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62
61화. 백보 의식 (3)
모든 이들이 검례를 취하는 순간.
50기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특별석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았기에 몸이 반응한 것이다.
그 덕분에 50기들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특별 관객석으로 들어서고 있는 한 존재를.
구불구불 새하얀 중단발, 말끔하게 뒤로 넘긴 앞머리.
약간은 각진 얼굴과 구레나룻부터 이어진 하얀 수염.
분명 노인의 얼굴이나 젊은이처럼 강건해 보이는 180㎝의 육체.
그리고 짙고 깊은 검은 눈동자.
꽤 거리가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그의 형상은 또렷이 시야에 담겼다.
그의 등장에 유리는 물론 50기 전체가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아니,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는 표현이 옳았다.
마치 영혼이 붙잡힌 것처럼.
시선을 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그들은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저벅저벅-.
그의 걸음이 이어질 때마다, 소리가 사라졌다.
말소리.
숨소리.
아주 미세한 움직임의 소리조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숨 막히는 적막 속에.
수만 쌍의 눈동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침내 노인이 자리에 앉았다.
그는 권좌에 앉아 수만의 흑검병이 보내오는 검례를 권태로이 받아들였다.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스윽- 툭.
가볍게 턱을 괸 채 경기장을 내려다보는 사내.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알려 주지 않았으나 그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깨닫지 못한 이는 없었다.
그들의 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홀린 듯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검주… 루크 라이더.”
매우 작은 목소리였으나,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우기에는 충분했다.
무언가 꿈을 꾼 듯 몽롱한 얼굴의 사람들.
여전히 숨 막히는 적막은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여유가 되살아났다.
그때 또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분이 검주? 생각보다… 평범하신데?”
경쟁의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검주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난다.
절대자.
이 세상의 주인이라 불리는 사내.
단신으로 세상을 베어 낸 불세출의 검사.
이에 아이들은 검주의 모습을 무섭고 과장되게 상상하고는 했다.
전설 속 마왕처럼 거칠고 무서운 외모이거나.
혹은 남들보다 팔이 두어 개 더 있거나.
그도 아니면 3m에 달하는 거인이거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품고 자라난 아이들은 커서도 검주가 특별할 거란 선입견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십수 년이나 품고 있던 선입견과 다소 거리가 먼 검주의 평범한 모습에 약간은 실망하기도 했다.
반면, 몇몇은 그런 중얼거림에 어이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남들이 어느 정도 여유를 찾아갈 때도, 여전히 검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이들.
아린과 뽀삐, 넬리 블랑, 클라리스 반… 그리고 군터 아이언스를 포함한 몇몇 명문가의 자제들.
그들은 숨죽이고 검주를 응시했다.
그 같은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는 만큼 보이니까.
검주가 평범하다고 느끼는 이들은 전혀 보이는 게 없는 자들뿐이었다.
지닌 바 실력에 비례해, 무언가를 느낀 이들은 하나같이 검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
일찍이 영혈이 뚫려 화신을 다루던 그는 남들보다 더욱 상태가 심각했다.
유리는 검주가 등장한 순간부터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있었다.
부릅뜬 두 눈에 경악이 서렸다.
‘평범? 평범하다고……? 저게?’
도대체 어딜 봐서?
그딴 개소리를 지껄인 새끼는 정말 나와 같은 걸 보고 있는 거냐?
휘오오오-.
보라, 검주의 주변을 가득 채우다 못해 하늘까지 뻗어 올라간 저 붉은 기운을!
그건 검주가 권좌에 앉는 순간 솟구쳐 올라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은 압도적인 기운.
자칫 잘못 긴장의 끈을 놓았다간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듯 포악한 성질의 기세였다.
이에 지지 않기 위해 유리는 주먹을 아득 말아 쥐었다.
한편 그는 허탈하고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저게 괴물이라고?’
요한은 검주를 괴물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직접 검주를 마주한 유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건… 괴물 따위가 아냐.’
아주 오래전, 세상을 떠돌던 유리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용오름(Tornado)을 본 적이 있었다.
지상과 하늘을 잇는, 놀랍도록 거대한 바람기둥.
인간은 한낱 벌레 따위로 여겨질 만큼 크고 강력한 자연재해.
검주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검주는… 저건, 고작 괴물이라 불릴 게 아니었다.
저건…….
“재앙.”
대적할 수 없는 자연재해이자 재앙이었다.
말로만 듣던 검주의 실체를 드디어 본 유리는 혀를 내둘렀다.
‘영감탱이… 당신은 저런 것과 싸웠고, 앞으로 또 싸우려 했던 거야?’
두 번을 도전했고.
두 번을 패했음에도.
세 번째를 준비하는 요한.
그제야 유리는 왜 세상이 요한을 부절검이라는 칭호로 높여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도 저런 말도 안 되는 것과 싸워 살아남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존중받기 충분했으니까.
나아가 굴하지 않고 또다시 도전을 준비하는 요한은 그야말로 ‘꺾이지 않는 검’이라 칭송받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게 혀를 내두르던 유리는 일전에 자신이 요한에게 한 말을 떠올리고 웃었다.
패기롭게 검주를 꺾겠다고 말하는 자신을 보고 요한은 얼마나 우스웠을까?
내심 얼마나 비웃었을까?
지금의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우습기 짝이 없는데.
‘저걸 이길 수 있기는 한 걸까?’
아니, 그걸 떠나 싸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만약에 살아남는다 해도 요한처럼 부러지지 않고 다시 도전할 수 있을까?
