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49
00049 [열 번째 역] 장미손수건 =========================================================================
대니얼은 이튿날 아침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모양새로 눈을 떴다. 공벌레처럼 웅크린 채로 오들오들 찬 이슬을 맞으면서. 심지어 위치는 바로 연회 홀의 테라스였다. 그것도 혼자 정신을 차린 거면 모르겠는데, 세상 모르고 자다가 파블리아 저택의 하인의 눈에 띄어 깼다.
“남작님, 여기서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어…….어……. 아니, 아닌데?”
퍼뜩 몸을 튕겨 세운 대니얼이 휘휘 고개를 털었다. 숙취가 조금 남았는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대니얼 베이런의 지난 밤의 여정을 쫓아보겠다.
대니얼은 얄팍한 기회주의자다. 기회주의자라는 말은 달리 말해 얌체같다는 뜻과 엇비슷하다. 지난밤 그는 제인 백작과 아델의 다툼이 벌어지자마자 자리를 피하기로 결심했다. 리건의 상태를 보니 크건 작건 사고를 치리라는 직감이 있었던 탓이다.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 하기로 했다. 섣불리 말린다고 끼어들었다가 제인 백작의 미움이라도 샀다간 손해는 오롯이 제몫이 될 테니까. 아델에게 면목이 없기도 하고, 좀 뒤숭숭한 기분도 들고.
이 밤이 가기 전에 로만뷔트 밤사교회의 충실한 친구 하나를 잃을 것이다.
대니얼에게는 그렇게 ‘슬픔을 달래기 위해’라는 거창한 명목이 생겼다. 초대객들에게 개방된 2층 테라스에서 어느 남작가의 영양을 만난 건 그런 의미에서 운명이었다. 당연히 대니얼은 본능적으로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를 꼬시는 데에 세상을 걸었다. 그와 비슷한 지위의 남작가 출신인 주제에 오죽이나 콧대가 높던지. 대니얼은 콧웃음 치며 열심히 애교, 재롱을 떨었다. 그 아가씨가 ‘늦었으니 돌아갈게요.’하고 쌩하니 가버리기 전까지는 꽤 순조롭다고 믿었다.
아아, 인생무상이라지. 그의 불운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실패의 쓴맛을 헹궈내기 위한 새 술을 찾기 위해 연회홀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놀랍게도 그가 테라스에서 여자에게 알랑방귀를 뀌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아주 난장판이었다. 제인 백작과 아델은 사라졌고, 에스펜서 공작부인이 쓰러졌다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파르네세 공작이 나타났다. 그 판국에 아주, 매우, 심하게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한 리건이 약에 절어 파르네세 공작을 맞이했고.
다시 말하지만 대니얼은 기회주의자다. 권력자 친구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리건은 서자니까, 국왕 폐하의 총애가 떨어지면 끈 떨어진 연이 될 거고. 파르네세 공작을 비롯한 연회 홀의 인사들은 제대로 된 기반이 있는 권력자들이다. 끼어들었다간 리건의 편을 들어줘야 할 텐데, 그러기는 또 후환이 두렵고. 심상찮은 분위기에 심장이 쫄깃거릴 지경이라. ‘와, 진짜 좆망, 이번엔 헛물만 켰다.’하고 테라스 의자에 앉아 있었다. 깜빡 잠이든 것은 아마도 그 이후다.
이 망할놈의 저택 하인들은 주인을 닮아 게을러 터졌는지. 왜 지난밤에 테라스 정리를 않아서, 멀쩡한 사람 코 삐뚤어지게 밖에서 자게 내버려뒀대. 괜히 민망해 내심 투덜거렸다.
“저, 남작님?”
“…….아, 나가야지.”
코가 밍밍하다. 대니얼은 애써 당당한 체 턱을 치켜들었다. 혹시 저처럼 연회 홀에 남아 있을 사람이 있을까 싶어 엉망이 된 머리를 한 번 스윽 쓸어 눌러주는 정성도 보였다.
그런데 홀 안은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쌔했다. 하인과 하녀들만 분주했다. 지난밤의 열기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넋을 놓고 걷다 발 아래를 미처 확인하지 못한 대니얼이 무언가에 걸려 나자빠졌다.
모양 빠지게!
“아, 씨, 대체 무슨……!”
