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Michelangelo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65
65
* * * *
미켈란젤로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목표를 높게 잡아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고, 목표를 너무 낮게 잡아서 성공하는 것이다.”
* * * *
연노랑 뙤약볕이 들어오는 이른 오후.
블룸 미술관 백 오피스, 관장실 앞 휴식 공간으로 들어서려던 7년 차 큐레이터 진유미가 당황한 얼굴로 멈춰 섰다. 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시선의 끝엔 강석이 닿아 있었다.
그녀가 당황한 이유는 하나였다.
표정.
요 몇 달간 진유미가 보아왔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강석의 표정 때문이었다.
눈썹 미간에 새겨진 내 천(川) 자, 꾹 다문 입술, 꿈틀거리는 입꼬리, 분노로 떨리고 있는 적갈색 눈동자까지.
대부분이 평소 강석에게선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누군가는 그냥 지레짐작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순간 진유미는 확신했다.
원래 눈치 빠른 사람은 공기마저 느낀다는 말이 있잖은가? 흐읍. 풍겨오는 커피 향과 섞인 공기를 코로 흡입한 진유미가 시선을 내렸다. 손목에 채워진 작은 시계가 눈길을 끌었다.
2시 10분.
강석과의 약속 시각으로부터 벌써 10분이나 오버가 난 상황이었다.
‘······화나고도 남지!’
강석 같이 미래가 기대되는 천재 작가를 앞에 두고 할 수는 없는 짓이었다. 아, 하필 산강문화재단에서 사람이 와가지고는···진유미가 한숨을 삼키었다.
그 옛날.
양선구 밑에서 수학하다, 산강장학재단 쪽으로 넘어가 산강문화재단을 거쳐서 블룸미술관을 받게 된 관장 진도욱은 산강그룹에 관련한 사람들한테 약해도 너무 약했다.
‘지금 내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그나저나 진짜 어떻게 하지···?’
진유미가 울상을 지었다. 왜 하필 내가 오늘 백 오피스 안내담당자인 거야. 억울함을 속으로나마 토로해봤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그래. 가자. 가자. 가는 거야···!’
달칵.
문고리를 잡아 돌려 일부러 소리를 크게 한 번 터트린 진유미가 자연스럽게 고개부터 안쪽으로 들이밀었다.
“그···작가님.”
꿀꺽, 내용을 전달하려던 진유미가 긴장감에 문고리를 꽉 붙잡았다. 입은 한여름인데도 겨울이라도 된 모양인지 차가웠다.
“그···시간이 더 걸릴 것 같은데 어떻게 하죠···정말 죄송해요. 혹시 간식 좀 더 필요한 거라도···”
있으시면 가져다 드릴게요. 라는, 말은 끝까지 내뱉지도 못했다. 적갈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아이컨택을 해서였다.
“···작가님?”
“·········후우. 그, 큐레이터님. 제가 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네네, 말씀하세요.”
“만약, 만약에 있잖아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무덤을 다시 만들고 싶다면···어떻게 하면 될까요?”
“네?”
진유미가 속눈썹을 깜빡였다.
“진···진짜 무덤을요?”
“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무덤을 다시 만들고 싶다고? 갑자기? 그게 뭐 어떻게 한다고 될 수 있는 건가?
그때, 흔들거리는 시야 사이로 강석이 잡고 있는 잡지가 보였다. 뉴욕의 유명한 미술잡지 [아티스트뉴스 7월호]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저 번역본을 읽어본 적이 있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저기에 실린 여행 수기에 대해서 읽은 건가?
분명 미켈란젤로의 무덤에 다녀온 감상을 적어놓았던 여행 수기로 기억한다. 손가락에 걸린 페이지가 그 부분으로 예상되었다.
선연한 분노. 미켈란젤로의 무덤에 관한 이야기. 멈춰있는 페이지. 그리고 한국의 미켈란젤로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르네상스 시대가 떠오르는 대리석 조각상. 인간예찬의 작품 성향.
단편적인 힌트들이 진유미의 머릿속에 퐁퐁 떠올랐다.
‘···아!’
며칠 전.
