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242
242화 대본리딩(2)
“안 들어가고 뭐 하고 있어요?”
통화를 하느라 뒤늦게 황용제 감독이 문세록 배우와 고명진 배우를 발견하고 물었다.
분명 아까 들어가는 모습을 봤는데 왜 아직도 뒤편에 서 있냐는 뜻이었다.
“지금 도착했어요.”
“저도.”
이정은 그들의 말과 달리 두 사람이 도착한지 꽤 오랜시간이 흘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그와 다른 배우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보고 있어 알은체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대본을 엄청 열심히 봤나 봐요. 딱 김 감독님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네요. 꼼꼼하고, 열정 있고.”
이정이 그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문세록이 먼저 말을 걸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서글서글한 낯의 문세록이 악수를 하며 이정의 팔을 두드렸다.
조카뻘 정도의 나이 차이에, 대본에 있는 모든 배역의 이름을 외울 정도로 열의까지 있어 보이니 기특한 마음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 빈말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김 감독님, 황 감독님이랑 작품 여러 개 했지만 대본에 있는 배역 이름 다 외워오는 배우는 한 번도 못 봤고 나도 그거 외워 볼 생각은 안 했거든요.”
문세록은 암기력도 암기력이지만, 기본적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냐며 웃었다.
“황 감독님, 어때요. 다음번엔 나도 한번 외워 볼까?”
“늙어서 헛짓거리하지 말고 연기나 잘해요.”
어지간히 신기했는지 그가 제 자리에 앉은 황 감독에게 말했다가 김 감독의 싸늘한 말에도 지지 않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서로 존댓말을 하긴 해도 친하다는 방증이었다.
“김 감독님, 저 이제 겨우 마흔 넘었는데 늙었다고 하면 섭섭하죠.”
“자, 대본리딩 시작할까요?”
그리고 그만큼 무시하기도 쉬웠다. 문세록 배우의 말을 완전히 무시한 김윤미 감독이 대본을 갈무리하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서로 제대로 인사부터 할까요?”
김윤미 감독의 말에 문세록과 고명진이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는 세 명의 주연. 앉은 순서는 나이순이었다.
주연 배우뿐만 아니라 어수선하게 앉아있던 조연 배우, 그리고 스태프들까지 김윤미 감독의 말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단순히 대본리딩만 하기엔 너무 크다고 생각했던 대본리딩장은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각본, 감독의 김윤미입니다.”
“의 각본과 감독을 맡은 황용제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 김 감독과 제가 고르고 골라 모신 귀한 분들인 만큼 이 여러분들에게도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윤미 감독이 간단하게 인사의 시작을 열고 이어서 황용제 감독이 좀 더 살을 덧붙여 인사했다.
시선은 이제 문세록 배우에게로 돌아갔다. 모두가 아는 김윤미, 황용제 감독 사단의 사람인 데다 주연 배우 중 가장 나이가 많았기에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윤우영 역의 문세록입니다. 김윤미 감독님, 황용제 감독님이랑은 벌써 6번째 작품이네요.”
6번째. 일 년에 한 편씩 꼬박꼬박 찍었다고 해도 6년.
그러나 김윤미, 황용제 감독이 매년 작품을 낸 것도 아니고, 문세록 배우 역시 매번 두 감독과 함께한 것이 아니니 세 사람의 인연은 어쩌면 이정과 민혁, 그리고 지원만큼이나 오래되었을 수도 있었다.
“운이 좋아서 두 감독님들과 함께하는 배우라는 소리 듣지 않게끔 이번에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겸손이었다.
지금 이정과 비슷한 나이대에 데뷔해 20년 넘게 대배우의 자리에 앉아있는 배우라 그 누구도 그가 운이 좋아 두 감독과 함께한다고 폄하하지 않았다.
이정은 문세록의 그런 점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회귀한 세월보다도 더 길게 배우로 살아가야 할 테니까.’
19년의 회귀, 그리고 이제 곧 6년 차를 바라보고 있는 데뷔 5년 차.
여태 정신없이 달려온 만큼 또 금세 10년 차가 될 테고, 그렇게 강산이 변할 시간이 한 번만 더 흐르면 회귀한 시간보다도 회귀 후 살아온 시간이 더 길어질 터였다.
“강진호 역의 고명진입니다. 제가 비록 대본에서는 천하의 이기적인 놈으로 나오지만 그렇게 못돼 먹은 놈 아니니 너무 겁먹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정이 딴생각을 하는 사이 의 악역이라 할 수 있는 고명진이 인사를 마쳤다.
“민호빈 역의 이이정입니다.”
이정의 차례, 그가 먼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양한 연령대가 존재하는 재난영화 특성상 이 자리에는이정보다 어린 배우도, 문세록처럼 조카삼촌뻘인 배우도, 그보다 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배우들도 있었다.
“제가 경력이 오래된 건 아니지만 이렇게 많은 분들 앞에서 인사하는 건 처음이라 조금 떨리네요.”