오뚝이처럼 발딱 일어선 대니얼이 얼굴이 붉어지려는 것을 애써 감추며 그의 발에 채인 무언가를 쏘아보았다. 한 1초 정도. 그 직후 대니얼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엥?’
다리가 두 개나 꺾여 뜯겨나간 피아노 의자였다. 하인이 황망해하며 재빠르게 치웠다. 피아노 의자가 왜 여기 있대? 대니얼은 고개를 돌려 피아노가 있던 낮은 단을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악사의 손끝을 통해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냈던 하얀 그랜드피아노가.
‘저거 뭐야?’
도저히 피아노라고 부를 수 없는 모양이 되어 있다. 산산조각난 나무 파편이 주위에 널려 있었다. 도자기 파편 같은 것들도 보였다. 위 뚜껑은 반대로 꺾여 딱지를 까뒤집은 게처럼 보였다. 다리와 이어진 콘솔이 부러져 몸체는 거의 기울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건반 한가운데가 뭔가에 작살이라도 난 것처럼 내려앉았다.
하인과 하녀들은 그 주변의 바닥을 집중적으로 쓸어 담는 중이었다. 하인들은 이제 피아노가 아닌 고철덩어리가 된 무언가를 어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클레아 부인이 화를 내실 텐데.’ ‘이걸 가져다 버리려면 두 명은 더 있어야 해.’ ‘어떡하지.’ 그런 말이 들렸다.
대니얼은 멍청하니 입을 벌렸다. 마지막에 보았던 것이 파르네세 공작과 리건의 대거리 장면이었는데. 설마 온 연회장을 부수면서 싸웠던 건 아니겠지? 그 못지않게 착잡한 표정을 하는 하인을 돌아보았다. 물어볼까? 말까. 물어볼까? 말까. 왠지 누구 하나 죽었다는 말이 돌아올까 싶어서 묻기도 두려웠다.
“…….무슨 일 있었나?”
하인은 주제넘게도 긴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게…….”
*
리건이 눈을 뜬 것은 이튿날 해가 거의 다 저문 초저녁이었다. 침실이 아닌 그의 서재 소파에서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데도 한참 걸렸다. 왜 이 서재에서 잠이 든 건지 모를 일이다. 헨슨이 덮어주고 간 건지 담요가 한 장 그의 몸을 덮고 있었다. 리건은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감싼 채로 소파 아래 목만 늘어뜨렸다.
어제 어떻게 되었더라.
지난 밤, 잉그리드를 두고 작은 방에서 나와 발롬을 섞은 술을 한 잔 들이킨 후로 완전히 기억이 나갔다. 해가 저문 것이 하루가 지났는지 이틀이 지났는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리건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던 것은 최장 26시간이다. 그 기록은 쉬이 깰 만한 게 아니니 대충 이튿날인가 보다.
손에 잡히는대로 종줄을 당겼다. 곧 헨슨이 찾아왔다.
“눈 뜨셨습니까?”
헨슨은 그와 달리 아주 정갈한 차림새였다. 리건은 훌륭한 그의 저택 관리인이 마음에 들었다.
“대충 연회 홀의 마무리는 다 되었습니다. 주인어른을 기다리던 스트라스 백작가의 영식들과 빌보인 경, 대니얼 베이런 남작님은 조금 전 막 떠나셨고, 도플라밍 백작 일가는 오늘 아침에 조만간 도플라밍 백작가의 연회에 각하와 부인께서 꼭 참석해주셨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드리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대니얼? 중간에 귀에 익은 이름이 있었지만 알은체 하지 않았다. 그럴 정신도 없었다. 어제 입었던 연회복 그대로 누운 리건은 말 그대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리건은 숙취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끔찍한 신음을 했다. 헨슨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녀를 들여 꿀을 탄 따뜻한 차를 소파 앞 테이블에 세팅했다.
꿀차 냄새조차도 역하게 느껴졌다.
“치워.”
“속이 좋지 않으실 텐데요.”
“그래도.”
“눈 뜨시면 내어드리라 부인께서 지시하셨습니다.”
리건이 입술을 다물었다. 마지막 기억이 잉그리드가 앓고 있던 방에서 나온 기억이었다. 뭐라고 했더라.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 그런 얘기를 들었다.
그 별 것 아닌 말이 이상하게 충격적이라서 술 한 잔, 약 한 스푼을 하고…….
‘이렇게 됐지.’
리건이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켜 앉혔다가, 허리를 세우고 버틸 기운조차 없다는 듯 소파에 다시 푹 기대고 물었다.
