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162
00162 [스물한 번째 역]인정 =========================================================================
1월 말에 일주일 정도 시간을 내기로 했다. 왕복하는 시간이 나흘 좀 더 걸리니, 이틀은 파르네세 공작저에 머물고 하루는 엘뷔니에 올라가는 김에 파블리아 저택에 들렀다 오기로 일정을 잡았다.
덕분에 헤젠의 얼굴만 퉁퉁 부었다. ‘아니, 클레아님도, 요헨 경께서도, 전부 가버리시면 여기 일이 마비가 되잖아요. 저더러 다 어떻게 감당하라는 겁니까?’ 리건은 무시했다. 사실 잘 들리지 않았다.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다시 금단현상이 시작된 것처럼 손이 떨렸다. 가기 싫다. 아, 진짜 가기 싫다. 그 집 사람들과 잠깐 마주치는 것도 아니고 이틀이나? 오후에 도착해 하룻밤만 묵고 이튿날 다시 파블리아 저택으로 갈 예정이라 실질적으로는 스물네 시간 정도 머물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틀이나?’ 생각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차라리 저녁 대접만 받고 파블리아 저택으로 일찍 떠나는게 어떨까 싶었지만 잉그리드가 실실 웃는 걸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클레아는 어떻게든 꿀리지 말아야 한다며 이때다 하고 옷감과 보석들을 사재기하기 시작했다. 미치겠네 진짜.
날짜가 다가올수록 리건은 한숨만 늘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래, 씨발, 어쩌겠나. 어차피 한 번쯤은 부딪쳐야 할 사람들이었다.
*
오지마라 오지마라 1월말아 오지마라 그렇게 수천 번을 빌었는데, 결국 왔다.
“어서 오세요.”
파르네세 공작저의 대식당. 먼저 문 앞에 서있던 파르네세 공작부인이 밀로아에서 올라온 초대객들을 향해 무릎만 살짝 굽혔다 펴 예의를 차렸다. 턱은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는다. 클레아도 입꼬리만 살짝 당겨 웃으며 가볍게 똑같은 예를 보였다. 잉그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부인.”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부인께 그런 칭찬을 들으니 부끄럽네요.”
잉그리드는 파르네세 공작부인의 뒤에 서있는 벤디트와 에드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웃으며 손을 슬며시 흔들어보였다. 벤디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까딱해준 것과 다르게 에드원은 여전히 토라졌다는 양 흥 고개를 돌렸다. 요헨과 벤디트가 잠깐 눈을 마주치고 표정을 굳혔다가 풀었다. 피차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두 가족이 만났으니 요헨도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리건이 뻣뻣하게 목례로 인사했다. 파르네세 공작부인은 우아한 눈길로 리건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번 스윽 훑은 후 가식처럼 보이는 미소를 지은 후 돌아섰다.
“피곤하셨을 텐데, 앉으시죠.”
리건은 그냥 파르네세 공작부인을 보자마자 이상하게 등줄기가 서늘해져 또 다른 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설마 오늘 내 뒤통수를 치려는 건 아니겠지.’ 파르네세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은 쉬이 꺼질 만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파르네세 공작저의 대식당에 차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온 신경이 상석 바로 옆에 앉은 파르네세 공작부인에게 쏠려 있어서 리건은 파르네세 공작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도 몰랐다.
곧 파르네세 공작이 뒤늦게야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 일이 있어 늦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리지요.”
파르네세 공작은 정중하게 사과로 시작했다. 클레아가 우아하게 웃으며 ‘저희야말로 바쁘신데 초대해주셔서 감사하지요.’하고 인사치레를 했다. 잉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파르네세 공작에게 예의바르게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펴 인사했다. 리건도 얼결에 일어섰다. 파르네세 공작은 아까 파르네세 공작부인이 그랬듯이 미묘한 시선으로 리건을 쭉 훑어본 후 의미모를 끄덕거림만 남기고 자리에 앉았다.
저녁식사에서 시작된 만남은 묘한 분위기로 지속되었다. 한때 그렇게 치열하게 다투었던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다고는 상상이 가지 않을만큼 차분했다. 클레아는 자연스럽게 파르네세 공작부인과 그간의 근황 등을 여상하게 떠들고 있었고, 파르네세 공작은 몇 마디 요헨과 리건에게 묻거나 할 뿐이었다. 벤디트는 원체 말을 가볍게 하지 않는 편이니 몇 마디 않았고, 에드원은 여전히 입이 대빨 나와있다.
리건은 그의 잔에 따라지려는 술을 습관처럼 거절했다.
