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60
00060 [열두 번째 역] 다시 한 걸음 =========================================================================
파블리아 저택.
저택으로 되돌아온 리건은 바로 간단히 몸을 씻고 나왔다. 잉그리드는 칼로아 델가드와 그녀의 아이와 함께 후원에서 산책을 하고 들어온 참이었다. 잉그리드의 품에 아이가 안겨 있다. 그새 정이라도 든 건지 뺨을 비비거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주는 행동도 서슴없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서있던 리건은 잉그리드의 동선을 무의식적으로 좇다가, 헨슨으로부터 보고받았다. ‘오늘 아침부터 헤젠 씨가 방문해 계십니다.’ 헤젠은 의외로 성질머리가 급한 구석이 있다. 섀디를 만나고 온 일에 대해 들으려는 것일 터다. 리건은 잉그리드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계단을 올라갔다.
“섀디 제노스가, 아, 들은 적 있습니다. 에드원 파르네세를 밤사교회원으로 추천했던 게 랜든 크리스퍼였는데 랜든 크리스퍼는 섀디 제노스를 통해 에드원 파르네세를 알게 되었다고.”
“네가 어떻게 알아?”
“스렌타인사 주간지에 뜨는 영식들의 기사가 각하의 것뿐인 줄 아십니까?”
헤젠이 비식비식 비웃었다. 리건으로부터 ‘약속은 받았다.’라는 짤막한 대답을 들은 후에는 퍽 안심한 기색이다.
“제노스가의 아들이 꿈이 컸네요.”
“스토커가 따로 없더군.”
“스토킹을 하고 다닐 것 같지는 않은 분인데.”
“잉그리드가 평소 뭘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따위를 소름끼치게 읊어대던 걸.”
술잔을 입술로 가져간 리건이 의자의 등받이에 깊이 등을 기댔다. 목욕 후인지라 그런지 나른하게 술기운이 돌았다. 헤젠이 슬며시 턱을 당기며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게 왜 스토킹인데요?”
“그러면 아니냐?”
“저도 압니다만? 잉그리드 양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많습니다. 예전에는 로열 시리즈의 주간지에서 잉그리드 양에 대해서만 다룬 적도 있었죠. 작년, 세베루스와 혼담이 오가기 시작할 때 스렌타인사에서도 아예 한 면을 통째로 잉그리드 양에 대해서 기사를 냈던 것 모르십니까? 스렌타인사 주간지의 한 면이 인물 설명으로 도배되는 일은 거의 드문데도 불구하고요.”
리건이 반쯤 빈 술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잉그리드에 대해 네가 뭘 아는데.”
“틴셀타운 출생, 각종 악기를 다루는 능력이 매우 출중하고, 문학적으로도 충분한 교양을 쌓으셨고, 데뷔 이래 3년 내리 엘뷔니 디어로 칭송받았으며, 좋아하는 저자는 와이더스 와일더. 예전에 아예 와이더스의 저서 한 권을 통째로 외웠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그냥 왈츠보다도 비에니즈 왈츠를 더 좋아한다 들었습니다. 의외인 것 같기도 하지만, 잉그리드 양의 성격을 생각하면 의외로 경쾌한 무도회 춤도 어울리죠. 그 얼굴에, 그 몸매에 뭔들 안 어울릴까만은…….”
헤젠이 잉그리드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실토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 놈도 미친 새끼인가 싶었다. 왜 저렇게 잉그리드에 대해 아는 놈들이 많은 거지? 현기증이 날 것 같다. 지난밤의 2막이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리건은 시가 끝을 깎아 불을 붙이며 신경질적으로 말을 잘랐다.
“난 좀 쉴 테니, 나가.”
아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 밖에서 잉그리드와 칼로아의 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리건은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쓸어 문지르며 뻑뻑 연기만 들이켰다.
