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01
200화. 무룡대전 (9)
자신을 향해 들어 올려지는 팔을 보고 검을 쥔 군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움직인다.’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 언제든지 달려 나갈 생각에 군터의 전신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매서운 눈으로 수잔을 경계하는 군터.
“…….”
“…….”
검을 쥔 자와 손을 내민 자.
침묵 속에 숨 막히는 대치 시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데 그 시간이 생각보다 점차 더 길어지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긴장으로 인해 흐른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그런데 수잔 리플리는 좀처럼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심지어 무기조차 꺼내 들지 않고 그저 가만히 손을 내밀고 있을 뿐.
‘내가 먼저 달려들길 기다리고 있는 건가?’
군터가 자신이 먼저 달려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고민하고 있던 순간.
‘…응?’
그의 코끝에 낯선 향기가 감돌았다.
‘꽃향기?’
아니, 꽃향기라기보다는 살짝 달콤한 향이었다.
은은하게 기분 좋은 향기가 투구 안을 맴돌자 순간적으로 짧게 숨을 들이쉰 군터.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핑-.
군터는 눈앞이 핑-도는 강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속이 매스껍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으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니 군터의 몸이 휘청거린 건 당연지사.
‘큭!’
쿵-.
그대로 고꾸라질 뻔한 군터는 가까스로 한쪽 무릎을 꿇고 버텨냈다.
살짝 풀린 군터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 이건……?!’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조금 전에 자신이 맡은 향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그와 함께 군터는 어째서 작년까지 모든 기수가 수잔을 상대하기 싫은 사람 1순위로 꼽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독… 이라고?!’
경악한 그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수잔이 있었으니.
저벅-.
그녀가 군터를 향해 가볍게 걸음을 옮기며 나른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좋은 향을 맡으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법이거든. 그게 무슨 향인지 궁금해서, 혹은 그 향기를 조금 길게 만끽하기 위해.”
저벅-.
한 걸음, 한 걸음.
수잔이 군터에게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입술은 점차 자줏빛이 살짝 섞인 검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저벅-.
서서히 가까워지는 수잔 리플리.
그녀는 더 이상 병약한 느낌의 미녀가 아니었다.
창백한 피부와 검붉은 입술.
검게 그늘진 눈 밑과 요사스럽게 빛나는 자줏빛의 눈동자.
그 모든 게 조화를 이루니 그녀의 모습은 흡사 동화 속 마녀를 떠올리게 했다.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본 군터는 입술을 깨물었다.
‘독인… 이었다니.’
특수한 마체술로 독을 체내에 쌓아 두었다가, 이를 전투에 활용하는 사람들.
심지어 마체술을 익힌 이들마저 중독될 정도의 극독을 품고 있어서 두려운 존재이나, 독을 품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 독인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그 희귀하다는 독인이 요람에도 있었던 거다.
저벅-.
마침내 군터의 앞에 도달한 수잔.
‘빠, 빠져나가야……!’
군터가 도망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그의 육신은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겨우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 지경.
수잔은 힘겹게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군터의 얼굴을 향해 양손을 내뻗었다.
턱-.
강철 투구를 살포시 감싸는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어느새 그녀의 손톱은 입술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와 함께 투구 안에 감도는 향이 점점 더 짙어졌다.
수잔은 미소를 머금고 안면 가리개 안쪽의 군터와 눈을 마주했다.
“고맙게도 투구를 쓰고 와 주다니… 덕분에 쉽게 끝낼 수 있었어.”
그녀의 감사 인사에 군터는 투구를 쓴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제길, 독인을 상대로 투구를 쓰고 있었다니!’
기사가 입는 전신 갑주의 안은 독을 풀기에 딱 좋은 밀폐된 공간이었다.
심지어 투구까지 닫아 놓았으니 퍼지는 독을 가두기에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으리라.
만약 수잔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군터는 결코 전신 갑주를 입지 않았을 것이다.
24강에서는 군터가 승리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전신 갑주가 12강에서는 오히려 그를 패배로 몰아넣고 있었다.
‘도… 독을 몰아내야…….’
그럼에도 군터는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물며 마나를 움직였다.
어떻게든 독 기운을 몰아내기 위한 발악이었다.
하지만 그가 체내의 독 기운을 몰아내는 것보다 투구 안에 차오르는 독이 더 많았다.
쉬이이-.
수잔은 요염한 미소를 보냈다.
“그리 독성이 강하지 않으니 며칠 지나면 독기는 사라질 거야. 그러니…….”
투구 안에 맴도는 짙고 달콤한 향이 절정에 달한 순간.