빈말이 아니었다.
은 이제껏 이정이 촬영했던 어떤 작품보다도 스케일이 컸고, 그만큼 많은 스태프와 배우가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기백 개의 눈동자는 힘든 촬영을 함께할 동료이기도, 자신의 연기를 품평할 관객이기도 했다.
“열심히, 잘하겠습니다.”
열심히만 하는 것도, 잘하기만 하는 것도 문제가 생긴다. 열심히 잘.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매번 그가 작품을 할 때마다 마음에 새기는 말이었다.
“박경우 역의 김재오입니다.”
“정혜인 역의 이샛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어서 조연·단역 배우와 스태프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두 감독이 대본리딩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인사하길 바란 탓에 인사만 해도 일반적인 영화 대본리딩의 배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 모든 배우와 스태프의 자기소개는 이제껏 두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편집 없이 메이킹필름에 고스란히 실릴 예정이었다.
배역 하나 하나에게 이름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여기에 함께했다는 증거를 남기길 바라는 두 감독만의 방법이었다.
“지난 몇 년간, 황 감독과 제가 해외에서 외국 배우들과 여러 작품을 찍어왔단 사실은 여기 계신 모두가 알고 계실 겁니다.”
자기소개에만 두 시간이 훌쩍 지나고, 마지막으로 막내 스태프가 인사하고 나자 김윤미 감독이 짧은 브리핑을 시작했다.
“한국인 최초, 부부 최초로 이런저런 상도 받아봤고, 할리우드에서 정식 제의도 받아봤지만, 작품을 찍으면 찍을수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본을 들고 있는 김윤미 감독의 눈은 확신으로 빛났다.
“이거 우리나라에서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리고 회귀 전 그들은 정말로 한국인 최초로 국제 영화상이 아닌 일반 상을 거머쥔다.
‘그 상이 뭐였는지까지는 기억 안 나지만….’
훗날 김윤미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욕심보다는 조금 못 미치는 성적이었다고 들었다.
이번에는 그때의 성적보다 더 좋은 성적을 이끌어내는 것이 이정의 목표였다.
“그래서 만들기로 한 게 이 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우리나라 영화도 충분히 해외에서 승산이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저와 황 감독이 작정하고 만든 영화에 한 손 거들어 주시는 거죠. 그러니까.”
대본을 내려놓은 김윤미 감독과 옆에 앉아있던 황용제 감독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문세록을 시작으로 현장에 박수 소리가 가득 울려 펴졌다.
이정은 왜 회귀 전의 김윤미 감독이 생각보다 아쉬운 성적이라고 인터뷰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진짜 작정하셨네 두 분 다….’
은 한국을 배경으로 한 일종의 재난영화다.
등장인물이 많은 것 역시 극한의 상황에서 펼쳐지는 그룹 간의 다툼 등을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재난영화는 흔하지만, 한국을 배경으로 한 재난영화 중 해외에서 수상한 적 있는 작품은 없었다.
“그리고 오늘 대본리딩 후에 대본이 수정될 수도 있으니 다들 집중해서 연기해 주세요.”
김윤미 감독의 말에 조연·단역의 눈이 빛났다.
나쁘게 말하면 대사가 줄어들 수도 있지만, 반대로 좋게 보면 그만큼 분량이 늘어날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네!”
대답 소리가 우렁찼다.
‘나도 제대로 해야지.’
세 주연 중 한 명인 이정은 저들과 분량 싸움을 벌이진 않겠지만, 그가 대본리딩을 대충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오히려 열과 성을 다할 조연·단역들에게 밀리지 않으려면 이정 역시 제대로 힘을 주어야 했다.
‘저 녀석….’
문세록이 목을 푸는 이정을 가만히 바라봤다.
배역 이름을 전부 외워왔다는 것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난 놈이란 생각은 했지만, 기세등등하거나 기죽거나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보통 저 때쯤 톱스타병 많이 걸릴 땐데….’
이곳에 오기 전 문세록은 이정에 대해 조금 찾아보았다.
같이 작품을 한 적 있는 고명진과 달리 이정은 말만 들었을 뿐 한 번도 본 적 없는 배우이기 때문이었다.
‘아주 소처럼 일만 했던데.’
지금도 봐라. 이정의 대본 모양새도 심상치 않았다. 분명 똑같이 전달되었을 대본이 조각조각 나 있었다.
문세록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 역시 이정의 그런 대본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저 정도면 대본을 하나 더 주지….’
문세록은 몰랐다. 저 대본이 벌써 세 번째 대본이라는 것을.
하나로 뭉쳐있는 민호빈의 감정을 일곱 단계로 나누기 위해 여러 번 분철해 망가진 대본 대신 그나마 가장 나중에 만든, 멀쩡한 대본이란 것 역시.
“자, 1에 1부터 시작해 볼까요?”
자연재해로 아포칼립스가 된 세계.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대본리딩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