“술 말고, 다른 마실만한 음료가 좋겠는데.”
하녀가 술병을 기울이려다 말고 물러났다. 에드원이 제 술잔을 들어 보이며 ‘여기 비었어.’하고 흔들었다. 하녀는 에드원의 술잔에 술을 채우고, 차례로 벤디트, 클레아, 잉그리드, 요헨의 술잔도 채웠다.
잉그리드는 몇 모금 마시다 말고 슬며시 잔을 밀어냈다. 그리곤 리건을 묘하게 웃음기 띤 눈으로 바라보았다.
건너편에 앉아있던 에드원이 ‘놀고들 있다니까 진짜.’ 중얼거리다 순식간에 사나워진 잉그리드의 도끼눈을 받았다.
파르네세 공작부인은 어느정도 식사가 무르익어갈 무렵 리건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동안 보내주셨던 것들은 어쩔 수 없이 성의만 받았습니다. 그저 받기에는 지나치게 과한 선물들이라.”
리건은 내심 울컥했다. 어쩔 수 없이 성의만 받았단다. 지나쳤단다. 하여간 말 포장하는 데에는 파르네세들을 따라갈 자들이 없을 것이다. 그가 애써 웃으며 ‘괜찮습니다.’하고 대꾸했다. 리건과 파르네세 공작부인을 번갈아 보던 잉그리드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어머니의 화가 풀렸나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 그 이상의 내막은 알지 못했다.
“선물이요?”
“아주, 정성스럽더군요. 에스펜서 공이 직접 챙기시지는 않았을 듯하지만.”
리건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갸웃하는 잉그리드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민망했다. 벤디트가 잉그리드와 리건의 표정을 번갈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에스펜서가에서 계속 뭔가가 도착하던데 말이야.”
“어머?”
“이쪽 염치도 있으니, 그리 과한 것들을 받지는 못했지만.”
잉그리드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다가, 비로소 리건이 사업상대들에게 보낸다고 했던 성의들이 되돌아왔던 것을 떠올렸다. 잉그리드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리건의 귀가 붉어져있었다. 잉그리드의 뺨에도 금세 홍조가 돌았다. 잉그리드는 테이블 아래로 슬그머니 리건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저절로 얼굴에 기쁨이 번졌다.
리건은 민망함을 애써 감추기 위해 꽉 잉그리드의 손을 쥐었다.
“뭐, 다음에는 조금 더 부담가지 않을 것들로 찾아 보내드리겠습니다. 또 거절하지는 마십시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체 하려니 땀이 난다.
*
식사가 끝난 그들은 파르네세 공작저의 응접실에 편안히 자리 잡았다. 밤이 짙어질 무렵이었다. 잉그리드는 창가에 서서 벤디트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클레아는 파르네세 공작부처와 ‘아이들이 아주 사이가 좋습니다.’ ‘그렇습니까.’ 하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아이들이란 리건과 잉그리드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요헨까지 자리를 비워서, 리건은 제 앞에 앉아 뻑뻑 기성품의 시가를 피워대는 에드원을 상대해야 했다. 벤디트는 그럭저럭 리건과 밀로아 일행의 방문을 반기는 듯했고, 파르네세 공작부처도 그다지 적대감이 없었는데 에드원만 꾸준했다.
‘진짜 이 새끼도 고집하나는.’
에드원은 흐트러진 금발을 정리하며 잉그리드와 닮은 보라색 눈동자를 리건에게 고정시켰다. 얄미울만큼 능청스럽게 묻는다.
“각하, 술 한 잔 하실래요?”
“됐습니다.”
“한 잔 하시죠. 오랜만에 만났는데, 우리 그래도 동기 아닌가.”
동갑내기에, 같이 로만뷔트 밤사교회에서 놀아났으니 동기라면 동기는 맞다. 그들끼리는 한때 동지의식도 있었다. 조금이지만. 솔직히 사업자리에서 예전에 한번 무너졌던 이후로 리건은 사업상대를 만날 때 쐐기부터 박고 들어간다. ‘술, 시가, 전부 않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불쾌할만도 하지만 이미 리건이 중독 치료를 받고 나왔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있어서, 웬만하면 그에게 권하는 사람이 없어 여태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리건은 휙 손을 저어냈다.
“됐고, 연기 저쪽으로 내쉬시죠. 에드원 파르네세 공자.”
“뭐 어때. 이거 약 든 것도 아닌데.”
아 짜증난다.
