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303)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 303화(303/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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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묘백묘론이란 게 있다.
‘까망냥이든 하양냥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 아님?’이라는 실로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
나 장의사, 누구보다 괴이에게 많이 데어 봤으며 세상에서 제일 괴이를 증오하는 역사의 산증인임에도 불구하고 선언하겠다.
‘괴이든 뭐든 세계멸망을 막아서는 데 도움이 되면 그만 아님?’
요컨대 흑괴백괴론.
튜토리얼 요정 264번과 같은 몽마야말로 흑괴백괴의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겠지.
내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까지, 튜토리얼 요정들은 인류몰살의 선봉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바야흐로 튜토리얼 요정들은 모두 이누나키 터널에 입점한 카지노에 정규직 노동자로 채용되었으며, 오늘도 손님들을 위해 불철주야 일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 요정 노동자들 덕분에 한반도의 경제가 돌아가는 것이기도 했다. 카지노칩이랑 원화가 연동되었으니까.
모광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활 괴이로 인해 광신적인 신앙심이 모이지 않았더라면 어찌 몬스터 웨이브의 파상공세를 버틸 수 있었으랴?
고로 괴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며 배척하면 곤란했다.
이런 편협한 선입견에서 탈피하여 진정으로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장착해야만, 비로소 인류에도 광명이 찾아오리라.
그래서 결론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하면…….
“노도하 관리대장. 잘 생각해 봅시다. 과연 수령동지 괴이가 꼭 나쁘기만 할까요? 어차피 저쪽에선 모광서를 신으로 모셨고 아련이를 성녀로 모셨습니다. 그것보다야 노도하 관리대장이 최고존엄으로 등극하는 편이 오히려 이북의 시민들에겐 행복과 안락을 약속하는 길입니다.”
“엎드려뻗쳐…….”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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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노도하의 담당 PT 조교였던 내가 역으로 노도하한테 고강도 운동을 강요당하는, 이른바 조교-역전세계가 대략 3시간쯤 이어졌다.
“냄새나니까 씻고 오십쇼…….”
“네.”
오러의 극의에 다다른 내 몸에선 어떠한 체취도 풍기지 않았고, 이를 논리적으로 해설할 자신이 내겐 있었으나, 현재의 노도하란 인물한테 과연 이성적 사고가 통용될지는 미지수였다.
얌전히 샤워를 후다닥 끝마치고 돌아오자, 노도하 역시 분노를 가라앉혔는지 의자에 착석하고 있었다.
“앉으십시오…….”
“의자가 하나밖에 없는데요?”
“그래서 어쩌라고.”
“네.”
별로 분노가 가라앉은 것 같진 않았다.
나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좌식 포즈, 얼마나 전통적이었으면 아예 이름부터가 정좌(正坐)인 자세를 취하였다.
절대로 노도하한테 또 목 졸려 죽기 싫어서가 아니었고 다만 나 장의사가 심성부터 한없이 올곧은 인간이며, 라운드 숄더도 골반디스크도 없는 상시 체스트 업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오랜만에 폐에다가 공기 좀 주입시켜 줄까 싶어서 새벽 자갈치시장에 나갔습니다. 거기, 원산 출신인데 뱅쇼를 파는 상인이 있는데…….”
“아아. 있죠. 계피맛이 좀 강하다 싶지만 그게 오히려 매력이라서 비싼 값에도 인기가 많잖습니까.”
“그런데 시발 상인이 끌고 다니는 카트에 내 초상화가 떡하니 걸려 있더군요…….”
“…….”
“흐. 뱅쇼 하나만 주십쇼, 라고 했더니 그 상인이 절 보고 어떻게 반응했는지 아십니까?”
성녀 찬스! 성녀 찬스!
[…노도하 관리대장 각하께서 저희 가게를 찾아주셨으니 삼생에 다시 없을 영광입니다. 돈 따윈 필요 없습니다. 각하. 부디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라고 새벽하늘이 떨어지라 고래고래 소리를 쳐서 사람들이 전부 쳐다봤어요.] [그리고 장의사 씨. 이런 일로 성녀 찬스를 사용하시는 것은 되도록 자제해 주세요.]나는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대략 예측이 갑니다. 노도하 관리대장 각하께서 가게를 찾아주셔서 너무 기쁘다느니, 그런 찬사를――.”
“너 씨발 방금 용산댁한테 물었지?”
“예? 아니,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잘못하긴 했어도 말도 안 되는 억까는 자제해 주십시오. 증거 있습니까?”
“그럼 썅. 20초 넘게 묵묵부답으로 있다가 갑자기 주절주절 씨부리는데 성녀랑 얘기하느라 그랬겠지, 어? 아님 뭔데?”
아뿔싸!
제아무리 성녀가 [시간정지]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해도 나한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선 당연히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그 약점을 노렸는가.
노도하, 무서운 아이……!
“내가 자갈치시장에 들리는 유일한 낙이 그 실향민이 파는 뱅쇼 처마시면서 새벽공기를 눈깔에다 구경시켜 주는 거였는데, 저의 다섯 개밖에 안 되는 취미를 댁이 망쳐 주었습니다. 어떡하실 겁니까……?”