블룸 미술관 백 오피스에서 동료 큐레이터끼리 강석이 미켈란젤로 팬인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거···관장님 때문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무덤 때문에 화가 나신 모양인데?’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되려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미켈란젤로의 무덤. 진유미는 그 무덤을 실물로도 본 적이 있었다.
‘좀 너무하긴 했지.’
강석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극성 팬이라면, 화가 날만도 했다.
미켈란젤로가 누구인가.
위대한 예술가, 신의 예술가라고도 표현되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르네상스 최고 거물들의 묘를 세워본 경력이 있는 최고 조각가였다.
최고 거물들 안에는 교황도 있었다. 그 유명한 을 직접 조각한 게 미켈란젤로였다.
심지어 그 엄청난 조각과 건축의 앙상블은 원래 미켈란젤로가 만들고 싶었던 계획된 수치의 1/3 수준이라 전해지고 있었다.
대규모와 대형 작업에 진심인 조각가, 그게 상남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였다.
심지어 성 피에트로 대성당 건축 설계를 담당하게 되었을 때는 여가로 본인 무덤에 안치될 를 8년간 촛불 속에서 작업할 정도였다지?
무덤을 향한 그의 집념과 신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에 대하여 학예사 자격증을 취득할 때 질리도록 외웠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바사리의 기록에 따르면 대리석 문제로 자신이 만족할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자 화가 나서 망치로 때려버리고 말았다고 들었지만.’
어찌되었든 반절도 못 끝내고 완성하지 못했지만, 본인 무덤에 대한 조각상을 미리 만들어둘 만큼. 미켈란젤로는 본인 무덤에 진심이었다.
그런데 그런 미켈란젤로의 무덤은 그의 걸어온 이력과 명예에 비해 너무나도 뚱딴지같았다.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느냐마는···진유미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였다.
“아!”
진유미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질문을 받아놓고···, 잠깐 생각을 좀 하느라···어, 그러니까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무덤을 다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였죠?”
진유미가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듯이 온 생각을 동원했다. 그 쇠고집의 자부심 높은 이탈리아인들의 원조 아이돌.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무덤을 다시 제작한다라···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봐야 했다.
이탈리아인도 아니고, 저 멀리 떨어진 한국인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무덤을 팬이란 이유로 다시 만들겠다고 하고 누가 흔쾌히 허락하겠는가.
그러니 역사를 뛰어넘어야 했다.
“그···적어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명성에 근접한 조각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미켈란젤로 하면 르네상스를 열었고, 르네상스를 닫은 예술가라고 곧잘 떠올리곤 잖아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가인데···아무래도 그 정도는 해야 할 거고···음.”
두루뭉실한 얘기였다.
그러나 진유미는 눈앞에 있는 작가에게 최대한 성의를 다해 대답했다.
“일단, 이탈리아인한테 인정을 받아야겠죠? 이탈리아한테 사랑받는 조각가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당연히 반발이 거셀 테니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조각가가 되어야 할 거고, 네. 일단 유명해야 될 것 같네요! 음···그리고 조각가 하면 생각날 정도로 유명하고, 그냥 일반적이면 안 되고 세계에서 제일?”
강석은 그 이야기를 끊지 않고 묵묵하게 들었다.
“·········또, 또, 그냥 압도적이어야겠죠.”
그래. 모든 미사여구가 필요 없다. 진유미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맞아요. 압도적.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 세상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압도적이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 같아요. 그도 그럴게···죽은 사람의 무덤, 그것도 미켈란젤로의 무덤을 연관도 없는 사람이 다시 만들겠다는 거잖아요? 그런 허무맹랑한 주장도 먹힐 정도로요.”
연관도 없는 사람이라.
강석이 그 부분에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기사, 맞는 소리였다.
“그러네요. 그럼 뭐부터 해야 할까요?”
“······음. 일단 유명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아트 페어에 나간다거나, 다른 사람들한테 이름을 좀 알린다거나···?”
유명해지는 것에 대한 방법이 있을 리가. 진유미는 거기까진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강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렇게 된다고 해도 될지 안될지 모를 일이었다. 동시에 어디에서 벼락이 떨어져 미켈란젤로의 무덤이 반타작 되어 다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고서야···거기까지 생각하던 강석이 고개를 내저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몽상(夢想)이었다.
일단 유명해져야겠지.