이를 알아차린 수잔이 투구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좋은 꿈을 꾸렴.”
전설 속 몽마(夢魔)를 연상케 하는 수잔의 미소를 보며, 군터가 떠올린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제대로 대가리가 깨졌군.’
그것을 끝으로 군터의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털썩-.
“…….”
경기장에 널브러진 군터를 잠시 내려다보던 수잔은 말없이 발길을 돌렸다.
* * *
“하?”
별다른 저항도 못 해 보고 맥없이 무너진 군터를 보며 유리는 헛웃음을 흘렸다.
‘지난번 경기도 그렇고 이번 경기도 그렇고, 상대가 별 힘도 못 쓰고 픽픽 쓰러지기에 뭔가 했더니만…….’
경기장을 벗어나는 검은 머리 여인의 뒷모습을 보던 유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게 독 때문이었다고?”
곧 그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와… 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냥 이기면 된다지만, 독까지 써도 되는 거였어?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지 않은가.
치고받고 싸우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암투에서나 쓸 법한 독이라니.
그런 어이없다는 중얼거림에 답을 준 건 테레시아였다.
“돼.”
유리의 시선이 테레시아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시선 역시 멀어지는 수잔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된다고?”
“무기에 독을 바른다거나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아. 요람에서도 용인하고 있지. 하지만 아무리 요람이라고 해도 그런 수를 좋게 보지 않기에 모두가 알아서 지양할 뿐이야. 하지만 독인은 달라.”
“뭐가 다른데?”
“독인에게는 독이 무기야. 저들의 마독술은 우리로 따지면 마체술과 무기술이나 다름없어. 애초에 독 저항력이 높은 마체술 사용자에게 통할 정도의 극독을 몸에 품고 다루려면… 저들도 목숨을 걸고 수련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마독술이라…….”
테레시아의 설명에 유리는 쓰러진 군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체술 사용자에게도 통하는 독이라는 건가.’
수잔 리플리가 어떻게 독을 다룬 것인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군터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그를 중독시켰다.
그리고 오늘 당한 군터나 이전 시합에서 당한 46기나.
그들 모두 오랜 시간 마체술을 익혀 왔음에도 수잔의 독에 크게 저항하지도 못하고 당했다.
이는 유리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저 독… 나는 얼마나 버틸 수 있지? 내 독에 대한 저항력은 어느 정도일까?’
아예 독에 당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혹여라도 중독당하면 과연 자신은 과연 버텨 낼 수 있을까?
‘당해 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짧은 고민 끝에 유리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독에 관한 대안이 생기지 않는 이상… 이 무룡대전에서 가장 껄끄러운 상대는 수잔 리플리겠네.’
유리의 얼굴이 살짝 경직됐다.
* * *
군터가 실려 나간 뒤, 12강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두 번째는 괴츠 뢰턴과 5년 차의 시합.
그리고 이번에도 괴츠가 5년 차를 손쉽게 꺾으며 6강을 확정 지었다.
3년 차가 연달아 5년 차를 이긴 상황이었지만, 괴츠의 실력이 제법 잘 알려져서인지 놀라는 이들이 적었다.
그렇게 두 번째 6강 진출자가 정해진 뒤 금세 시작된 12강의 세 번째 경기.
“후우…….”
경기장에 먼저 진입한 테레시아는 긴장을 풀며 자신의 상대를 기다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정면에서 한 청년이 여유 있는 걸음으로 나타났다.
190㎝에 달하는 큰 키와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사방으로 뻗친 긴 적발.
폭이 넓은 커다란 도(刀)를 어깨에 걸친 채 거친 기세를 풍기는 청년.
그가 바로 이번 12강에서 테레시아가 상대할 안드레스 체이슈였다.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법의 명가 체이슈 가문의 혈족이자 4년 차의 서열 2위.
아니, 사실상 무력적인 측면만 본다면 그가 무조건 47기의 서열 1위였다.
안드레스가 슬쩍 시선을 내리깔며 테레시아를 바라보았다.
“테레시아 윈체스터, 작년에는 24강도 통과하지 못했던 녀석이 올해는 12강까지 오르다니, 제법 열심히 한 모양이군.”
“운이 좋았습니다. 24강은 상대가 같은 동기였으니까 말입니다.”
“작년에 네가 49기 중 몇 위로 무룡대전에 참가했었지?”
“5위였습니다.”
“올해는?”
“수석입니다.”
“열심히 한 게 맞잖아?”
“예, 열심히 한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선배님 덕분이기도 하죠.”
“내 덕분?”
“작년 24강에서 선배님이 절 살려 보내 주셨으니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 말하는 테레시아의 눈에 뜨거운 열기가 화르르 피어올랐다.