“……잉그리드는?”
“열은 많이 떨어지셨습니다. 하지만 거동이 편한 정도는 아니신지라 연회 뒷마무리는 일단 제가 대신 지시하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일어나셨으니 이제는……”
“그냥 끝까지 네가 해. 특별한 거 없으면 나한테 따로 보고 할 필요도 없어.”
“알겠습니다.”
리건은 소파테이블 위 화분에 미지근한 꿀물을 그대로 쏟아버린 후 빈 물잔을 내밀었다. 헨슨이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풀며 따뜻한 맹물을 부어주었다. 리건은 아직 단맛이 남은 잔 안의 물을 남김없이 들이킨 후 길게 숨을 끌어냈다.
“몇 시간?”
“열일곱 시간 주무셨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이모양이군.
소파에서 불편하게 뻗어 잔 탓인지 허리도 아팠다. 요 근래 몹시 쓸모 없어진 허리지만 그래도 어딘가 아프다는 건 늘 짜증나는 법이다. 리건이 흘러내린 담요를 홱 던지듯 떨어뜨렸다.
“이딴 거 덮어줄 정신에 그냥 방에 옮겨 놓을 생각은 않았나? 헨슨.”
“생각을 하셨는지 안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뭐?”
“제가 해드린 게 아닙니다.”
무뚝뚝한 헨슨의 대답에 리건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이라는 반문이 목구멍에 걸렸다. 이상하게 이런 부분에선 촉이 좋았던지라. 아니 이 부분에서는 촉이라 할 것도 필요 없었다. 헨슨이 높여 말하는 사람은 이 저택에서는 그와 잉그리드 뿐이다.
“부인께서 오후에 잠깐 들르셨습니다.”
“……그거 거동 불편하다며?”
“거동 못하신다고 안 했는데요.”
“이제 말대꾸까지 하나? 잉그리드가 내 저택의 하인들까지 죄 망쳐놓는 것 같은데.”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지금 뭐 불만있어?”
리건은 헨슨에게는 관대한 편이었다. 오랫동안 헨슨과 함께 지내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신뢰감도 있었다.
헨슨은 늘 묵묵하게 그의 할 일에 충실했다. 그 점을 가장 높이 산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늘 그는 불만이 많아보였다. 저런 식으로 그에게 말대꾸를 하는 건 처음이라.
헨슨이 베스트 안쪽에 접어두었던 종이 세 장을 좌라락 꺼내 펼쳤다.
“지난밤 벌어진 참담한 일 때문에 좋지 않은 시국에도 정신잃고 쓰러져 눈 뜨실 생각을 않는 주인어른을 대신해 미욱한 제가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친애하는 파르네세 공작 각하. 앞서, 에스펜서의 연회에 참석해주신 데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밤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하여는 가슴 깊이 사죄를 드리는 바입니다. 부디 폐하께는 이르지 말아주십시오. 이게 첫 번째.”
“……?”
“친애하는 파르네세 가문의, 장인어른께. 지난 밤 연회에 참석해주신 데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안사람도 직접 뵙지 못한 데에 큰 아쉬움을 표하는 바입니다. 연회 도중 도를 지나친 저의……..”
이거 무슨 소리냐?
리건은 무뚝뚝하게 전혀, 1도 이해가 가지 않는 글귀들을 낭송하는 헨슨을 미친놈 보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헨슨은 도리어 그런 그를 향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받아쳤을 뿐이다.
“기억 안나신다 하실 테지요.”
헨슨이 능숙한 손길로 종이를 사각사각 둘둘 말아 다시 품 안에 넣었다. 감쪽같았다. 리건은 도대체 왜 파르네세의 이름이 나오는지조차 감을 잡지 못했다.
“지금 무슨 소리야. 그건 뭐냐.”
“어디부터 기억이 안나십니까?”
좋지 않은 예감이 들기 시작한다.
“……잉그리드가 깨어나고, 작은 방에서 나온 후로.”
“파르네세 공작에게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긴 했지만 사람들이 보는 데서 연회석 의자를 집어 던지신 건 기억나십니까? 아, 물론, 그 일을 치기 전에도 정신은 있으셨는지 대부분의 참석객들은 돌려보내신 후였습니다. 일단은.”
“…….”
“후에 연회장 피아노와 테이블들을 다 때려 부수신 것 기억하십니까?”