유리의 가슴속에 그런 의문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런 의문을 해소할 기회는 금방 찾아들었다.
쿵-.
다시금 들려온 발구름 소리.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듀란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지금부터, 백보 의식을 거행한다!”
쿵-.
듀란이 발구름 소리가 신호가 되어.
“……?!”
하늘까지 치솟았던 검주의 붉은 기세가 경기장으로 내리꽂혔다.
* * *
원형 경기장 관객석을 차지한 검은 옷의 인파.
그들 대다수가 흑검병인 것은 맞으나, 그중에는 요람의 기수들도 섞여 있었다.
얼마 전 복귀한 49기를 비롯하여.
수료 과정을 이행 중이라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5년 차 46기.
그리고 5년 차를 대신해 요람의 실세가 된 47기와 48기.
요람에 존재하는 모든 기수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인 것이다.
기수별로 구역을 나누어 앉아 있는 이들.
그들의 눈에는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올해에는 어떤 놈들이 들어왔을까?
실력 있는 놈이 있을까?
등등.
다양한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가운데 마침내 50기 기수들이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이를 보고 약간의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올해 50기는 꽤 많네? 우리 때보다 두 배는 되겠는걸?”
“그래 봤자, 대부분 쭉정이다.”
몇몇 기수들이 경기장으로 들어선 50기를 보고 그리 말했다.
그 뒤로도 작은 웅성거림이 있었지만, 듀란의 발구름 소리와 함께 사그라들었다.
이후 행해진 유서 작성.
그리고 이어진 검례와 검주의 등장.
‘오셨다.’
‘역시 올해도 오셨군!’
검주의 등장에 많은 이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용의 요람은 검주의 영역이나 요람에 속한 이들이 검주를 볼 기회는 의외로 많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검주는 은거하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년 중 단 한 번.
지난 41년간 거르지 않고 검주가 매년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새로운 기수가 들어와 백보 의식을 치르는 날이었다.
‘이건… 매년 겪는 일인데도 영 적응이 안 되네.’
지금 관객석을 차지한 46기부터 49기까지.
그 모두가 백보 의식을 겪은 당사자들이었다.
때문에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쿠웅-.
다리가 땅을 내리찍는 소리가 들리고.
“지금부터, 백보 의식을 거행한다.”
듀란의 목소리에 기수들의 눈이 빛났다.
‘시작됐다.’
‘시작이다!’
경험자들은 재빨리 마나를 운용해 육체와 정신을 보호했다.
곧이어 강렬한 기세가 경기장을 휩쓸고.
털썩-.
사람들이 썩은 볏단처럼 힘없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풀썩- 쿵- 털썩-.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자 기수들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몇이냐!’
‘몇 명이나 남았지?’
그리고 마침내.
털썩-.
또 한 사람이 쓰러진 이후, 더는 쓰러지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누군가 남아 있는 이들을 세어 보았다.
“52명이라… 나쁘진 않네.”
시작과 동시에 가장 많은 이들이 생존했던 기수와 머릿수는 37기의 65명.
하여 52명 정도면 꽤 준수하다 할만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진짜 중요한 건 이제부터였다.
* * *
프하!
유리는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
큰 심호흡에 요동치던 심장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조금 전 그건……?’
경기장으로 내리꽂힌 붉은 기세에 유리는 온 세상이 쪼개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정도로 검주가 내뿜은 붉은 기세는 끔찍했다.
심지어 그 기세는 사라지지 않고 잔존하여 유리의 육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후우…….”
길게 심호흡하며 압박감에 대항하는 유리의 눈매가 살짝 찡그려졌다.
‘지금 이 거리에서 이 정도 압박감이라면?’
유리의 시선이 검주가 있는 특별석을 향했다.
그 주변은 검주가 뿜어내는 기세로 인해 마치 공간이 일그러진 듯 일렁이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저걸 직격으로 맞았으니 멀쩡한 놈이 몇 없겠네.’
그런 유리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조금 전까지 멀쩡히 서 있던 300명 중 태반이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
아니, 그냥 단순히 기절하여 널브러진 거면 다행이었다.
케흑-.
게거품을 물고 팔다리를 바들거리는 이.
크르륵-.
자신이 쏟은 토사물에 얼굴을 처박은 이.
그리고.
‘쟨 좀… 심각하네.’
똥오줌을 지리고 널브러진 이.
그렇게 50기는 기절한 사람과 기절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었다.
또한, 기절하지 않은 사람은 다시 서 있는 이들과 바닥을 기는 이들로 나뉘었다.
바닥을 기는 이들은 곧 기절한 사람들에 합류할 듯 보였고.
그나마 서 있는 이들도 상태가 괜찮은 사람은 유리를 포함해 몇 되지 않았다.
그렇게 유리가 주변을 둘러볼 때 다시 듀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백보 의식에서 너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이미 태반이 기절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음에도 듀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마치 그런 놈들 따윈 애초부터 신경 쓰지 않았다는 듯.
그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걸어라. 위대한 검의 주인을 향해. 이는 검주께서 너희에게 주는 시험이리라.”
그 말에 그제야 유리는 모든 게 이해됐다.
특별 관객석을 중심으로 그려진 100개의 동심원과.
그리고 왜 이 의식에 백보(百步)라는 명칭이 붙었는지.
“하?”
으득-.
어깨를 짓누르는 기세의 압박 속에 고개를 든 유리.
저 멀리, 백 보의 끝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 권태로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검주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