“역시 노도하 수령동지 각하. 그 나이에도 네 개의 취미를 보유하고 계시다니. 정신건강에도 신경 쓰시는 모습이 뭇 인민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군요.”
“엎드려뻗쳐.”
“네.”
다시금 역전세계로 떠나 이세계트립물을 30분 동안 찍고 귀환했다.
누가 시리즈의 후속편이 아니랄까 봐 전작의 클리셰를 그대로 답습했더라고.
“하아…….”
노도하가 한숨을 쉬었다.
“장의사 각성자. 이 씨발놈의 괴이가 그냥 이북에만 국한된다면 모를까, 주변으로 전염되기 시작하면 어쩔 작정입니까……?”
근거 없는 걱정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에겐 의외처럼 느껴지겠지만 한반도 남쪽에서도 대통령 초상화를 여기저기 장식해 놓는 게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다.
시공간을 지 엿가락대로 꼬아 놓는 게 괴이의 취미란 점을 고려했을 때, 어쩌면 남쪽과 북쪽을 대통합하는 ‘각하’가 실제로 강림할지도 몰랐다.
그런가……. 역시 노도하는 한반도의 왕이 될 상이었는가. 조지 오웰의 동아시아는 노도하의 손끝 아래 탄생하는가.
설마 이 기나긴 회귀썰의 결말이 통일 엔딩이었을 줄이야. 감히 누가 예상했으랴.
“…….”
“…….”
“저 방금 별다른 생각 안 했습니다. 노도하 관리대장.”
“그리고 전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 댁이 혼자서 변명하는군요. 마치 개헛짓거리 망상질을 하다가 찔린 것처럼…….”
“아까부터 부탁드리는 건데 억까는 멈춰 주십시오. 저는 그저 아까부터 이 빅 브라더, 아니 ‘빅 시스터’ 괴이를 어떻게 토벌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호오.”
노도하가 눈웃음을 지었다.
“좋습니다. 어디 기깔난 공략법을 읊어 보십쇼. 댁이 나이를 똥꾸녕으로 처먹은 게 아니라면 그 잘난 입꾸녕에서 틀림없이 토벌법이 줄줄 흘러나오겠지요…….”
물론이었다.
구체적으로는 평양에서 부산까지 달려오는 내내 그것만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명언을 남겼지만 내 경우엔 그보다 한 단계 진화하여 ‘나는 생각해야 한다, 안 그럼 뒈진다’의 경지에 도달했다.
절실함과 간절함이란 측면에서 그 프랑스인이랑은 격이 다르다 할 수 있겠다.
“일단 SG넷에 올라가 있는 프로파간다 영상부터 다 내립시다. 영상 틀라고 파견해 두었던 각 도시의 대원들한테도 임무 중단을 명령하고요.”
“흐으음…….”
“그럼 급한 불은 꺼질 것입니다.”
내렸다.
한반도 각지에서 들불처럼 번졌던 노도하 추앙 열풍은 일거에 중단되었다. ‘멈춰!’ 한마디에 전국이 숨을 죽인 것이었다.
그런데 여러분, 혹시 아시는가?
숨은 깊게 들이마실수록 내뱉을 때도 광풍으로 몰아닥치는 법이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국도관리대 제1대 대장 노도하입니다.
바로 일주일 뒤.
가만히 전원을 꺼놓았던 스마트폰에서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비단 스마트폰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저녁부터 본 대장은, 고단한 노동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국민 여러분들과 함께 소소한 일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추운 겨울. 여러분의 옆에 충분히 따뜻한 화로나 난로가 자리하고 있기를 바랍니다.
동네에 하나쯤 들여 놓은 텔레비전에서도, 아포칼립스에서 몇 안 되는 문명생활을 지탱시켜 주는 필수품인 라디오에서도, 동시에 똑같은 음성이 송출되었다.
당연히 노도하 본인이 내보낸 방송이 아니었다.
괴이였다.
-만일 화로가 없으시다면, 저 노도하의 목소리가 길옆에서 아주 약간의 온기가 되어 볼까 싶습니다.
-그렇기에 노변담화(爐邊談話). 혹은 노변(路邊)의 담화.
-때마침 저의 이름 역시 노도하(路濤河)이므로 딱 어울리는 작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신의주의 낚시꾼이시라는 박의령 님과 전화를 연결해 보겠습니다.
-안녕하신가요, 관리대장 각하?
-아하하. 네, 안녕하세요.
이런 미친.
나는 당장 하던 일 다 내팽개치고 국도관리대로 뛰어갔다.
퇴근이란 개념을 학습하지 못한 노도하가 본부에서 나를 맞이했다.
“야, 이 개새끼야――.”
“멈춰! 노도하 관리대장. 저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힘을 합쳐서 괴이를 토벌해야 될 때 아니겠습니까!”
“씨이발 이 개새――.”
“소원권 1장! 소원권 1장 드리겠습니다!”
“죽으라고!”
“어차피 우리 둘 다 나중에 다 죽어! 15년만 기다려 주십시오!”
