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19
“그런데 누가 스톱 마법을 시전한 거지? 아르민 씨가 이곳에 온 게 아니라면 말이야.”
“페르미의 규정외식이겠지. 상층부의 사건은 시공간의 한 좌표에 숨어 있어. 시간을 멈추자 그것이 시간과 공간으로 분리되어 나타나는 거야.”
그들에게는 현실처럼 재생되는 사건이지만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이곳의 모든 일들이 찰나였다.
“만약 여기에서 시불상폭매를 시전한다면…….”
시로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찰이 그의 손목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숨어.”
벽에 달라붙어 진천요술을 펼치자 벽면과 똑같은 환영이 나타나 그들을 가렸다.
잠시 후 온몸에 피 칠갑이 되어 있고 두 팔이 힘없이 늘어진 미로가 72번 창고로 들어왔다.
어딘가 멍한 표정에 발걸음도 무거웠지만, 그래도 눈빛만큼은 또렷했다.
‘미로 씨? 어떻게 된 일이지?’
미로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으나 안찰은 태연하게 그녀를 주시했다.
‘괜찮아. 들킬 리가 없어.’
환영을 실물처럼 구현하는 마정안의 능력은 반야의 경지를 기술화시킨 것으로, 미로라고 해도 쉽게 간파할 수 없었다.
“시로네.”
미로의 부름에 시로네의 어깨가 움찔했다.
“오지 마라.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절대로 이곳에 오면 안 돼.”
미로와 대화를 해야 된다는 생각에 시로네가 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안찰이 어깨를 붙잡았다.
‘아직은 아니야. 시작부터 사건에 얽히는 건 좋지 않아.’
쿠르르르릉!
그때 이스타스가 진동하면서 구조물의 위치가 바뀌기 시작했다.
미로가 황급히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이 멍청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로의 모습이 점차 옅어지더니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진동이 멈추고, 안찰이 환영 마법을 해지하며 말했다.
“이스타스의 구조가 바뀌었어. 즉, 72번 창고가 더 이상 출입구가 아니란 얘기야.”
“공간이 변하면 사건도 변한다는 뜻이야?”
안찰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층부의 사건은 특정 시간, 특정 공간에 새겨진 기록이야. 둘 중 하나만 변해도 사건이 발생하지 않지. 하지만 앞으로는 다를 거야. 창고가 움직였다는 것은, 벌써 기존의 사건과 다른 노선을 탔다는 거니까.”
“누가 창고를 움직인 거지?”
“페르미일 수도 있고…….”
안찰이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어쩌면 너일 수도 있겠지.”
시로네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막 들어왔잖아? 내가 어떻게 창고를 움직일 수가 있어?”
“상층부는 시간이 무한히 순환하는 구조. 즉 직선이 아닌 처음과 끝이 연결된 원이야.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없다는 거지. 우리는 지금 막 들어왔지만, 미래의 네가 어떤 이유로 인해 이스타스를 움직였을 가능성이 있어. 그렇지 않다면, 조금 전 미로가 어떻게 너의 이름을 알고 있을 수 있겠어?”
“아…….”
시로네의 입이 벌어졌다.
“상층부의 사건은 19년 전의 기록이야. 네 이름을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 따라서 우리가 본 미로는 이미 너를 만난 상태의 미로라는 거야.”
“미래의 나에게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건가?”
“아직은 아무것도 단정 지을 수 없어. 이미 사건이 다른 노선을 탔다는 것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얘기야. 특히나 공간이 움직인 건 심각한 일이지.”
“어떤 의미에서?”
안찰은 환영 마법을 시전하여 큐브를 구현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스타스는 일종의 큐브야. 그리고 거핀은 이곳에 특정 사건을 담았지. 예를 들어서…….”
큐브의 육면체에 토르미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전쟁을 모사한 그림이 덧씌워졌다.
“이 그림을 상층부의 사건이라고 해 보자. 단순한 그림이지만 관측자의 시선에 따라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
시로네는 거핀이 어떤 방식으로 사건을 시공간에 감추었는지 깨달았다.
“3차원의 사건을 2차원으로 압축시킨 거로군.”
“맞아. 이 그림처럼 사건을 그대로 찍어 낸 거야. 다만 우리는 현재 이 그림 안으로 들어온 상황이야. 그래서 2차원의 사건을 3차원으로 경험하는 거지. 그리고 지금, 어떤 이유로 이스타스가 움직였다.”
