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278
278화
파티는 도란도란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맵을 순회했다.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사냥이 슬슬 힘들고 지루할 법한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다에 다들 힘든 줄도 몰랐다. 누구보다 의욕 가득한 헤른은 귀여운 허세를 부렸다.
“전 두 시간, 세 시간씩 이어서 사냥해도 끄떡없어요! 그냥 막 굴려 주세요!”
“그럼 우린 좀 쉴 테니까 헤른 혼자 돌아다니고 있을래?”
행복의 단호한 대꾸에 헤른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에 다들 웃으며 다음 루트로 이동하던 때였다.
[베누스 님이 살기의 질풍 을 사용하셨습니다.]뒤에서 날아온 일격에 리디안이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면서도 재깍 여신의 손길을 외웠고, 놀란 마음에 두어 번을 더 복창했다.
“뭐야, 저 새X들!”
헤른이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렀다. 무심결에 뒤돌아본 곳엔 베누스, 백사부, 쿠앤크, 신의아들. 그리고 처음 보는 힐러와 다크 템플러가 있었다.
급히 리디안의 일행을 따라잡은 그들은 비열한 웃음을 머금은 채 멈춰 섰다.
“아놔. ANG 새X들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쓰레기온 나오네.”
“그래도 대어임. 제대로 낚임. 대어다, 대어.”
“여기 베누스 있다! 베누스 잡아라!”
“레기온 크라이그 님! 저 X나 때리고 싶지 않으셈? 아니면 나 말고 다른 애 잡아도 됨.”
“아, 저 힐러 아이템이 진짜 개쩔던데. 힐러는 작업을 못 해서 아쉽다.”
킬킬 웃는 말투에서 리디안은 단박에 베누스의 의도를 파악했다.
저들은 분명 크라이그가 먼저 때려 정당방위가 걸리길 바라는 거다. 그럼 누군가는 고의로 죽을 테고 검닉이 된 크라이그를 집중적으로 공격할 게 뻔했다.
“내가 바로 길마한테 연락했어. 아마 윤재 작업하려고 저러는 거 같은데. 윤재가 먼저 공격하면 모를까. 쟤네가 먼저 공격해서 정당방위 성립시키진 않을 거야.”
행복도 눈치채곤, 이제 막 달려 나가려는 크라이그를 붙잡았다.
하지만 마녀의 무덤 맵이 꽤 넓은 데다, 일행이 있는 곳은 하필 깊숙한 안쪽이었다. 제보를 받은 지원군이 달려오려면 약간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근데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저 힐러랑 다템.”
“아. 저 사람들. 던전데이트 출신이에요.”
양말의 의아함에 우래귀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 쳤다.
70레벨인 세인트 박캐리, 71레벨인 다크 템플러 여래. 베누스와 비슷한 나이대에 베누스처럼 악동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제로 두 사람은 베누스의 권유에 신세계로 새로 들어온 뉴페이스였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그 말이 딱이네요.”
행복의 만류에 간신히 멈춰선 크라이그가 한심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형님. 그래도 여기 꽤 안쪽이라. 우리만 잘 버티면요, 잘하면 입구 막고 쟤들 몰이 사냥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헤른이 소곤거렸다. 크라이그도 그 말엔 동의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저들이 가만히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물론, 바드도 있고 믿음직스러운 리디안이 있으니. 크라이그가 먼저 선제공격을 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솔직히 저 정도는 혼자서 잡을 수 있긴 한데…….”
크라이그는 난감한 눈으로 헤른을 쳐다봤다. 베누스와 그 패거리들이 마음먹고 공격하면 헤른은 버티지 못한다.
리디안의 힐이 있어도 기본 체력이나 방어력이 약해 재수 없으면 원킬이었다. 그렇다고 우래귀를 내세우기엔 우래귀의 방어력보다 저들의 공격력이 더 앞섰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 우리가 걸리네요. 재수도 없지.”
“전 쟤네 이제 필드로 안 나올 줄 알았어요.”
양말과 우래귀가 껄끄럽게 중얼거렸다. 혼자 고민하던 크라이그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누나랑 헤른. 양말 님은 뒤에서 대기. 우래귀 님이랑 리디안 님은 제 옆으로. 리디안 님. 버틸 수 있겠어요?”
“네, 네! 버텨 볼게요!”
“잠깐만요. 형님! 그냥 제가 방어구 다 빼고 깔짝거리다가 맞고 죽는 건 어떠십니까? 그럼 쟤네 중 한 명은 백 프로 검닉 되는 건데. 쫄아서 바로 튀지 않겠어요?”