우리 사이에 이미 방정식처럼 통용되는 외교적 언사를 주고받은 뒤, 실질적인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노도하 관리대장. 생각해 보니 섣불리 프로파간다 영상들을 내린 건 하책이었습니다. 원래 조지 오웰의 1984에서도 빅 브라더는 이미 죽은 인물입니다. 그저 아이콘으로 살아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요……?”
“노도하 관리대장의 다큐멘터리 영상이 내려간 순간, ‘한반도를 통치하는 최고존엄 빅 시스터: 노도하’라는 괴이적 존재가 오히려 분리되어, 자기 혼자서 존립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뭐 그런 등신 같은…….”
“원래 괴이들이 저작권이나 초상권 같은 걸 생까기로 유명합니다. 어쨌든 이런 현상엔 단점뿐만 아니라 장점도 있습니다.”
“장점? 뭔 장점이요? 아, 댁 모가지 위에 달린 게 장식품이라는 사실이 학술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장점……?”
“아니요. 괴이가 실체를 드러냈지 않습니까.”
원래 이런 정신세뇌 계열의 괴이들은 실체가 없이 두루뭉술 존재한다는 점이 제일 까다로웠다.
당장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그자’를 생각해 보시라. 분홍색 개체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진화의 환경에서 강점과 약점은 동전의 앞뒤와 같습니다. 빅 시스터는 한반도의 모든 통신매체를 장악했지만, 동시에 통신매체에 속박되었습니다.”
“아하.”
노도하의 새까만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좋습니다. 스마트폰이랑 라디오, 텔레비전을 전부 압수해서 파괴합시다…….”
“잠깐! 스마트폰을 수거하면 SG넷을 못 합니다!”
“어쩌라고요? 오히려 이참에 잘됐습니다. 문명이 처망했는데도 폰 붙잡고 다니는 각성자들이 꼴 보기 싫었거든요…….”
제길, 이래서 인터넷에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현생에만 충실한 일반인이란!
“SG넷이 무너지면 성좌들의 신빙성이 낮아지고 각성자들의 연계가 옅어지며 공략법의 공유도 어려워집니다! 서규는 실직하고 심아련은 타락합니다! 당신이 정신 나간 아련이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그 인간은 항상 나가 있던데요……?”
“당신이 보는 심아련은 그래 봬도 양반입니다. 402회차에 ‘인터넷 검열’ 괴이가 나타난 적 있었습니다. SG넷 접속도 먹통이 되었죠. 그때 심아련은 동방신성국의 전 신도를 선동해서 성녀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지랄 났네, 진짜…….”
“그러니 부디 고정해 주십시오. 관리대장. 저에게 더 좋은 계책이 저에게 있습니다.”
노도하가 나를 삐딱하게 쳐다봤다.
우리의 관계는 문경지우. 이심전심의 레벨을 찍은 지 오래였다.
요컨대 지금 그녀의 눈빛에 ‘요즘 들어서 이 자식의 계책을 받아들였을 때마다 상황이 개선되긴커녕 악화만 된 거 같은데’라는 함의가 담겼음을, 나는 고스란히 직관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다릅니다.”
“흠…….”
“제가 정신세뇌 계열의 괴이들만 집중적으로 연구한 게 무려 천 년이 넘습니다. 비록 고요리라는 제일 강대한 적을 쓰러트리진 못했으나, 웬만한 정신계열 괴이들은 감히 저의 머리털 하나 건드리지 못합니다.”
“지금 존나 건드려서 거의 탈모가 일어날 지경인 거 같은데…….”
“특히나 라디오 등의 매체는 제 전문분야라 할 수 있습니다. 라디오 방송채널 운영법, 무전기 사용법, 텔레비전 보관법, 이 모든 방법을 누가 개발했습니까?”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저입니다. 바로 저, 세기말의 괴이전문가 장의사라 이 말씀입니다.”
“…….”
“저 빅 시스터인지 뭔지 하는 괴이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찍어누르겠습니다. 저를 믿어 주시고 평소와 다름없는 안정감으로 국도관리대를 이끌어 주십시오.”
노도하가 외안경을 뺐다.
하아- 입김을 불어서 닦아 내자 안경알이 반딱반딱 빛났다. 그만큼 반짝반짝해진 노도하의 눈동자가 나를 꼬라보았다.
“이번이 진짜로 마지막입니다. 댁, 나한테 빚진 건 줄 아십시오…….”
“그럼요.”
라니스터는 언제나 빚을 갚는다.
나는 코트를 동여매고 목적지로 발걸음을 향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프로파간다에는 프로파간다.
이 황량한 아포칼립스의 한반도에서 제일 먼저 이미지 과대광고를 성공시킨 원조 맛집은 따로 있었나니.
오랜 회귀의 경험을 통해 이미 교차검증이 끝난, 프로파간다의 전설을 향해 나아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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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지금부터 네가 삼한제일의 아이돌이 되어야 할 이유다. 당서린. 나를 너의 프로듀서로 삼아다오.”
“응. 그렇구나. 장의사, 미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