*
그 날, 잉그리드는 밤늦게까지 칼로아와 어울리다가 리건이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랐을 무렵에야 침실로 돌아왔다. 얇게 펄럭이는 하얀 침의를 입은 잉그리드는 그 자체로도 꾸민 듯 아름다웠다. 침대에 비딱하게 옆얼굴을 배고 누워있던 리건은 어쩔 수 없이 섀디의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를 마주보고 옆으로 돌아 누운 잉그리드가 반달처럼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봐요?”
다른 새끼들이 잉그리드와 그렇고 그런 관계를 가지는 상상을 하며 무슨 짓을 할지 어찌 알아. 정수리 끝이 쭈삣거릴만큼 커다란 짜증이 일었다.
얼굴 예쁜 거야, 잉그리드를 싫어할 때도 인정은 했다. 그렇다고 지금 뭐 저 얼굴에 목 맬 만큼 좋다는 건 아니고, 지금은 나쁘지 않은 정도보다 조금 더 마음에 드는 느낌…… 같이 있으면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것도 그렇고, 좋을 때도 있고……. 아 씨발. 더 생각했다가는 자가당착에 빠질 것 같았다. 관두자.
“넌 왜 그 모양으로 생겨서.”
“……네?”
고개를 갸우뚱하며 무슨 말이냔 듯 커다란 눈을 깜빡거린다.
“됐어.”
리건은 그동안 많이 참았다. 닷새 정도지만 그 정도면 많이 참은 것이다. 잉그리드의 허리를 어루만지는 체 하다가 슬슬 옷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맨 살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먼저 그에게 안착하겠다 했던 여자였다. 다른 놈들이 못 가져서 안달이라는 이 여자의 속살을 이렇게 더듬어댈 수 있는 건 그가 유일했다. 생각하자 기묘한 희열까지 느껴졌다. 그동안 엘뷔니 디어를 쟁취했다며 그에게 질시의 말을 던져대던 녀석들의 말이 오늘처럼 크게 와닿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섀디 제노스같은 놈마저 이 여자에게 빠져든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섀디 제노스를 아나?”
“이름은 들어본 것도 같은데, 누구예요?”
승리자가 된 기분이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보드라운 손끝이 그녀의 허리를 어루만지고 봉긋한 가슴께로 기어올라갔다. 말랑한 살결을 당장이라도 입술로 물어 빨고 싶은 충동에 리건이 상체를 들어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잉그리드가 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내렸다.
“리건, 저…… 오늘은 싫어요.”
리건의 미간이 좁아졌다.
며칠 만에 한 침대에 누웠는데, 빌어먹게 예쁜 얼굴 들이대면서 흥분하게 해놓고서 거절이라니. 리건은 무시하고 잉그리드의 입술에 키스했다. 잉그리드는 밀려드는 그의 키스를 응수해주는가 싶더니 고개를 떼어내며 입술을 오므렸다. 절레절레 저었다.
잉그리드가 그를 거절한 건 처음이었다. 리건은 솔직히 많이 당황했다. 거절이라니? 짜증에 가까운 분노가 쭈삣 솟아났다. 그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잉그리드를 용납할 수 없었다. 잉그리드의 뺨을 쥐어 당겨 물었다.
“왜?”
그녀가 유일하게 먼저 요구했던 키스까지 거부했다. 잉그리드는 눈동자만 내려 기어코 리건의 눈을 피한 채 침묵했다. 어쩐지 곤란한 표정인 것도 같았고, 불편한 얼굴인 것도 같았다. 그에게 붙잡힌 잉그리드의 뺨이 뜨끈해졌다.
“피곤해서…… 오늘 칼로아랑 하루 종일 너무 돌아다녔더니, 피곤해서요……”
잉그리드가 조심스럽게 말하며 리건의 손목에 손을 올렸다. 놔주세요.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정말로 노곤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리건은 가까스로 이성을 찾았다. 피곤하다면 납득할 수 있었다. 잉그리드의 얼굴이 평소보다 창백한 것도 같았다. 하루 종일 그 눈치 없이 파블리아 저택에서 버티는 짜증나는 계집과 분주히 시간을 보냈다면 피곤할 수도.
