
이정의 눈이 다시 대본으로 향했다.
‘확실히 평범한 소재는 아니야.’
흡혈귀 사제가 주인공인 드라마라니. 다시 봐도 신기한 조합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사제가 된 흡혈귀 주인공. 신앙심이 없는 것은 물론 그 본질은 흡혈귀인 탓에 십자가를 만지는 손과 몸에는 언제나 상처가 가득하다.
그나마 멀쩡하게 사제인 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의사이자 연구원인 그의 친구 덕분이었다.
‘류지원은 여기서도 유일한 친구네.’
그 의사이자 연구원 역할이 바로 지원이 최종조율 중인 역할이었다.
그렇게 허울뿐인 사제 역할에 충실하며 몸을 숨기고 있던 도중 누군가가 피투성이의 몸으로 성당에 기어들어 와 도움을 청한다.
역시 몸을 숨기는 처지라 엮이고 싶지 않았던 그는 무시하려고 하지만, 도움을 청하는 소녀가 익숙한 얼굴임을 깨닫고 그녀를 숨겨주는 데 일조한다.
이후, 그 소녀를 찾는 비밀단체와 소녀를 지키려고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로, 흡혈귀라는 설정에 맞게 특수분장과 액션은 거의 필수라고 봐야 했다.
‘더 중요한 건….’
판타지 드라마 특유의 오글거림을 아무렇지 않게 소화해낼 담력과 연기력으로, 어떻게 보면 그가 이제껏 연기해왔던 모든 연기보다도 가장 어려운 연기가 될지도 몰랐다.
‘거의 급이지.’
그땐 10여 분짜리 뮤직비디오였던 것과 달리 이번엔 16부작짜리 드라마라는 점이 달랐지만.
“너는 왜 추천해 주신 거 같냐니까?”
지원의 질문에 대답하다 말고 딴생각에 빠졌던 이정이 그녀의 재촉에 대답했다.
“…연기력 테스트?”
“뭔 개소리야?”
황용제 감독과 김윤미 감독이 작정하고 만드는 . 매 영화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은 조금 특별했다.
‘천재 부부가 작정하고 만든 영화.’
10년 넘게 걸린 기획, 그리고 그들의 단골 배우인 문세록 배우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영화. 서 교수가 이정을 추천했다 하더라도 단박에 캐스팅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런 게 있어.”
그렇다면 그들은 이정의 어떤 점을 보고 캐스팅을 확신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의 전작들? 서 교수의 호언장담? 오디션?
그래서 이정은 어쩌면 이번 드라마가 을 위한 오디션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 됐고. 연습이나 한번 해보자. 나 다음 주 최종 미팅이거든.”
“할 거야?”
“후… 할 생각이었는데 네가 주인공이란 소리에 갑자기 하기 싫어졌어.”
“난 할 건데.”
“근데 내가 먼저 제의받았는데 너 때문에 내가 안 하면 억울하잖아?”
결국 한다는 소리였다. 이정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대본을 앞으로 되돌렸다.
“가볍게 하자. 1에 8부터”
“엉.”
똑같이 대본의 앞쪽을 펼친 지원이 연기를 시작했다.
“자. 이번 주 약. 알지? 하루 세 번 꼬박꼬박 먹어야 하는 거. 시간보다 좀 일찍 먹어도 되니까 까먹지 말고 꼭 챙겨 먹어. 저번처럼 얼굴 뒤집어져서 오지 말고.”
“…고마워.”
그가 환상도 불러일으키지 않은 채 연기를 시작했다. 조금 낯간지러운 설정이었기에 스스로가 어디까지 몰입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반응은 어때?”
“비슷해.”
“아직 내성이 생기진 않았나 본데… 비상용 약은 항상 가지고 다니고 있지?”
“응.”
“매번 궁금하단 말이야. 그나마 네가 데이 워커(*햇빛을 견딜 수 있는 흡혈귀)라 괜찮은 건지, 아니면 그냥 일반 흡혈귀도 내 약이 효과가 있는지. 진짜 아는 흡혈귀 또 없어?”
다행히 주인공의 말수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기에 초반 연기는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대사가 많은 지원이 몰입이 힘든지 살짝 얼굴을 찌푸린 채였다.