작년 말, 뒤늦게 실력이 오르기 시작해 간신히 턱걸이로 무룡대전에 참여하게 되었던 테레시아.
그런 그녀는 24강전에서 고작 한 수에 제압당해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그 수모를 준 이가 바로 눈앞의 안드레스 체이슈였다.
척-.
테레시아의 창이 안드레스를 향해 겨눠졌다.
“그 은혜를 갚고자 최선을 다해 선배님을 넘어뜨리겠습니다.”
테레시아의 당찬 목소리에 체이슈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글쎄? 그건 그냥 너의 희망 사항인 거 같군. 그리고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너무 열심히 하면 이번에는…….”
말끝을 흐린 그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이 서서히 사라지고.
“살려 보내줄 수 없을 테니까.”
그 자리에 살기만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쾅!
둘이 격돌했다.
찌르는 창과 베어 내는 도.
강의 기운을 머금은 두 자루의 병장기가 살벌한 속도로 상대를 향해 휘둘러졌으니.
카가강-.
쾅!
그저 잔영만 어렴풋이 보이는 가운데 폭음과 불똥이 튀어 올랐다.
자칫 잘못하면 대형 참사가 벌어질 상황.
테레시아의 창을 쳐 내며 안드레스는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흐하핫! 대단하군… 대단해! 고작 1년 사이에 이 정도로 바뀌었을 줄이야!”
작년에는 고작 평범한 공격조차 받아 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던 테레시아였다.
그런 그녀가 이제는 자신과 대등하게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심지어 그 테레시아가… 윈체스터의 기형아, 돌연변이라 불리던 그 테레시아가 말이다.
이에 안드레스가 흥분이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질질 끄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니… 짧고 굵게, 제대로 부딪혀 보자!”
웅웅-.
안드레스의 대도가 강한 울음을 토해 내며 붉게 달아올랐다.
‘연!’
순식간에 연의 기운을 머금은 대도를 보고 테레시아의 눈빛이 신중해졌다.
‘아마… 저기서 끝이 아닐 거다.’
4년 차 평균은 공인 2단급.
하지만 4년 차 중에서도 최상위권인 안드레스라면 저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라.
그런 테레시아의 예상에 응하기라도 하듯 대도가 붉게 타올랐다.
화르륵-.
‘화의 기운!’
자신이 공인 3단임을 알리듯, 전력을 다해 화검… 아니, 화도를 휘두르는 안드레스.
‘이건 이대로는 못 막는다!’
상대의 힘에 맞서 테레시아도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그녀의 창이 연의 기운을 발현했다.
우웅-.
이를 본 안드레스의 함박웃음을 지었다.
“연의 경지라니! 네가 정녕 그 테레시아 윈체스터가 맞는 거냐? 대체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질문에 테레시아는 답해 주고 싶었다.
지난 1년 동안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정말 최선을 다해서… 이를 악물고 한 소년의 뒤를 좇았다고.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하지만 그 말을 하기에는 테레시아에게 여유가 없었다.
‘이대로는 안 돼.’
최선을 다해 창을 내지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장기인 속도를 내세운 공격은 안드레스의 견고한 방어에 번번이 막혔다,
오히려 순간순간 치고 들어오는 안드레스의 반격에 그녀가 창을 물리길 수십 차례.
테레시아가 살짝 이를 깨물었다.
‘단 일격이라도 제대로 허용하는 순간… 작년 24강과 똑같은 절차를 밟게 될 거다.’
그 정도로 명가 체이슈의 도법은 위협적이었다.
하여 최대한 버티면서 기회를 만들어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길게 끌어도 나한테는 좋지 않아.’
안드레스의 도가 품은 화의 기운이 자신의 창을 계속해서 상하게 만들고 있었다.
연의 기운을 발현해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지만, 이대로 피해가 누적된다면 창이 부러질 터.
그렇다면 최대한 빠르게 이 싸움을 끝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눈앞의 성미 급한 상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좀 더… 네 전력을 끌어올려봐라! 좀 더 발악해 보란 말이다!”
화르르르르륵-!
대도가 머금은 화의 기운이 폭발하듯 크게 일렁였고.
체이슈 가문 특유의 붉은 기운이 안드레스의 몸을 휘감으니.
체이슈가(家) 비전 마체술.
적사맹공(赤獅猛攻).
붉은 사자 한 마리가 테레시아를 향해 사나운 발톱을 휘둘렀다.
그리고 이에 맞서 입술을 질끈 깨문 테레시아.
스륵-.
그녀의 창이 기존의 것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