큐브가 마구잡이로 돌아가자 그림이 마치 퍼즐처럼 뒤죽박죽 뒤섞였다.
“으음.”
“이제 알겠어? 특정 시간과 공간에 기록된 사건들이 전부 흩어져 버렸다는 뜻이야.”
안찰은 다음 창고로 넘어가는 통로를 가리켰다.
“여기서 14번 창고로 가는 데에는 1분도 걸리지 않아. 하지만 그곳에는 1시간 후의 미래가 펼쳐져 있을지도 모르지. 혹은 1시간 전의 과거거나.”
공간이 뒤틀리면서 시간선이 끊어졌다면 또 하나의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럼 시간을 뒤튼다면?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시불상폭매를 시전한다면 어떻게 될까?”
“얼마나 큰 폭으로 시간을 인지하지?”
“전후 1초 정도.”
“그렇다면 상층부의 시간을 전부 포함하고도 남아. 실제로 여기는 시간이 없는 2차원의 사건이니까. 지금 시불상폭매를 시전한다면, 이 공간에서 일어난 모든 시간대의 사건을 경험하게 될 거야.”
“하지만 공간을 바꿀 수는 없지. 그래서 내가 이스타스를 움직였을 수도 있다고 말한 거로군.”
“바로 그거야. 페르미도 의심스럽지만, 공간을 바꿀 필요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너니까.”
“그게 어떤 필요성일까?”
어지간히 심각한 일이 아니고서는 사건을 뒤틀 각오를 하면서까지 이스타스를 가동시킬 이유가 없었다.
“기관실로 가 보는 수밖에. 사건이 변했다면 되돌리기 위해서라도 알아야 할 테니까.”
안찰이 기관실 쪽으로 방향을 틀자 시로네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이스타스의 방정식, 알고 있었어?”
“진천우주국의 정보력을 우습게 보지 마. 1급 기밀이라도 설계도쯤은 입수할 수 있어.”
시로네의 눈이 퀭해졌다.
‘1급 기밀이라…….’
천국에 가기 전에도 느꼈지만 여태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시간 : 1시간 17분.
공간 : 이스타스 14번 창고.
창고 문을 나서자마자 강력한 폭발음이 터졌다.
“뭐야?”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핏물로 도배가 되어 있는 창고의 풍경이 시로네를 맞이했다.
“으아아아아아!”
“쫓아라! 절대로 놓치지 마!”
시로네의 눈이 커졌다.
‘그때 그 목소리다!’
이스타스에서 처음 시불상폭매를 시전했을 때 들었던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하자, 손목에 독수리의 발톱처럼 휘어진 클로를 착용하고 있는 남자가 미로의 뒤를 쫓고 있었다.
“방심하지 마라! 상대는 최강의 반야다!”
앞을 보며 달리는 미로였으나 온 세상을 내려다보는 천수관세음의 시야에는 사각이 없었다.
“으아아악!”
관음의 손바닥이 또 1명의 병사를 벽으로 밀어붙이자 파리처럼 찍 하고 몸이 터졌다.
“보고합니다! 1조 전멸! 1조 전멸!”
“이런 제길!”
2조를 이끄는 조장 라스크가 이를 악물며 튀어 나갔다.
“미로! 순순히 목을 내놔라!”
간격은 순식간에 좁혀졌고, 그제야 미로가 돌아섰다.
“쳇!”
관음의 손바닥이 찰나의 시간 속에서 분화되어 라스크를 노리자 그의 클로가 잔상을 일으키며 휘둘렸다.
폭발적인 굉음을 내며 관음의 장이 튕겨 나가고, 라스크가 클로를 엑스 자로 교차하며 바닥에 착지했다.
“짜증 나게…….”
미로는 품에 안은 아이를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더니 다시 몸을 돌렸다.
“쫓아! 아이를 노려라!”
화성의 병력이 시로네의 곁을 빠르게 지나갔다.
전투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오른 시로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안찰이 환영 마법을 소멸시키며 말했다.
“이 좌표에서 화성의 1조가 전멸. 아이를 안고 있는 것으로 봐서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야.”
“어떻게든 아이를 지키려는 것 같았어.”
그렇지 않다면 미로만큼 강력한 자가 적을 앞에 두고 도망을 칠 이유가 없었다.
‘그 아이는……’
시로네는 수련을 끝마치고 하산하기 전날 밤, 미로가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서 물었던 것을 떠올렸다.