리디안의 부재축을 의식한 헤른이 그리 말했다. 전략적으로 보자면 괜찮은 의견이긴 했다. 실제로 베누스야 그런 도발에 잘 걸리니 성공 확률도 높다.
하지만 리디안은 헤른의 의견에 찬성할 수 없었다.
“아니야, 헤른. 그러지는 마. 그냥 내가 버틸게.”
“네? 왜요? 쟤들 엿 먹이려면 이게 제일 쉬운 방법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헤른은 죽음에 대한 불안을 알 수 없었다. 리디안은 깜빡이는 헤른의 눈을 보며 멈칫했다.
이걸 대체 뭐라 설명을 해야 하는 걸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이야기를 들은 후, 헤른이 충격을 받는 건 아닐까?
온갖 걱정이 뭉게뭉게 증식됐다. 리디안은 막막함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행복은 리디안의 고민을 눈치채곤 헤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헤른. 지금은 리디 말대로 하자. 얘긴 나중에 해줄 테니까. 일단 나랑 뒤에 있자.”
‘아이쿠’였다면 곧장 반박하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했겠지만, 헤른은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헤른은 복잡미묘해진 리디안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물러났다.
“뭐야, 갑자기 심각하게 뭘 그리 속닥거림? X나 사람 민망하게. 이 비장한 분위기 뭔데?”
멋모르는 베누스가 또다시 얄밉게 도발했다.
“아, 거! 후딱 끝냅시다! X신 랭커들 또 겁나 우르르 쫓아오겠네.”
“솔직히 우린 님 작업해서 먹고 튀는 게 더 이득임. 곧 애들 지원 올 거라고 좋아하지 마셈.”
백사부와 쿠렉도 낄낄거리며 거들었다. 그 확고한 목적에 크라이그가 길게 한숨 쉬었다. 그렇다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그만인 일이다. 그럼 저것들도 지쳐서 돌아갈 테니까.
“아, 뭔데. 무시함? 님아, 반응 좀.”
“혹시 쫄았음?”
“안 낚이는 거 같은데. 그냥 잔챙이 잡고 튀는 건 어떰?”
“병X아, 검닉 어쩔.”
다들 합세해 켈켈 비웃는데도 크라이그는 꿈쩍도 안했다. 시간을 끌수록 자신들이 불리해지기에 베누스는 더 초조해졌다.
베누스 역시 진작 헤른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크라이그를 도발해 먼저 공격하게 만들어야 했다.
“시X. 전엔 건드리면 죽자 살자 따라오던 놈이 왜 갑자기 보살 행세임? 옆에 여자들 있다고 매너 모드임? 아, 재미없게 굴지 말고 나랑 좀 놀아 줘라.”
이젠 대놓고 거는 시비에 크라이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웬만하면 대꾸하지 않으려 했는데. 입 다물고 있기엔 심기가 무척 불편했다.
길게 한숨 쉰 크라이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비매너 모드 원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데.”
크라이그가 쥔 검은빛 레바테인의 끝이 슬며시 베누스를 향했다. 진지한 표정과 말투에 베누스 패거리가 동시에 움찔했다. 크라이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고, 솔직한 평가로도 일대 다수에 거리낌 없는 실력자였다.
“길마님. 저 새X, 검닉 신경 안 쓰고 칼춤 추는 새X데. 이러다 우리 다 죽으면 어떡해요?”
제법 들은 거 많은 세인트 박캐리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베누스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불쾌한 눈으로 박캐리를 노려봤다.
“야. 쿠크. 네가 가서 어그로 끌어봐. 솔직히 저놈만 붙잡으면 나머지는 다굴로 순삭 아니냐?”
아쳐 백사부가 팔라딘 쿠앤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 말에 하나둘 시선이 쏠렸지만, 쿠앤크는 크라이그의 싸늘한 눈빛을 보며 뒷걸음질쳤다.
“장난하냐. 저 새X 신스킬로 탱커도 썰어버린다던데? 괜히 붙었다가 한방에 나가떨어지면 어쩔?”
“헐. 진짜요? 대박이네. 탱커를 스킬 한 번으로 아웃시킨다고요? 개사기잖아.”
사실 그건 리디안의 영역 버프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지만, 소문은 원래 과장되기 마련이었다. 잘 모르는 박캐리가 호들갑을 떨며 반응하니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어느새 그들은 슬그머니 베누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머뭇거리는 분위기에 답답해진 쿠렉이 씩씩대며 나섰다.