“없어. 말했잖아. 내가 아는 흡혈귀는….”
“다 죽었거나 적뿐이라고. 아주 귀에 딱지 앉겠다. 누가 흡혈…. 어우, 야. 말하려니까 오글거린다. 흡혈귀래 흡혈귀! 으악.”
지원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소름 돋은 팔을 문지르며 흡혈귀라는 말을 반복했다.
“흡혈귀, 흡혈귀, 흡혈귀, 흡혈귀…. 아 입에 안 붙어 진짜.”
영 집중하지 못할 것 같은 지원의 분위기에 이정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
“안 가.”
부엌 의자를 끌고 와 소파 반대편에 앉은 그가 환상을 발동시켰다.
트라우마를 극복한 이후로는 줄곧 혼자 연습할 때만 써먹었기에 이렇게 다른 사람을 서포트하기 위해 능력을 사용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다시 해보자. ‘없어.’부터.”
“뭐야. 살살하자며?”
“계속 살살해.”
이정이 그렇게 말해도 지원 역시 더 이상 소파에 드러눕지 않고 제대로 앉아서 집중했다.
“없어. 말했잖아. 내가 아는 흡혈귀는….”
“다 죽었거나 적뿐이라고. 아주 귀에 딱지 앉겠다. 누가 흡혈귀 아니랄까 봐. 정색하니까 더 허옇고 무섭다. 표정 좀 풀어.”
이번에는 걸리지 않고 넘어간 지원이 자연스럽게 제스처를 더했다.
“그럼 일단 오늘 치 기록부터 할게. 십자가 알레르기 변동 없음, 햇빛 알레르기 변동 없음, 마늘 알레르기… 참, 그러고 보니까 얼마 전에 김장철이었잖아. 너네 성당에서 김장하지 않았어?”
“아동 봉사부로 빠져서 괜찮아.”
“아아. 애들 놀아주는 봉사부로 빠졌구나? 그래도 마늘 냄새는 엄청났을 텐데. 괜찮았어?”
“재채기만 조금.”
“흠… 작년 거에서 업그레이드한 건데도 재채기까진 못 막아주나 보네. 일단 오케이. 그 부분은 기록해 둘게.”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이정과 달리 지원은 시종일관 흥미로운 듯 가벼운 어투였다.
대사량도 지원이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이정은 중간중간 대답하며 제가 만든 환상을 구경했다.
‘연구실 세트장 퀄리티가 이렇게까지 좋으려면 돈이 꽤 많이 들어갈 텐데….’
환상에 안도한 채 연기하기 급급했던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여유였다.
“기록 끝! 세세한 건 너 가고 나면 하고. 일단 이 정도면 될 거 같아. 이번 주도 수고했어.”
“너도.”
한 파트가 끝나자 이정이 환상을 흩트렸다. 시나리오와 달리 대본은 아직 초반부밖에 없는 탓도 있었지만, 환상에 대한 지원의 평가가 필요했다.
“어때. 제대로 앉아서 하니까 몰입도가 훨씬 나아?”
“어… 아깐 누워있어서 그랬나? 단어도 영, 입에 안 붙고 오글거리기만 하더니 앉으니까 훨씬 낫네.”
다행히 환상이 상대방의 몰입도를 높여주는 것은 여전한 듯했다.
“네 말대로 이 드라마로 나도 팬 좀 많이 생겨서 팬미팅해 보고 싶다. 너 올 초에 팬미팅한 거 어땠어? 좋았지?”
“신기했지. 그렇게 많은 사람이 나 보러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고… 아, 박민혁이 의외로 멀쩡하게 말해서 놀랐다. 말로만 아이돌이 아니었구나 싶더라니까.”
“헐. 빡민이?”
“너도 다음에 박민혁 게스트로 초대해봐.”
언제 집중했냐는 듯이 시시콜콜한 대사를 나누던 두 사람은 그 외 짤막하게 있는 대사들까지 전부 연습해본 뒤 저녁 시간을 한참 넘어서 헤어졌다.
“대본 리딩 때 보자.”
“오키. 내일 최종 미팅 끝나고 연락할게.”
다음 날, 지원에게서 최종조율이 끝났다는 문자가 왔다. 그리고 얼마 후. 대본 리딩 날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