헨슨이 그 광경을 본 것은 헥트르를 돌려보내고 난 후,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리건에게 ‘헥트르 에이버리가 돌아갔습니다.’라는 보고를 남긴 후였다. 가만히 듣던 리건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꼴로 연회 홀로 내려가더니,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눈빛으로 피아노를 노려보다가 전부 때려 부쉈다.
그 덕에 아침 댓바람부터 놀란 하녀하인들이 난리가 났다.
솔직히 지난 몇 달간 리건의 취한 후의 버릇이 몹시 안 좋아졌다. 혼자 취해 쓰러진다면 차라리 나은데, 다 때려부수는 버릇은 대체 어디서 배워 온 건가. 아무래도 대니얼 베이런같은 천것과 어울려서 그런 것 같다. 헨슨은 오늘 아침에 테라스에서 자다 발견됐다는 대니얼의 소식을 떠올리며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리건은 본인의 폭력성에 반성하는 기색은커녕, 얼토당토 않은 부분에 놀란 표정을 했다.
“내가 그 헥트르 에이버리 새끼랑 잉그리드를 만나게 했다고?”
저 대목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건만, 리건에게 저 대목이 가장 중요하게 느껴졌다는 건 헨슨에게는 의외였다. 헨슨이 예상했던 리건의 반응은 ‘파르네세 공작이 왔다고?’ 정도다.
“예, 제게 그 자리를 지키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아무래도 주인어른께서 근래에 많이 힘드신 듯하고, 지난 밤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사과가 있어야 하는 상황이니 정신이 드시거든 우선 파르네세 공작 각하와 도플라밍 백작가와 스트라스 백작가와…….”
“……그 새끼랑, 잉그리드가 단 둘이 만났다고?”
헨슨은 결국 말을 멈추고 한숨을 삼켰다.
‘……흐음.’
대충 감이 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부부간의 사정에야 참견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일단 헨슨은 잉그리드와 헥트르의 모든 상황을 공기처럼 지켜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리건의 명령이 없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귀한 공작부인을 출신조차 불분명한 평민 남자와 단 둘이 한 방에 가둬둘 수는 없었을 테니까.
잉그리드는 한참을 울었다. 잉그리드가 평민인 헥트르에게 건네는 사과는 헨슨까지 찡하게 했다. 헥트르 에이버리에게는 미안하지만 정말로 좋은 안주인을 얻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헨슨은 어쩌면 공작부인의 치부가 될 지도 모르는 그 일을 영영 묻어 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잉그리드가 진정하고 난 후 헥트르 에이버리와 잉그리드는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에는 잉그리드의 이런 고백도 있었다.
‘리건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저를 미워해서 선생님이 상처입기를 바라는 것뿐이에요. 선생님을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아, 부인, 이유불문 그런 놈이 나쁜 놈인 겁니다. 리건이 그의 주인이 아니었다면 헨슨은 진지하게 잉그리드를 붙잡고 그런 충고를 늘어놓았을 것이다. 단순히 리건을 나쁜 사람이라 치부하기에는 헨슨이 리건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게 흠이었다.
헨슨은 노련하다. 헨슨이 보기에는 리건은 지난 밤 헥트르 에이버리에게 질투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단순히 심증이었는데, 오늘 집요하게 잉그리드와 헥트르 에이버리에 대해 묻는 걸 보니 슬슬 확신이 든다.
좋아하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미워서 그런 게 아니란 것쯤은 손바닥처럼 보였다. 리건이 아무리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는 닳고 단 청년이라 해도 고작 스물두 살이다.
“……그래? 그랬다고.”
“예.”
“……그랬냐고.”
봐라.
잉그리드와 헥트르 에이버리가 단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보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이면서도, 본인이 저지른 짓이 있어 묻지 못하는 저 최소한의 희박한 양심을. 주인어른에게 희박하나마 양심이란 게 남아있다는 건 아랫사람으로써는 몹시 감동적인 일이다.
솔직히 잉그리드와 리건의 결혼의 이유라거나 하는 것은 정치인이 아닌 헨슨과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파블리아 저택 내에서 벌어지는 –심지어 그 결과가 자꾸만 기물파손으로 이어진다면- 사건들에 대해서는 충분히 의견 개진을 할 수 있다.
“부인께서는 정말 훌륭한 분이시더군요.”
“…….”
