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64
감각을 확장시킨 기요르기는 미요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 전술의 일환이라고 해 둘까? 그리고 한 번은 부딪쳐 보고 싶었거든.”
“한 번?”
시로네가 미간을 구겼다.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내가 너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거라고 생각해?”
“착각하지 마라, 야훼여.”
기요르기가 악마의 바이블을 펼쳤다.
“이 바이블은 이면 세계에서 유일한 것으로, 내 모든 능력의 원천이 된다.”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갔다.
“애초에 나에게는 헥사가 없어. 너에게 맞선 능력은 마르키나 전서 16장 5절. 그리하여 혼돈은 기꺼이 신의 그림자가 되어, 신의 발에 짓밟히면서도, 끝없이 그의 형태를 모방하게 되리라. 라는 구절이다.”
“…….”
시로네는 바이블이 수천 페이지가 되는 것에 주목했다.
“그래, 짐작한 대로다. 악마의 바이블에는 수많은 능력이 담겨 있지. 물론 너보다는 못하지만.”
헥사에는 무한의 가능성이 담겨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래서…… 모든 기술을 써서 나를 상대하겠다는 거야?”
“그것도 경우의수에 들어가 있지. 만약 네가 거래에 응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기요르기가 페이지를 들었다.
“이대로 보내 준다면 네가 보는 앞에서 이 능력을 파기하겠다. 덧붙이자면 헥사를 모방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마르키나 전서 16장 5절뿐이야.”
시로네는 미간을 구겼다.
‘파기한다고? 카타콤의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능력일 텐데.’
시로네의 마魔라면 사기를 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쁜 제안도 아니야.’
태극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해도, 상대가 헥사를 모방하는 것은 분명 껄끄럽다.
‘반면에 마르키나 전서 16장 5절을 파기한다면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어.’
시로네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 녀석…….’
정말로 자신을 닮았다.
‘애초부터 전부 계산하고 덤빈 거야. 힘의 대결을 해 보고, 실패하면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 것도…….’
야훼를 깊이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
그렇기에 씁쓸했다.
‘나처럼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다면…….’
자신의 마음도 이해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기요르기가 다그쳤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던 것 같은데? 이제 슬슬 결정을 내리지. 선택은 네 몫이다.”
시로네는 말려들지 않았다.
‘어차피 허세.’
서로의 생각을 읽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그로부터 한참이나 고민에 잠겨 있던 시로네가 크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두 번은 없을 거다.”
“……거래 성립이군.”
찍 하고 16장 5절의 페이지가 찢어졌다.
“명심해라, 야훼. 나보다 강할 수는 있어도, 악은 언제나 선을 이긴다.”
떠나는 적을 지켜보던 시로네는 바람에 날리는 종이를 빠르게 낚아챘다.
‘악마의 바이블.’
마르키나 전서의 구절들이 시로네의 슬픈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
도시를 벗어난 기요르기는 20미터 전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를 발견했다.
“살아 있었나?”
카타콤의 조직원 굴탄이었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으나, 얼굴과 손에 생긴 화상의 흉터는 감추지 못했다.
“……딱히 반기는 말투는 아니군요.”
굴탄이 옆에 섰으나 기요르기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갔다.
“아니, 전력 이탈을 막은 건 다행이지. 그냥……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거든.”
“흥, 그깟 인간 계집애한테.”
솔직히 아슬아슬했다.
굴탄이 양자화 상태에서 이동할 수 있는 반경의 한계치는 고작해야 100미터 정도.
에이미가 통째로 불태우는 산을 빠져나가기 위해 그는 일곱 번의 재도약을 했다.
열에 노출된 시간의 총합은 1초 이내였으나 그럼에도 치사에 가까운 화상이었다.
‘치료가 필요해.’
굴탄이 절뚝거리며 뒤를 따르는 와중에도 기요르기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어차피 마족 간에 전우애는 없지만 굴탄은 다른 의미로 기분이 나빴다.
“그나저나 기요르기 씨는 어떻게 된 거죠? 야훼를 만나지 못한 겁니까?”
“붙어 보기는 했지. 강하더군.”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고 보기에는 기요르기의 상태가 너무 멀쩡했다.
“정말로 그게 전부입니까? 혹여 일부러 싸움을 피한 것은 아니고요?”
“무슨 뜻이지?”
“분명 야훼는 강하죠. 하지만 악으로 선을 이기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요.”
기요르기는 생각에 잠겼다.
‘나는 야훼를 증오하는가?’
어떤 존재가 둘이 되었다면, 그 둘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다.
‘유일한 진짜가 되기 위해.’
하지만 그것을 증오라고 부를 수 있을까?
“완벽을 위한 후퇴일 뿐이다. 카타콤의 조직원 전원을 3일 내로 소집해. 전략을 수정한다.”
“알겠습니다.”
굴탄은 여전히 미심쩍었으나 여기서 더 기요르기를 몰아붙일 용기는 없었다.
공간 이동을 타고 에이미와 케이든, 마야가 시로네의 앞에 착지했다.
에이미가 물었다.
“어떻게 됐어? 기요르기는?”
“일단은…… 무승부 같은 것으로 됐어. 당분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무승부?”
마족을 상대로 나올 수 있는 결론인가?
“그나저나 잘된 모양이네.”
시로네는 마야와 케이든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고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마야가 어색하게 다가왔다.
“미안해, 나 때문에 위험한 일에 휘말려서. 너랑 에이미를 볼 면목이 없어.”
“괜찮아. 무사해서 다행이야.”
케이든이 다가왔다.
“시로네, 나는…….”
사정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케이든의 오른팔이 시로네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윽!”