그걸 머리 한쪽에 입력해놓는 순간. 저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움찔거린 진유미가 고개를 내밀어 휴게실 밖을 살폈다. 사람들의 인영이 불투명한 공간 너머에 넘실거렸다.
“아! 드디어 끝났나 보네요.”
다행이다. 뒷말을 중얼거린 진유미가 몸을 돌렸다. 이제 아트페어 관련한 회의가 끝난 모양이라고,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면 얼른 자리를 치워주겠다고 말하기 위함이었다.
어느새 강석의 얼굴에도 화기가 다 빠진 상태였다.
대답이 만족스러웠나 보다! 뿌듯해진 진유미가 은근하게 말을 붙였다.
“그런데 작가님.”
“예?”
“···미켈란젤로의 팬이신가 봐요?”
“팬이요?”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강석의 입꼬리가 순간 씰룩였다.
“팬이라기보다···그에게 배우는 중입니다.”
“배워요?”
“제자랄까요.”
400년을 지나 이어진 스승과 제자 같은 느낌? 강석이 뒷말을 슬쩍 덧붙였다. 진유미가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만나 온 화가들과 똑같이 공상적이고 낭만적인 대답이었다.
작가란 이런 거지.
진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배우셨나 봐요.”
그 말에 강석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야 좀 알 것 같아요.”
“뭘요?”
“어떻게 조각해야 할지.”
묘한 말이었다.
진유미가 어쩐지 기시감에 고개를 기울이는 순간.
– ‘미켈란젤로가 죽을 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제야 조각의 진리를 조금 알 것 같은데···이제 죽어야 한다니 아쉽구나. 대단하지 않나요? 가끔 학예사끼리는 이런 얘기를 나누곤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대체 뭘 깨달았던 것일까. 그가 만약 건강했다면, 세상엔 대체 어떤 작품이 남겨졌을까.’
교수님이 강의 중에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강석이 적갈색 눈동자를 감추듯 웃었다.
역광이 비쳐 후광이 비추는 것 같은 느낌.
그의 보이지 않는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진유미는 어째선지, 강석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져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세계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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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죄송합니다, 작가님. 너무 오래 기다리셨죠.”
블룸 미술관의 관장 진도욱이 고개를 숙였다. 밑의 사람이 고개를 숙이는 것과 총책임자가 고개를 숙이는 건, 어쩔 수 없는 무게감 차이를 불러왔다.
관장이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강석도 마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솔직히 10분, 15분에 얼굴을 붉히기엔 오늘의 기다림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괜찮습니다.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마치 새로운 꿈과 목표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묘한 감각을 되감던 강석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는가 싶더니 일직선으로 굳어졌다.
‘그 볼품없이 우아하고 나른하기만 한 차가운 조각상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지만. 이런 빌어먹을. 생각하니 또 화가 나는군.’
제 거친 역동성과 영혼이 담긴 조각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 무덤은 뭐란 말인가. 바사리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이 오늘날 잊혀진 아카데미 회원 출신의 조각가들이었다.
그 초기 바로크 형식을 담아내는 것 같은 나른함이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육신이 그곳에서 원통하게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다.
【 영혼은 신에게, 육신은 대지로 보내고, 그리운 피렌체로 죽어서나마 돌아가고 싶다. 】
제 바램은 성냥개비처럼 타들어 작은 꿈도 이루지 못하고 사라졌다. 영혼은 아직 지상에 있고, 그나마 그리운 피렌체로 돌아갔다고 안심했더니 육신을 삼킨 무덤이 그따위라니.
내 기필코 다시 만드리라.
누가 뭐라 하든 가능하게 하고 말리라.
다시 한 번, 다짐하며 앞을 바라봤다.
일직선으로 다물린 강석의 얼굴 때문에 아직 화가 났다고 오해한 것인지 진도욱은 난처한 얼굴을 한 채로, 사과를 이어갔다.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강석 작가님의 조각상 를 외국 아트페어에 내놓자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문화재단에서 요구해서요.”
“·········아?”
아트페어?
“그래서 제가 5.7미터가 넘는 조각상 원본을 해외로 보내다가 어디 한구석 부서지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란 말이냐. 호통을 치며 설득을 했습죠. 제가 산강문화재단에 이렇게 큰소리를 쳐본 적이 없어서, 다들 놀란 눈치더라고요. 네. 저도 놀랐습니다. 하하.”
