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17
신의 주파수가 공명되면서 라 에너미의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가 왼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라 에너미!”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 시로네가 소리쳤으나 대답은 전혀 다른 곳에서 들렸다.
-우주란 무엇인가?
“나와라!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
-나는 어찌하여 신이 될 수 없는가?
“키에에에!”
키도가 목소리가 들린 지점을 등으로 미끄러지듯 지나가며 창을 휘둘렀으나 걸리는 것은 없었다.
시로네는 즉각 시선을 돌렸다.
‘소용없어. 놈은 과거에만 존재한다.’
과거에서부터 밀려드는 목소리라면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고 있을 것이란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그리 먼 과거는 아니야.’
샤갈이 여전히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고, 1초 안에 있는 과거라면 시불상폭매로 라 에너미를 타격할 수 있었다.
‘광폭!’
시폭감을 이용해 마법을 시전하자 빛의 장막이 20미터 반경 전체를 장악했다.
동시에 샤갈이 코를 킁킁거리며 장소를 이탈했다.
‘피했다. 분명 마법이 통하는 거야.’
샤갈의 움직임이 즉각적이었다는 것은 라 에너미가 거의 현재와 근접한 시간대에 머물고 있다는 얘기.
“어디냐! 나와!”
그때 누군가가 시로네의 어깨를 짚었다.
-남겨진 질문에 대답해라, 시로네.
지척에서 들린 차가운 목소리에 시로네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내 뒤에 있다.’
네메시스를 통해 모두가 느꼈고 키도가 몸을 날렸으나, 먼저 도착한 것은 샤갈이었다.
“죽어라아아아!”
“크윽!”
시로네는 황급히 몸을 뒤틀어 단도를 피했다.
“정신 차려!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이성을 잃은 샤갈이 땅을 박차며 도로를 빠르게 질주하자 하늘로 떠오른 루피스트가 소리쳤다.
“따라가! 저곳이다!”
다시 추격전이 시작된 가운데 키도가 시로네의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시각이 더해질 때까지 기다려. 우주적 레벨의 사건을 조작하는 놈이야. 공기 분자의 움직임까지 계산할 수 있겠지. 최강의 적이라고 상정해야 돼.”
“실체화되어도 제압하는 건 다른 문제라는 건가?”
키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찾는다고 다가 아니야. 제압하지 못하면 내가 먹을 수 없고, 그러면 라 에너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루피스트가 비행고도를 낮추며 말했다.
“몇 번의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 번이라고 생각하는 게 완벽하다. 기회가 오면, 절대로 놓치지 마라.”
시로네는 이를 뿌드득 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
리안과 쿠안, 베네치아는 에텔라와 합류하여 라둠의 은폐 시설 구역을 내달렸다.
‘정말 묘한 기분이다.’
목적지 같은 건 없다.
어차피 그들이 가는 곳에 라 에너미가 있을 것이기에 머릿속을 비워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불길한 거지.’
쿠안은 베네치아를 돌아보았다.
‘어째서 라 에너미는 그녀의 뇌를 죽였을까?’
아마도 베네치아의 자유의지가 라 에너미의 설계에 방해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라 에너미를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생각할 필요 없어요.”
쿠안이 에텔라를 돌아보았다.
“어떤 판단을 내려도 라 에너미의 의도인지 우리의 의지인지 분간할 수 없어요. 이미 사건에 먹혔다고 봐야 해요.”
자유의지의 소실이었다.
“정공법밖에 없다는 거군요.”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라 에너미를 만나 존재 자체를 말소시키는 것이었다.
결정을 내린 쿠안이 걸음을 멈추더니 베네치아에게 네메시스 반지를 끼워 주었다.
에텔라의 시선을 느낀 그가 설명했다.
“아리아 씨가 차고 있던 겁니다. 이제 라 에너미가 접근한다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겠죠.”
그때 시로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안!”
광기의 눈을 치켜뜨며 돌진하는 샤갈이 보이고, 시로네 일행이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아, 아아아…….”
베네치아가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 소리를 내자 리안과 쿠안, 에텔라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훤칠한 키, 중동풍의 의상에 머리를 여자처럼 길게 늘어뜨린 미남자가 서 있었다.
“마침내.”
오감이 통합되었다.
“라……!”
샤갈이 이빨 사이로 침을 흘리며 속사검이 담긴 가방을 있는 힘껏 던졌다.
“에너미이이이이!”
뒤를 돌아본 라 에너미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으나, 그 미소는 샤갈이 아닌 시로네를 향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시로네.”
시로네에게는 고작 20년의 시간이지만 라에게는 수십억 년의 기다림이었다.
“왜! 왜! 왜!”
선봉은 역시나 샤갈.
수십 개의 속사검이 라의 모든 급소를 향해 날아들었다.
수많은 강자들의 목숨을 빼앗은 기술.
하지만 라 에너미는 마치 춤을 추듯 아름다운 동작으로 한 바퀴를 회전하며 모든 공격을 회피했다.
“뭐……!”
지독한 절망에 빠진 샤갈이 공격을 이어 나갈 의지마저 소멸할 정도로 의아한 사건이었다.
‘이건 불가능해!’
천재의 직감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시로네! 지금이다!”
루피스트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시로네가 걸음을 멈췄다.
‘놓치지 않겠어!’
퀀텀 슈퍼포지션-300중첩-화신술-천사의 징벌.
광천사의 화신이 거대하게 피어오르며 라 에너미를 향해 무지막지한 폭격을 시작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죽을 수도 있는 위력이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희생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라만 제거할 수 있다면!’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부지불식간에 마법을 시전한 시로네를 원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이 고막을 관통했다.