고개를 젖힌 시로네가 물었다.
“뭐야?”
하지만 깜짝 놀란 사람은 오히려 케이든이었고, 자신의 오른팔과 씨름을 시작했다.
“제길! 가만히 좀 있어!”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시로네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에이미에게 사정을 들은 시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손 증후군 같은 거네.”
거짓말처럼 케이든의 오른손이 잠잠해지고, 그가 눈을 빛내며 돌아보았다.
“신의 손?”
“뇌의 정보처리 단계에서 생긴 문제야. 예전에는 신이 깃들였다고 착각해서 그렇게 부르기도 했지. 대부분 외상에 의해 생기는 걸로 알고 있는데.”
케이든의 경우는 달랐다.
‘감정이 육체를 바꾸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사고 회로의 메커니즘까지 바뀐다는 것은…….’
케이든이 그 순간 받았던 스트레스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일단 바슈카에 가서 검사를 받자. 나도 세리엘하고 치료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아니, 지금 이대로가 좋아. 마야를 지킬 수 있다면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어.”
마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시로네가 표정을 고치더니 두 손을 들었다.
‘미라클 스트림.’
빛의 연기가 허공에서 2개로 뭉치더니 케이든과 마야의 머리에 스며들었다.
“허억!”
아가페의 빛이 마음에 깃들자 마야의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아…….”
시로네의 사랑이었다.
“당분간 감정병은 발현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조건이 있어. 마야와 케이든,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해.”
마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게. 아니,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해낼 거야.”
시로네의 앞에서 생기를 되찾은 마야의 모습에 케이든은 가슴이 쓰렸다.
‘나는 마야를 웃게 해 줄 수 없어.’
오른팔이 가만히 있는 이유는, 어쩌면 시로네를 질투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욕심부리지 말자.’
그녀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해서 운명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집착하면 마야는 위험해진다. 그녀를 무사히 지키는 것, 오직 그것만 생각하는 거야.’
개인적인 감정을 뒤로한 채 시로네 일행은 다음 임무를 향해 도시를 벗어났다.
“마야를 데리고 바슈카로 가. 왕성에 도착하면 내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동시 사건에 대해 설명을 들은 케이든이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말했다.
“걱정 마. 마야는 무사할 테니까.”
아마도 그럴 테지만, 시로네가 걱정하는 사람은 오히려 케이든이었다.
‘아직 밝힐 때가 아니야. 지금은 이대로가 좋겠지.’
적십자성의 운명, 그 율법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오메가의 역사가 말해 주고 있었다.
“그래. 수도에서 보자.”
운명에서 벗어난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 든 케이든이 마야를 데리고 공간 이동을 시전했다.
하늘로 휘어지는 섬광을 올려다보면서 에이미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잘됐어. 케이든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게 되다니.”
“…….”
차라리 마야를 포기했어야 한다는 말을, 시로네는 차마 하지 못했다.
끼이이이잉!
하늘 끝으로 멀어지던 공간 이동의 소음이 섬광을 타고 되돌아왔다.
“응?”
강렬하게 빛나는 눈빛을 인자한 얼굴에 감춘 노인이 뒷짐을 진 채 모습을 드러냈다.
“람파 씨.”
세계 최고의 정보 마법사 아놀드 람파였다.
“오대성이시여.”
수많은 안건을 처리하고 있는 그가 시로네와 에이미 파티를 찾은 이유는 하나였다.
“웨나 위저드를 찾았습니다.”
모태각성자로서, 하비츠에게 대항할 수 있는 순수성을 가진 유일한 인물.
“역시 살아 있었군요.”
“네. 지금은 스탕 왕국에 있습니다. 마도 10인회가 감시와 경계를 병행 중입니다.”
시스템감찰부의 1성급 주민은 무려 5명이고 똑같은 숫자의 위성이 있다.
이들을 마도 10인회라 부르며, 다른 별과 달리 프리드가 훈련을 통해 키운 자들이었다.
에이미가 말했다.
“드디어 본격적인 임무네요. 위저드는 어떤 아이예요? 여자아이 맞죠? 귀엽나요?”
“그게…….”
112년을 살아온 람파가 머릿속을 뒤져서 꺼낸 말은 단 두 마디였다.
“네, 뭐.”
신의 그림자(4)
***
스탕 왕국.
중부 대륙 최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마족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은 곳이기도 했다.
“원소 폭탄 프로젝트로 인해 지옥의 군대는 대부분 바슈카의 꽃밭으로 진입했었죠.”
람파의 말을 에이미가 받았다.
“그러다가 시로네의 빛에 세례를 받고 전부 남쪽으로 뿔뿔이 흩어졌죠.”
“네. 산탄처럼 남부 대륙을 강타. 하지만 남부 대륙은 중부 대륙처럼 국가가 밀집되어 있지 않은 데다 마족들도 숫자가 줄어든 상태라 재앙적인 피해는 면했습니다.”
시로네가 말했다.
“그리고 남부 대륙은…… 군단장의 마계가 열리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죠.”
페르미가 지배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하지만 중부 대륙의 스탕 왕국이야말로 전쟁터의 행운아죠. 마족들이 토르미아를 기점으로 퍼진 덕분에 서쪽에 있는 스탕 왕국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으로 차기 세계의 대권을 잡을 후보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말인즉슨, 조만간 열릴 성전에서 두각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부터 스탕 왕국입니다.”
시로네가 살피자 국경선을 따라 세워진 장벽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전쟁터의 행운아.’
멀쩡한 성벽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축복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동이 트기 전에 출발했고, 국경선을 넘었을 때는 아침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