강석이 묘한 얼굴로 진도욱 관장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쉽긴 아쉽네요. 아트페어가 아무래도 신진 작가들에겐 새로운 장을 여는 자리가 되곤 하니까요. 작가님도 여유가 되시면, 아트페어 내보낼 작품을 하나 준비해보시면 좋을 겁니다.”
“아트페어에 내보낼 작품이요?”
진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입체조형물이 아니라 그림이라면 옮길 때 훼손 리스크가 적으니까요.”
그러면서 둘은 동시에 인간소묘 군상 을 떠올렸다. 노을 역시 수백 개의 소묘 그림이 합쳐진 작품이었지만, 뒤에 라이트 박스가 파손 염려가 있었다.
좋은 작품일수록 해외에 반출하는 부담이 큰 법이 아니겠나.
물론 정도야 가지고 나간다면 얼마든지 나갈 수야 있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던 진도욱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상념을 흐트러트리기 위함이었다.
진도욱이 알고 있기로 은 6개월 가까이 작약갤러리에서만 전시 중인 작품이었다.
오늘 강석과 진도욱이 맺으려는 전시계약처럼 역시 작약갤러리와 계약이 되어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미 계약이 된 작품을 가지고 국제 아트페어 제출에 대해서 논하는 건, 업계 룰 위반이었다.
진도욱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물론, 입체조형물이 없는 건 아니지만···대형 작품, 특히 대리석 조각상 같은 경우는 옮기기가 어렵죠. 근데 또 한국 미술 시장하고 세계 미술 시장은 비교가 안 되니까 이름을 알리시려면···”
진도욱 관장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트페어라···강석은 조금 전까지 옆에서 조잘거리던 진유미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 ‘······음. 일단 유명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아트 페어에 나간다거나, 다른 사람들한테 이름을 좀 알린다거나···?’
콧등을 긁적인 강석이 진도욱 관장의 이야기를 죽 듣다가 슬쩍 물었다.
“근데 그 아트페어라는 거, 언제 열리나요?”
“네?”
작품이야 만들면 되는 거 아니겠나.
강석이 웃었다.
뭔가, 이제야 시작이라는 기분이었다.
* * * *
이른 아침.
청화예술고등학교.
여름 특유의 하늘과 똑 닮은 반팔을 입은 중년이 교무실 구석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한숨을 쉴 때마다 주변 교사들의 시선이 모였다. 안쓰럽다는 시선이었다.
그의 정체는 3학년 4반의 담임선생님, 국어담당 김수학이었다.
“김쌤. 힘내세요.”
한숨을 푹푹 쉬는 그의 자리 위로 비타민 음료가 하나 놓였다. 초코파이와 함께 놓인 음료를 바라보며 김수학이 울상을 지었다.
– ‘김선생. 자네 반의 강석 학생 있잖나. 그 학생이 어디 대학 가는지를 아직도 모르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 ‘실망입니다. 김수학 선생.’
아직 담임면담 시즌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강석의 진로희망학교를 모른다고 면박을 주던 학생부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를 찌르는 기분이었다.
학년별 회의에 참석하여 학생부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에게 차례대로 압박을 받는 것도 한두 번이지. 벌써 세 번이나 반복되니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보통 희망대학 하나 모른다고 이렇게까지 아침밤낮으로 괴롭힐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강석이 워낙 특이케이스였다.
보통 미술과들은 여름방학이 다가오면 내신 반영기간도 끝났겠다, 슬슬 실기 위해서 출결인정을 받을 준비를 하는 법이었다.
근데 강석에게선 그런 소식이 들려오지도 않고, 미술은 계속하는 것 같긴 한데 야간레슨도 3학년 1학기부터 등록한 적이 없는 상태였다.
우연히 그걸 알게 된 학생부장이 매점에서 아이들에게 빵을 사주면서 전해 듣기로, 강석은 이제 입시 미술 학원도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입시 미술과 관련한 활동은 전반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이니 미술 대학에 진학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선생들 사이에서 돌기 시작한 것이다.