“아, 뭔데. 왜 다들 쫄아 있음? 난 은신 있어서 검닉 되도 상관없음. 그리고 죽기 전에 우리가 먼저 아무나 한 명 죽이면 그만이지. 형, 쫄리면 그냥 먼저 도망가셈. 난 누구라도 조져야 속이 풀릴 것 같으니까.”
혀를 찬 쿠렉이 곧장 은신해 움직였다. 크라이그 말고는 그 움직임을 아무도 못 보는 상태라, 리디안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찡그린 크라이그가 쿠렉의 움직임을 쫓자, 지켜보던 백사부가 얄밉게 내뱉었다.
“어어~ 저기요. 님, 움직이는 순간 내가 아무나 한 명 쏴 죽임. 나도 사실 검닉 상관없음. 개판으로 한번 가보자고.”
그러고선 백사부는 리디안이 있는 쪽으로 활을 겨눴다. 금방이라도 쏠 것 같은 기세에 리디안도 스카디를 꼭 쥔 채 대기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크라이그가 정색하며 행복을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누나. 일곱 시 방향요. 거리는 대략 15.”
“아이스 스톰.”
텅 빈 지면 위로 얼음 폭풍이 휘몰아쳤다. 범위 중앙에 있던 쿠렉은 냉기 공격에 직격탄을 맞고 은신이 풀리고 말았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제 몸에 쿠렉의 입이 쩍 벌어졌다.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쿠렉은 어이없는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아무리 크라이그가 방향을 알려 줬어도, 그 짧은 찰나에 정확하게 거리감까지 맞춘 건 놀라울 일이었다.
하지만 쿠렉은 그 센스를 인정할 수 없었다.
“미친! 듣보잡 매지션 주제에 내 은신을 풀어? 시X, 일단 너부터 죽인다.”
다시금 사라지는 쿠렉의 모습에 리디안의 입이 쩍 벌어졌다. 마제스티가 이 일을 알면 분명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마제스티가 굳이 나설 것도 없어 보였다.
“열두 시. 10.”
“라이트닝 스톰.”
암호 같은 말에 행복이 척척 움직였다. 행복이 손을 뻗은 방향으로 번개 줄기가 퍼져 나갔다. 허공을 떠돌던 번개 줄기들은 한데 뒤엉켜 각기 거대한 회오리를 만들어 냈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전격 폭풍에 곧장 타격 반응이 왔다.
“악! 시X!”
또다시 은신이 풀려버린 쿠렉은 그 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발광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을 반복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쿠렉은 행복의 근처로 단 한 발자국도 다가올 수 없었다.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반복되자 실실 쪼개던 베누스 패거리의 안색도 굳어졌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백사부가 욕지거리를 뱉으며 서둘러 활을 들었다.
“그냥 아무나 빨리 죽여! 아, 힐러부터!”
조준이 향한 곳은 리디안이었다. 그에 크라이그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베누스를 향해 살짝 반응했어도, 사실 헤른을 생각해 가능한 피해 없이 버틸 생각이었다. 베누스가 그 어떤 욕으로 자신을 도발해도 말이다.
하지만 저들이 먼저 작정하고 아군을 죽이려 든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그냥 제가 먼저 처리해야겠어요.”
한 발짝 나서는 크라이그의 모습에 행복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래도 우리가 참자고, 행복이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크라이그가 고개 돌려 물었다.
“누나, 계속 쿠렉 견제할 수 있겠어요?”
“응? 아, 응. 어느 정도 감 잡았어. 이제 네가 설명 안 해줘도 될 것 같아.”
“그럼, 계속 견제 부탁드려요. 리디안 님. 준비요. 일단 원거리부터 처리할게요.”
행복과 리디안이 대답할 틈도 없이, 크라이그가 번개처럼 뛰쳐나갔다.
순식간에 백사부와 거리를 좁힌 크라이그는 망설임 없이 무기를 겨눴다.
“일섬신월, 참격난무.”
큰 스킬 두 개가 거의 동시에 박혔다. 덤으로 더블 샷까지 들어가 있어 상당한 타격이었다. 눈에 띄게 줄어드는 백사부의 HP에도 크라이그는 계속해서, 더 빠르게 그를 몰아붙였다.
“섬멸 검기.”
마지막으로 들어간 공격 스킬에 제대로 된 크리티컬이 붙었다. 급조된 힐러 박캐리의 힐로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백사부의 HP는 순식간에 0으로 변했다.
고작 한 걸음을 뒷걸음질 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항할 틈도 없이 일방적으로 난도질당한 백사부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