“헥트르 에이버리와의 인연을 잘 맺음하셨습니다. 헥트르 에이버리도 떠나기 전 주인 어른께 감사한다는 말을 전해 달라했습니다.”
“맺음했다니?”
“외람되지만 염려하실 일은 전연 없을 듯합니다.”
“염려? 내가 무슨 염려를 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건의 아직 숙취가 남아 충혈 된 눈동자는 ‘더 자세히, 더 자세히 말 해!’를 외친다. 하지만 헨슨은 능숙한 집사답게 유유히 쳐냈다.
“…….그나저나 부인께서는 주인어른께서 일어나시면 찾아주셨으면 한다셨는데요.”
“그게 끝이냐?”
“…….뭐 듣고 싶으신 특정한 이야기가 있으십니까? 필요한 이야기는 전달해 드렸습니다만 달리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능청스러운 헨슨의 대꾸에 리건은 애매한 표정이었다.
짜증이 난 것도 같고, 안도한 것도 같고, 울컥한 것도 같은.
“됐어, 그리고 누구더러 오라가라냐, 아쉬우면 그쪽이 오라고 해.”
“아직 환자십니다만.”
“거동 못하는 거 아니라더니?”
리건이 힘껏 비웃었지만 헨슨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러면 무리해서라도 이쪽으로 모시지요. 오지 않으시겠다 하면 모릅니다.”
떠보는 듯한 투라는 걸 눈치 채지 못할 리건이 아니었다. 아직 정신이 맑게 돌아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자꾸 휘말려드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가 전부다. 분노는 일지 않았다. 솔직히 그는 지금 자신의 기분을 잘 모르겠다.
리건이 더듬더듬 시가를 찾았다. 기분이 풀어지는 것도 같고, 감질나게 말을 하다 마는 헨슨 때문에 더 짜증이 나는 것도 같다. 결론적으로 잉그리드가 헥트르와 붙어먹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말인데.
“그리고 저녁에는 확실히 사과 공문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폐하의 귀에 지난밤 일의 이야기가 들어가면 곤란해지시는 건 주인어른이십니다.”
파르네세. 아, 잊었던 것이 또 하나 떠올랐다.
“진짜 그 자가 왔다고.”
“예.”
파르네세 공작이 왔었다고? 뒤늦게 수치심과 모멸감이 들었다. 제가 무슨 짓을 했나. 오죽 개판이었으면 헨슨이 저런 말도 안 되는 사과 문구까지 써놓았을까.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상상하기도 싫었다. 껍껍하다.
불도 붙이지 않은 시가를 물고 답했다.
“일단은 알겠다.”
“식사 준비는.”
“안 먹어.”
“이미 부인께서 속에 편한 것으로 준비해두라 지시하셨는데요.”
지난 두 명의 부인들은 이런 식으로 소소한 일상까지 규제하려 든 적이 없어 당황스럽다. 잠깐 주춤했던 리건이 씹어 뱉었다.
“됐다고.”
“알겠습니다.”
그 와중에도 순순히 몸이 일어나 잉그리드가 있을 침실로 향하고 있다.
자존심이 상하는데 그쪽에서 먼저 보자고 했다니 굳이 제 자존심이 상할 일인가 싶기도 하고, 지난 밤 꼴이 그랬는데 오늘은 좀 말짱해졌는지도 궁금하고…… 지금 내가 무슨 생각 중인가 싶고…….
인생의 답을 찾아 헤매며 산 기억은 없다.
하지만 지금만큼 명확하게 답이 보인 적도 없다.
지금 자신의 언행불일치가 답이 없다는 게 답이다.
============================ 작품 후기 ============================
[안내방송]
오랜만에 뵙습니다. 흰사슴호 승객분들.
본 기장은 아직 충전중입니다. 지난 질주 당시 기장이 무직의 백조라 생각하는 분들이 많으셨을 듯합니다만 아닙니다. 기장은 지금 기차 밖의 인생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
그런데 왜 오늘 본 기장이 이렇게 나타났느냐.
지난 역 마지막 정거장의 ‘고객의 소리’란에서 계속 기웃기웃하며 기장을 찾아주시는 승객분들이 귀여워서가 첫번째요, 매 역이 끝날 때마다 예고편처럼 날렸던 다음역 팸플릿을 제공하는 걸 깜빡 했다는 사실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이번 역은 ‘장미손수건’, ‘장미손수건’역입니다.
오늘도 흰사슴호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