그럼에도, 그녀에게 거절당했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갈피를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리건은 신경질적으로 잉그리드를 놓고 등 돌려 누웠다. 잉그리드의 손이 그의 등허리를 감싸 안으며 어루만졌다.
“화난 거 아니죠?”
리건은 제 배 근처를 맴도는 잉그리드의 손목을 밀어냈다.
“그럴 리가.”
지독히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속 어딘가가 딱딱하게 뭉친 기분이었다.
무슨 느낌인지 표현할 길이 없다.
잉그리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리건의 뒷덜미에 가볍게 입 맞춘 후 속삭였다. ‘잘 자요.’ 다정한 목소리에 뭉친 것이 조금 녹았다. 가슴이 쿵쾅거리는데 정의할 수 있는 단어를 고를 수가 없다.
*
잉그리드는 늘 리건보다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다.
아니, 리건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활 습관과 비교해 늦게 일어나는 편이라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오늘 잉그리드는 오전 열 시가 넘도록 침대를 떠나지 않은 채였다.
곤히 잠든 잉그리드가 잠결처럼 리건의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물푸레 향기에 리건은 잠에서 깼다. 흐트러진 백금발이 잉그리드의 뺨 위로 걸려 있었다. 아기처럼 곱게 잠든 모습에 리건은 지난밤의 욕망을 고스란히 이어 느꼈다. 아침부터 건강한 그의 것이 눈앞의 잉그리드를 욕심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리건이 잉그리드를 조금 밀어냈다.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인기척에 잉그리드가 깨어났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잉그리드는 반사적인 속도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약한 보조개가 팬 것 같다.
리건은 그 사실을 처음 자각했다. 그는 잉그리드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이 없다.
“일어났네요.”
잠긴 목소리도 귀엽고 우아했다.
고개를 기울인 리건은 가볍게 잉그리드의 입술을 물었다 놓고, 물었다 놓으며 키스했다. 잠에 취한 것처럼 멈칫하던 잉그리드가 곧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여느 때보다 더 격렬한 키스였다.
리건은 금세 폐부가 빠르게 팽창하는 것을 느꼈다. 으음. 잉그리드의 입술 사이의 신음조차 아까워 더 세게 빨아 핥았다. 희고 가는, 사슴같은 목덜미에 길게 키스하며 핥아내렸다. 잉그리드도 조금씩 흥분하는 것처럼 호흡 소리가 달라졌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리건이 숨을 가쁘게 내쉬며 잉그리드의 위로 엎드리듯 올라탔다. 그대로 그녀의 허벅지를 벌리려는 순간이었다.
잉그리드가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일으켜 몸을 피했다.
“지금은, 좀.”
또 거절이었다.
“……싫어요.”
리건은 이쯤 되니 이해가 힘들었다. 어제는 키스조차 거절하기에 내키지 않나보다 했다. 그런데 조금 전에는 그게 아니었잖아. 지금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뭐냐.”
잉그리드는 발갛게 상기된 뺨을 매만지며 입술만 잘근잘근 물었다. 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라도 알려줘야 할 것 아닌가. 리건은 수시로 가슴팍이 졸리는 것 같은 환각에 시트만 꽉 쥐었다 폈다. 리건의 눈은 오직 잉그리드의 입술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저…… 그게.”
잉그리드가 무어라 입술을 떼려던 찰나였다.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잉그리드는 미꾸라지보다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일어났어, 들어와. 곧 하녀가 들어와 말했다.
“델가드 백작부인께서는 아까 일어나 기다리고 계세요, 부인.”
“어머,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금방 나갈게.”
냉큼 침대에서 일어나버리는 잉그리드를 바라보는 리건은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었다. 손에 집히는 걸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잉그리드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덩그러니 남은 리건은 날뛰려는 부정적인 감상을 가까스로 짓눌렀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해저물녘의 그림자처럼 길고 짙은 불안이 들러붙었다. 욕지거리를 삭이며 일어나 시가를 물었다.