파편들이 먼저 추락하고 먼지구름이 거대한 괴물처럼 도시를 잠식하며 퍼져 나갔다.
“푸우! 엄청나군.”
사람보다 큰 벽돌을 위로 떠밀며 리안이 걸어 나왔다.
시로네가 인정사정없이 꽂아 버린 빛의 창은 불과 얼마 전에 졸업 시험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강한 위력이었다.
‘내가 살았으면 다 살았겠지.’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반경 수십 미터에 달하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시커먼 구멍이었다.
그리고 그 구멍 위에, 라 에너미가 떠 있었다.
“……멀쩡하잖아?”
연기를 뚫고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낸 다른 사람들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300개의 창이 순차적으로 내리꽂히는 찰나의 순간을 확실히 복기할 수 있는 사람은 시로네뿐이었다.
“이건…… 불가능해.”
시로네가 느끼는 감정은 조금 전에 샤갈이 느꼈던 감정과 정확히 일치했다.
‘피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었어!’
시로네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해서도, 라 에너미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도 아니었다.
무브먼트 제로.
분명 300개의 창이 완벽하게 라 에너미의 동선을 차단했음에도 회피한 것이었다.
‘피할 수 있는 루트가 있었다고?’
시로네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절대로 없어. 설령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단 말이야.’
완벽하게 체크메이트가 된 상황에서 그것을 타개할 수 있는 수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어려운 게 아니라 실제로 없기 때문이다.
메이레이가 시로네에게 다가왔다.
“헥사. 라는 완벽한 난수다.”
“완벽한…… 난수?”
“인간은 무작위를 만들 수 없어. 무언가를 무작위로 설정하려고 해도, ‘무작위로 설정하겠다.’라는 의도 자체가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 버리거든.”
우리는 완벽한 무작위를 상상할 수 있는가?
“하지만 라는 다르다. 저건 완벽한 혼돈이야. 패턴 바깥에서 움직이기에 없다고 믿어 버리게 되는 거지.”
손을 흔든다, 눈을 깜박인다, 소리를 지른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무한에 가까운 행위를 전부 상상했을 때, 라는 그 범주를 뛰어넘는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다.
“상상할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 헥사가 100퍼센트 필연의 산물이라면, 라는 100퍼센트 우연의 산물이다.”
패턴을 초월해 모든 것이 우연으로 촉발된다면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한마디로 짜증 나게 강하다는 거군. 이제 어떡할 거야? 화력 일변도는 효과가 없을 것 같은데?”
메이레이가 말했다.
“라 에너미를 제거할 방법이 있다. 하지만 그것도 놈의 설계도를 탈취해야 가능한 일이야.”
라 에너미를 노려보며 키도가 안경을 눌렀다.
“놈을 먹으면 놈의 상상도 먹을 수 있다. 어차피 완벽한 혼돈이 무적을 뜻하는 건 아닐 거야. 그러니까…… 혼돈이라는 게 그렇잖아? 약하기도 하고 강하기도 하고…….”
“응, 이해했어.”
시로네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기회를 만들게. 그때 라 에너미를 먹는 거야.”
“어떡하려고?”
“……나도 몰라.”
미소를 지으며 달려간 시로네가 순간 이동으로 구덩이를 뛰어넘자 라 에너미가 두 팔을 벌리며 맞이했다.
“할 수 있을까, 시로네?”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해답이 있었다.
퀀텀 슈퍼포지션-공겁의 수레바퀴.
처음에는 2중첩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퀀텀 슈퍼포지션을 발동하자 중첩되는 사건의 개수가 무한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공겁의 프랙탈을 제어하는 방법은 울티마 시스템밖에 없지만 시로네는 그것조차 포기하고 수를 불려 나갔다.
“세상에…….”
시로네의 숫자가 거품처럼 불어나더니 거대한 육체의 구球가 되어 라 에너미를 완전히 가두었다.
“어떻게 버티려고?”
이대로 숫자가 늘어나면 결국에는 통제가 불가능할 테지만 시로네는 걱정하지 않았다.
‘상관없어, 얼마든지 불어나도.’
필연과 우연을 중화시킨다.
시로네의 사건이 끝없이 늘어나도 괜찮은 이유는, 라 에너미의 사건이 똑같이 그것을 소거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거품이…… 사라진다.”
마침내 1명의 시로네가 라 에너미를 붙잡는 순간, 모든 시로네가 그 하나의 사건을 향해 수렴하기 시작했다.
신의 눈동자 (1)
공겁의 수레바퀴를 통해 거품처럼 불어난 사건은 발생할 수 있는 모든 패턴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무한개의 패턴이 하나의 무작위와 반응하는 것은 엄청난 개수의 자갈을 던져 바다를 메우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벌어졌다.
싸우고, 춤추고, 고문하고, 키스하고…….
물론 이러한 사건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벌어졌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라 에너미의 무작위성이 점차 소실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로네의 패턴이 증가하는 만큼 라 에너미가 반응할 수 있는 가짓수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어떤 사건들은 애초에 일어날 확률이 없는 것으로 변하고, 그렇게 공겁의 수레바퀴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모든 사건들이 ‘애초에 발생할 수 없는 사건’으로 사라져 버린 끝에 남은 것은 진정한 무브먼트 제로.
어떤 반응도 할 수 없는 라 에너미의 어깨를 붙잡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었다.
“하아, 하아.”
시로네는 거친 숨을 내쉬며 라 에너미를 노려보았다.
‘잡았다. 절대로 놓치지 않아.’
설령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물고 늘어질 것이다.
‘확률의 싸움이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