-시로네, 어쩌면 나는…….
그때 미로가 하려고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확인해야겠어, 그 아이가 누구인지.”
“그렇다면 다음 방으로 넘어가자.”
미로가 도주한 13번 방에 도착했으나 전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공간은 맞지만, 시간대가 다른 모양이야.”
안찰의 말에 시로네는 아르망을 꺼내 들었다.
검을 쥐고 금강무장을 발동하자 유기질의 로브가 몸을 감싸고 인공두뇌 외가 머리 위로 떠올랐다.
“그게 아르망인가?”
발할라 액션은 현재 채무를 갚고 있는 상황이지만 다른 기능들은 생존 확률을 월등히 높여 줄 터였다.
“어떻게든 지금 미로를 만나야겠어. 여기서 시불상폭매를 시전할 거야.”
시간을 다르게 인지하면 안찰과 시로네의 좌표가 갈라지게 될 터이니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좋아. 그럼 나는 기관실로 갈게. 확인하면 나를 찾아와.”
안찰이 창고를 나가는 것까지 확인한 시로네가 시불상폭매를 시전하자 주위의 풍경이 아롱거리기 시작했다.
“허어어억!”
기존의 시불상폭매하고는 전혀 다른 시간의 인지, 2시간 48분의 기록이 통째로 밀려들었다.
과거, 현재, 미래가 2차원으로 욱여들어 오는 감각은 마치 요지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듯 괴기스러웠다.
“크으으으!”
정보의 폭력 속에서 시로네는 필사적으로 미로가 이곳에 있었던 시간을 인지해 냈다.
“으아아아!”
시불상폭매가 사라지자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다.
시간 : 1시간 32분.
공간 : 이스타스 13번 창고.
“누구야, 너?”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미로가 벽에서 등을 뗐다.
“미로 씨?”
황급히 정신을 차린 시로네는 움찔 걸음을 멈췄다.
조금 전에 그녀를 추격했던 화성 부대 2조가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채로 창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전투가 끝났구나.’
“누구냐고 묻잖아? 화성이라면 죽인다.”
시로네는 황급히 후드를 젖혔다.
“아니에요! 저는 마법학교 학생이에요!”
미로를 안심시킬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었다.
“학생? 나가지 못한 건가?”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의 학생이라면 거핀이 시간선을 자르기 전에 들어와 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불쌍하게 됐군. 안타깝지만 삶을 정리해라. 너는 여기서 나갈 수 없어.”
긴장이 풀린 미로가 다시 벽에 등을 대며 주저앉았다.
시로네는 그녀의 품에 안겨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잠에 빠져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다가갔다.
“아뇨. 저는 미로 씨를 만나러 왔어요.”
“나를?”
지친 얼굴의 미로가 고개를 돌렸다.
그날의 사건 (3)
“혹시 저를 아시나요?”
시로네가 물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너를 어떻게 알아?”
역시 이스타스에 처음 들어와서 발견한 미로는 시로네를 만났던 게 틀림없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사실이었다.
“저는 미로 씨를 알고 있어요. 미로 씨와 함께 싸웠고 미로 씨에게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요.”
잠시 눈을 깜박거리던 미로의 얼굴이 이내 심각해졌다.
“성공했구나.”
거핀의 지령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시간이 닫히고 얼마나 지난 후에 왔지?”
“19년요.”
무려 19년 뒤의 미래에서 온 소년과의 조우였다.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지, 최후의 전쟁은 어떻게 되었는지, 시로네는 미로가 물어 올 가상의 질문을 떠올리며 미리부터 대답을 준비했다.
하지만 들리는 건 냉혹한 목소리였다.
“어째서 여기에 온 거야?”
“네?”
“임무가 성공했으면 이스타스를 파괴하든 뭘 하든 사건을 파묻었어야지. 왜 다시 들어온 거냐고.”
“저기, 그게…….”
답답해진 미로가 말을 보탰다.
“정말 여기가 어딘지 모르고 들어왔어? 시간의 무한 순환 구조. 네가 들어오는 바람에 사건이 뒤틀렸을 거 아냐! 어떻게 책임질 거야?”
시로네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자 머리를 굴리던 미로가 다시 물음을 던졌다.
“너, 혹시 페르미니?”
그런 오해는 사양이었다.
“아뇨. 저는 시로네예요.”
시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