에드원이 턱을 괸채 능글능글 한 마디씩 할 때마다 리건은 정말 저 새끼를 족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왜 제게 저 지랄을 하는지를 알아 참을 뿐이었다. 중독자 새끼가 중독자로 살다 자빠져 뒈진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니 끝없이 의심하는 것이다. 사실 리건부터도 자신이 끊고도 이렇게 버틸 수 있을 거라고는 예전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터라 이해는 한다.
하지만 말이야.
리건이 느리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파르네세 공작부처와 클레아가 요헨과 리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언뜻 들렸다. 잉그리드는 벤디트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지게 하는지 그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소파 테이블을 가볍게 짚은 리건이 에드원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이리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막 술잔을 털어 넘긴 에드원이 비딱하게 그를 흘기다가 마지못한 것처럼 귀를 댔다. 리건이 웃음기를 머금은 음성으로 나직이 속삭였다.
“이 씨발 새끼야……”
“…….”
“사람 호구로 보는 거 작작 하랬지, 응? 네가 나를 믿고 못 믿고는 내 알 바 아니고, 거슬리니까 적당히 술 처마시고 자빠져 잠이나 자. 응?”
에드원이 와락 인상을 구기며 귀를 떼고 리건을 쏘아보았다. 리건은 여유롭게 소파에 등을 기대며 “왜 그러십니까, 공자?”하고 되물었다. 에드원은 솔직히 웃겼다. 이거 봐, 이거 봐, 이 새끼 변한 게 없다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끝까지 술잔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리건이 희한하기도 했다.
‘진짜 다 그만뒀나?’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취해 있을 때는 가식 따위 필요 없다는 듯 개새끼처럼 굴더니, 이제는 가식까지 떠는 개새끼가 된 거다.
얼마 후, 살짝 취기가 오른 것처럼 눈이 풀린 잉그리드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리건의 옆에 앉았다.
“에드 오빠, 리건 괴롭히는 거 아니지.”
“아니긴.”
“당연히 아니지.”
리건과 에드원이 동시에 상반된 대답을 했다. 잉그리드는 취한 게 분명한 듯이 평소보다 더 크게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리건은 잉그리드가 저렇게 많이 마신 걸 본 적이 없었다. 잉그리드는 평소 포도주 두세 잔 정도면 스스로 잔을 놓았다. 취한 걸 보는 것도 거의 처음이었다. 모처럼 방문한 친정이라고 정말 마음이 편해진 건가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밀로아에서도 이렇게 편하게 있어도 되는데.
“리건, 차만 마시면 좀 심심하겠다. 나도 이제 차 마실래요.”
“마음대로 놀아.”
“으응, 아냐, 오늘 좀 많이 마신 거 같아요. 벤 오빠랑만 네 잔이나 마셨어.”
양 뺨이 발간 잉그리드는 술에 취해서도 아주 자세가 반듯했는데, 리건은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린 채 턱을 괴고 그녀를 관찰했다. 몸에 밴 습관이란 게 이렇게나 대단하다 싶어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모두가 술에 조금씩 취해서 분위기는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리건은 혼자만 맨정신이었다. 그런 건 솔직히 아직도 좀 낯설었다.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도 그는 아직 자기 자신을 완전히 믿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술을 마시면 약 생각이 날 게 뻔하다. 약을 하는 자신을 생각을 하면 이제는 구역질이 난다. 재활치료소에 들어가기 직전 한 달과 들어간 후 두어 달을 거의 매일 먹은 것도 없이 토해댔던 것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잉그리드까지 포도주를 홀짝이니 입이 심심한 것도 사실이었다.
“있다가 내 방도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 뭐.”
어차피 하루 묵고 갈 생각이었으니 어련히 보겠거니, 리건은 건성으로 대꾸하며 코끝을 건드리는 술 향기를 음미했다. 잉그리드의 입술에서도 이런 향기가 날 것이다.
모두가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다. 리건은 이 명백한 충동과 아쉬움을 잉그리드의 입술을 핥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하지만 포도주 맛이 남은 잉그리드의 입술은, 잉그리드라서 더 달았다.
그도 모르게 잉그리드의 뺨을 당겨 조금 더 깊이 키스했다. 혀를 밀어 넣고, 입 안 구석구석 남은 술맛으로 충동을 달랬다.
잉그리드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다가 입술을 맞댄 채 웃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키스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는 것만 알아차렸다.