사립고등학교 이사회에서 상위권 학생들의 상위권 대학 합격에 대하여 얼마나 신경 쓰는지를 안다면, 지금 김수학 선생이 얼마나 벼랑 끝에 몰렸는지를 예측이 될 터였다.
그때였다.
파티션 너머로 사회문화 선생님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김수학에게 질문했다.
“오늘 면담이죠?”
면담.
김수학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3학년 여름방학을 겨우 이 주일 정도 앞둔 시점.
출석번호 역순으로 시작한 면담이 드디어 1번까지 도달한 참이었다. 그리고 그 1번이 바로 강석이었다.
부담감에 미루고 미루었는데 드디어 이날이 오고 만 것이다. 김수학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잘할 수 있겠죠?”
불안감이 엿보이는 말투에 사회문화 선생이 최대한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위로했다.
“그, 석이가 워낙 내신도 좋고 그 실기도 요즘 좋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 보통 성적 좋으면 한예종 알아서 준비하더만. 미술 안 할 것도 아니고···안 그래?”
“그렇겠죠?”
오늘 만족할만한 소식을 못 가져오면 진짜로 교감 선생님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먹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청화예술고등학교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산강그룹에서 운영하는, 그야말로 동물과 정글을 합쳐놓은 지상 최강의 약육강식의 세계 축소판이나 다름없었다. 우황청심환을 하나 뜯어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김수학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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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왔도다.
이 시간이 오고 말았도다.
김수학이 정면을 응시했다. 닫힌 면담 교실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이 심정을 무어라 해야 할까. 뒤에서 사자와 맹수 떼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심정이었다.
우황청심환도 효과가 없는 기분이었다. 아니, 괜히 먹은 게 분명했다. 심장이 벌렁거리는 게 정상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면담 교실이 비어있어 교무실에서 면담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정도?
최악이다.
김수학이 새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문을 바라보는 그때.
드르륵,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강석이 교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침 조회시간부터 면담을 하느라 강석과는 오늘 처음으로 마주 보고 인사를 하는 참이었다.
“석, 석, 석이 왔니.”
나 지금 떨고 있니.
김수학이 긴장을 하며 강석을 향해 최대한 웃어주었다.
강석이 마주 고개를 숙이며 의자에 앉는데 인상을 찌푸리는 게 눈에 잡혔다. 손으로 무릎을 살짝 쥐는 모습에 김수학이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것도 잊고 재빨리 물었다.
“석아. 어디 아프니?”
“아. 아니요. 그냥, 요즘 발목이랑 무릎이 곧잘 아파서요.”
“······그래?”
그제야 넉넉한 교복을 대충 걷어붙인 강석의 소매가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소매를 바라보던 김수학이 조금 진정되는 기분에 편하게 입을 열었다.
“음············그래. 요즘 힘든 건 없고?”
의례적인 인사말이었다. 김수학은 그 말을 건네면서 재빠르게 6월 모평 성적과 지금까지의 학생부, 그리고 면담기록지를 책상 위에 펼쳐놓았다.
“아뇨. 딱히 힘든 건 없어요.”
오히려 재밌다는 얼굴에 김수학이 조금 안심된다는 얼굴로 옅게 웃음 지었다. 그렇구나. 문제가 없다는 소식은 희소식이었다.
“그래. 그러면···음, 오늘 부른 이유는 알겠지만 이제 슬슬 진로희망을 확인해야 해서. 6월 모평(모의고사평가) 결과도 나왔고···성적 좋던데, 어디 생각한 학교는 있나?”
김수학이 모나미 검은 볼펜을 딸깍였다. 그리고 편하게 면담기록지 오른쪽 위 끝에 강석의 이름을 적어내렸다.
“아, 그게요.”
강석의 말에 김수학이 편하게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의 특이한 적갈색 눈동자를 마주 보는 그 순간. 강석의 입이 다시 열렸다.
“저 대학 안 가려고요.”
응?
김수학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뭐?”
이게 무슨 일이야.
김수학이 갈 곳을 잃은 눈동자로 강석을 바라보았다. 강석은 차분한 낯으로 김수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이 느낌을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까.
아, 그래.
이건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꿈이 생겨서요.”
김수학은 제가 국어공부를 한 세월을 긁어모아 이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X 됐다.
66. 새하얀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