이딴 걸로 아침부터 속을 달래는 제 꼴이 기가 막힌다.
왜지. 왜지. 왜 거절하는 거지.
*
분이 치밀었지만 갈무리했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키스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으니까 이유가 있겠지. 씨발, 구차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리건은 대충 편한 셔츠와 바지만 걸치고 방을 벗어났다. 얼마간 복도를 가로지르는데 잉그리드와 칼로아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공교롭게도 리건이 향하던 방향이었다. 복도의 곁방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쟁- 쟁- 날붙이가 도자기를 때리는 것 같은 퉁명한 소리도 울렸다.
“너 그만 못 하니?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게?”
“꺄하핫? 어엄마!”
“그 포크 내놓아, 그렇지 않으면 이빨 빠진 램비가 밤에 잡아먹으러 올 거야.”
“시더!”
문은 반 정도 열려 있었다. 리건은 걸음을 늦추고 벽 근처로 가까이 섰다. 어째서인지 걸음을 멈추고 엿듣는 품새가 되었다. 엿듣는 게 무례건 아니건 리건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제 집에서 나는 소리를 집 주인이 듣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포크를 들고 차받침을 두드리는 론을 꾸짖는 칼로아와 그녀를 말리는 잉그리드가 있었다.
목소리는 계속 흘러나왔다.
“그냥 둬. 깨는 것도 아닌 걸.”
“아니, 그래도 자꾸만 저렇게 아무거나 두드리는데 버릇이야.”
“아이들은 다 그렇지 않아?”
“버릇은 처음부터 잡아줘야지. 뭐, 그래도 가만히 보다보면 얘가 음악쪽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 재능도 있는 거 알아?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치더라니까?”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댄 리건은 노골적으로 입매를 당겨 웃으며 조롱했다. 개나 소나 지 새끼가 최고라고 떠드는 건 만국 공통인가. 그의 어미니인 클레아만 해도 리건이 인성 빼면 완벽한 아들이라는 양 헛소리를 떠들고 다니는 걸 보면 맞는 말인 것 같다. 그 인성 하나가 제일 커다란 문제란 건 모르쇠하고 그를 자랑거리 삼으려 할 때면 정말로 역겹다. 그래서 일부러 더 좆같이 굴었던 때도 있었다.
“어머, 정말? 대단한데?”
잉그리드는 참, 저럴 때는 답답할 정도다. 고작 두 살 남짓의 애새끼가 하면 뭘 한다고 저렇게 상냥하게 받아주는지.
“그리고 연주 소리 나면 막 박수도 치고 그러더라니까. 얘 아빠가 얼마 전에 성악가 하나를 성으로 초빙했었는데 흥얼흥얼대기도 하고……”
“론이 널 닮았네? 너도 듣는 쪽으로 더 전문가잖아.”
“잉가, 그렇지? 그래서 걱정이야. 난 의젓한 사내아이가 됐으면 좋겠단 말이야. 물론, 예술적인 소양도 겸비하면 좋지만.”
리건은 팔짱을 끼고 있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며 헛웃었다.
저렇게 욕심이 많아서 쓰나. 부모들은 제 자식들이 쓰레기로만 자라지 않아도 감지덕지해야 한다. 혹은 그 쓰레기들에게 조롱당하는 호구 병신으로 자라지 않는 것만으로도. 적어도 리건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어 흘러나온 목소리에 리건은 그도 모르게 팔짱을 풀었다.
“칼로아, 저쪽에 피아노 있는데 갈래? 론이 피아노 치는 것도 보고 싶은데, 귀엽겠다.”
“아직 시간 좀 남았으니까 그럼 그럴까? 잉가, 오랜만에 네 피아노 연주도 듣고 싶다!”
잉그리드가 말하는 피아노는 일주일 전 있었던 연회장에서 그가 때려부쉈다. 기억은 안 나지만 그가 때려 부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