리건은 입술을 떼고 몸을 바로 세웠다. 에드원은 입을 떡 벌리고 있었고, 벤디트는 빨개진 잉그리드의 뺨을 보며 고개만 저었다. 파르네세 공작은 시가가 으스러져라 쥐고 있었다. ‘감히, 감히 내 딸을!’ 그런 표정이 역력해서 리건은 식은땀이 나는 걸 느꼈다. 클레아가 ‘저…… 뭐, 저렇게 사이가 좋……답니다. 이렇게 말하기도 참 민망하네요.’하며 이마를 짚는 게 보였다.
다들 곧 시선을 돌리고 못본 체 하는 데에 반해 파르네세 공작부인의 시선은 끝까지 리건에게 머물렀다.
“……그냥 못 본 체 해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이쪽도 좀 민망해서.”
파르네세 공작부인의 눈빛이 너무 긴장되어 리건이 먼저 저렇게 말해야 할 정도였다. 파르네세 공작부인은 리건의 허벅지를 콩콩 두드리며 ‘나 잠깐 바람쐬고 올래.’ 조잘거리는 취한 잉그리드에게 눈길을 한번 주었다. 곧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어떻게 저렇게 가면 같을 수가 있을까. 예전에 잉그리드가 포커판을 싹쓸이 할 적의 일이 생각났다. 잉그리드가 든 게 당최 무슨 패인지 모르겠다 싶을 때 그래도 잉그리드는 미소라도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하나 없이 고상하기만 한 파르네세 공작부인은 정말, 찍소리도 더하기 어려웠다.
“저도 일어나겠습니다.”
리건은 애써 잠기려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살짝 취한 잉그리드는 말이 많아졌다. 바람을 좀 쏘이더니 ‘나 가면 또 마실 거 같아서 가기 싫어.’하고 답지 않게 매달려 애교까지 부린다. 리건도 괜히 돌아가 파르네세 공작부처의 눈빛 공격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다. 잉그리드는 리건에게 자신의 방을 구경시켜 주겠다며 그를 잡아 끌었다.
잉그리드는 복도를 거니는 내내 이곳이 에드원의 방이고, 저쪽이 벤디트의 방과 서재가 있는 곳이라며 재잘거렸다. 리건은 잉그리드의 어깨를 가볍게 감싼 채로 무심히 어린 시절의 잉그리드가 뛰어다닐 모습을 상상하며 걸었다. 별로 상상이 가지 않지만, 가끔 보여주는 잉그리드의 요망함을 떠올리면, 진짜 그랬어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어 웃음이 났다.
방문 앞에는 한 평범한 하녀가 눈을 깜빡이며 서있었다. 잉그리드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야, 엘자, 인사해. 내 남편!’하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리건은 피식 웃으며 잉그리드의 머리칼을 슬며시 쓸었다. 한창 연회가 있을 거란 이야기에 잉그리드가 오늘 늦게나 돌아오겠거니 하고 마음 놓고 있던 엘자는 깜짝 놀라 리건에게 허리를 넙죽 숙였다. 리건은 고개만 까딱해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릴 때랑 똑같아요. 내가 결혼한 후에도 카펫이나 커튼 말고는 크게 바뀐 거 없이.”
어린 시절의 방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고급스럽고 깔끔하다는 게 첫인상이었다. 어릴 때부터 잉그리드는 이렇게 기품이 넘쳤나보다. 그런 취향으로 만든 게 아마도 파르네세 공작부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괜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되어 생각을 밀어 치웠다.
문을 닫고 들어섰다. 잉그리드는 구두를 벗고 슬리퍼를 갈아신더니 힘없이 침대에 몸을 던졌다.
“피곤해.”
리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조용한 방 안에 들어서니, 그제야 그럭저럭 마무리했다는 생각이 들어 신음이 나왔다. 목이 답답해 단추를 푸르고 답답한 겉옷을 벗어 눈에 보이는 의자 등걸이에 걸었다.
잉그리드의 냄새가 가득하다.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리건은 금방이라도 잠이 들 듯이 눈을 껌뻑대는 잉그리드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옆자리에 옆으로 팔배게를 해주며 누웠다.
“잘도 납죽납죽 마시더니.”
“오랜만에 우리 집에 왔잖아요, 좋은 걸. 리건이 엄마아빠 화를 다 풀어줬네.”
잉그리드가 기분 좋은 것처럼 리건의 뺨에 쪼옥 길게 입맞추었다. 리건은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잉그리드가 살짝 취한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귀엽지만, 더 귀엽다. 부산하게 흩어진 백금발을 슬며시 쓸었다. 머리가 아플까 싶어 핀을 빼내 협탁에 던졌다. 통 소리가 나며 떨어지자 잉그리드는 그게 뭐라고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의 단추를 하나하나 끌러냈다.
리건은 풀린 단추 안으로 요망하게 기어들어오는 잉그리드의 손 끝에 금세 흥분했다. 하지만 어쩐지 여기가 파르네세 공작저라는 생각이 들자 거북했다.
파르네세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천적이었다.
하지만 잉그리드와 길게, 짧게, 입술을 맞추고 혀를 섞는 동안 점차 이성은 잊혔다. 밖에 서있을 파르네세가의 하녀도 잊혔다. 리건은 금세 흥분해 잉그리드의 위로 엎드려 그녀의 드레스를 벗겨냈다. 잉그리드의 목덜미를 길게 혀로 핥아냈다. 잉그리드가 얕게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돌렸다. 더 해달라 아양을 떠는 것처럼 보여 목덜미와 귀 밑과 턱 구석구석을 혀로 핥고 빨았다.
드레스를 침대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 리건도 급히 제 상의를 벗어 젖혔다. 예전보다 훨씬 더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은 그의 몸을 잉그리드의 손끝이 보채듯 쓸었다. 바지까지 끌어내리는 데에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미자를 위해 자릅니다.)
엉덩이 근육이 뻐근히 당길만큼 깊이 파묻었다. 처음에는 이곳이 파르네세 공작저라는 생각에 거북스럽던 것이, 외려 그의 흥분을 더 부채질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번의 파정으로는 모자랐다. 잉그리드의 냄새로 가득한 곳에서, 잉그리드의 추억이 가득할 이 곳에 제 흔적을 남기는 것만 같았다.
“흣, 아, 더, 더요.”
잉그리드가 희고 가는 다리를 리건의 허벅지에 감아 당겼다. 리건은 엉덩이를 크게 뺐다가 내리찍듯 부딪쳤다. 잉그리드는 그녀의 다리 사이를 거세게 밀고 들어오는 묵직함에 신음하며 더욱 세게 리건을 끌어안았다. 들리는 것은 신음과 숨소리 뿐이었다. 리건의 허리짓이 점점 빨라졌다. 쩍쩍 들러붙는 것처럼 그의 것을 빨아대는 잉그리드의 속살에 리건이 욕지기를 씹어 뱉으려던 순간이었다.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문이 발칵 열렸다.
“야, 잉가, 어디 갔어. 너 방에……..”
리건은 그 순간 몸을 굳혔다. 놀랍게도 너무 놀라서 그대로 싸버렸는데, 한순간 그를 휩쓴 쾌감 끝에는 제가 파정했는지조차 잊고 말았다. 맨몸으로 잉그리드와 엉켜있는 리건을 멍하게 바라보던 에드원이 한참을 숨도 못쉬고 침묵했다.
잉그리드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숨을 할딱이다가, 허겁지겁 리건을 밀어내고 이불을 끌어 덮었다.
“야! 그렇게 함부로 들어오지 말랬잖아!”
오죽이나 놀랐는지 그녀답지 않게 앙칼지게 소리까지 질렀다. 에드원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양, 보라색의 눈동자를 멍청하게 깜빡거렸다. 잠깐 자리를 비웠던 엘자가 뒤늦게야 상황을 알아차리고 황망한 얼굴로 문 밖에서 고개만 숙였다.
리건은 그도 모르게 신음하며 얼굴을 쓸었다. 에드원의 저 병신 같은 표정이 웃기기도 하고, 이러고 있다 걸린 걸 저 촉새 같은 놈이 얼마나 떠들어댈까 싶어 당황스럽기도 하고. 아, 모르겠다. 씨발.
“어이, 에드원.”
“…….”
“잉가랑 나 부부거든.”
“……”
“너 그냥 좀, 아……”
그러나 에드원은 리건의 당혹한 말이 끝나기 전에 먼저 뻣뻣하게 뒤돌았다. 넋을 잃고 돌아가는 에드원의 어색한 걸음 뒤로 그의 중얼거림이 남았다.
“하…… 씨팔…… 왜 저에게 이런 좆같은 시련을 주십니까, 신이시여…… 내 동생의 섹스라이프는 관심 없습니다……씨팔…..씨팔…….”
잉그리드가 칭얼거리며 리건에게 얼굴을 묻었다. ‘아, 창피해요. 나 어떡해.’ 문을 잠그는 걸 잊은 건 피차 마찬가지였던지라 리건은 그저 헛웃을 뿐이었다.
에드원은 멍하니 복도를 걸었다.
그날 밤, 에드원은 잉그리드가 결혼했다는 것을 비로소 인정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