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53
00753 170. 파문 =========================
곧바로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엘리시온에서 여신들을 끼고 보란 듯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형진에게 신들이 몰려들었다.
“사실입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물벼룩과 클로렐라님은 이제 어엿한 교단을 갖춘 신이 되셨지요.”
“세, 세상에.”
새삼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듯한 형진의 말에 잡신들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일전에 신들을 대거 인턴으로 받아들였을 때 많은 이들이 뒤늦게 아쉬움을 삼켰다. 처음 오디션을 벌였을 때 엄격한 심사를 거쳤던 것과는 다르게, 거의 무조건에 가까울 정도로 응시자들을 받아들였던 탓이다. 어차피 응시해봐야 떨어질 거라는 생각에 속으로만 아쉬움을 삼키고 있던 신들에게 있어, 이번 일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저… 죄송합니다만… 새로 인턴을 뽑지는 않으십니까?”
“글쎄요.”
이전과는 입장이 또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아직 신격조차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반쪽짜리 신이라고 그를 폄하하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이제 형진은 그럴 생각만 있다면, 물벼룩과 클로렐라 같은 신에게도 어엿한 교단을 만들어줄 수 있는 능력자이다. 아바타를 구할 능력조차 없는 잡신들에게 있어 그는 이미 대신 이상의 존재감을 가진 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일전에 인턴을 너무 많이 받아들인 탓에 당장은 저도 여유가 없습니다.”
형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역시 어렵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잡신들도 아 그렇구나 하고 물러가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
“뭔가 방법이 없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시간의 흐름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는 엘리시온에 처박혀 있고 싶은 신이 있었겠는가. 자신의 신격이 지닌 한계를 생각해 감히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그런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의 신이 실로 입신양명 금의환향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일을 이루어 냈다.
자존심을 조금 굽혀서 자신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그럴 각오를 다져야만 한다. 늦으면 늦을수록 선발 주자와의 격차는 벌어질 수밖에 없고, 지금과 같은 기회가 언제 또 다시 찾아올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글쎄요…”
하지만 형진은 여전히 난색을 표하더니, 이내 바쁜 일이 생겼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깜빡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올라 버렸습니다. 일단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를 나누도록 하죠.”
“자, 잠시만!”
잡신들이 얼른 일어났지만, 어느 틈엔가 형진의 모습은 엘리시온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 뒤다.
눈치가 아무리 없어도, 이쯤 되면 형진이 갑작스런 잡신들의 난입과 부탁에 부담을 느끼고 급히 자리를 피했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모처럼 희망을 떠올렸던 신들은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그 자리를 떠나려다가, 형진과 노닥거리고 있던 세 명의 여신들을 보았다.
“쳇. 모처럼 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가 싶었는데. 엉뚱한 불청객들 때문에 이게 뭐야.”
투덜거리는 희망과 생명을 보호와 균형이 조심스럽게 다독인다.
“하, 하지만… 의도한 건 아니잖아요. 진님의 처지도 이해를 해주셔야…”
“물론 진이 나쁘다는 건 아니야. 단지, 눈치도 없이 여전히 뭉기적거리고 있는 저 녀석들의 행태가 짜증날 뿐이지.”
그렇게 말하며 노려보는 희망과 생명의 말에 잡신들은 흠칫 놀라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가뜩이나 바쁜 밤의 신이 모처럼 시간을 내서 여신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여성이 한을 품으면 한여름에도 서리가 내린다던가. 하지만 여기 있는 이들은 단순한 여성이 아니다. 서리 정도는 마음먹으면 그냥 쏟아 부을 수도 있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갖춘 여신들이다. 이미 대신으로 칭해지는 공포와 죽음이나 희망과 생명은 물론이고 가장 세가 약한 보호와 균형조차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가 아니던가.
감히 그녀들의 말에 대꾸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려는 잡신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몇몇은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밤의 신은 가족들을 끔찍하게 여기기로 이미 엘리시온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다. 그런 그에게 있어 지금 여기 있는 세 명의 여신이 얼마나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을지 떠올린 것이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저희가 미처 여러분께서 오붓한 시간을 즐기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렇게 방해를 해버렸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더라도, 눈치만 보며 슬금슬금 도망치는 것과 이렇게 똑바로 잘못을 사죄하는 건 실로 차원이 다른 일이다. 물론 명색이 신인데 자존심을 굽히고 고개를 숙이는 일이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뒷일을 생각하면 일단 이런 식으로라도 그녀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놓는 것이 좋은 건 두 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흥. 그래도 염치는 있나보네.”
희망과 생명이 그렇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리자, 보호와 균형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신 답했다.
“정중한 사과에 감사드립니다. 마음이 급하면 미처 주위를 돌아보지 못할 수도 있죠. 괜찮으니까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공포와 죽음은 아예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조용히 찻잔만 기울이고 있었지만, 그나마 가장 착해 보이는 보호와 균형이 그렇게 사과를 받아들이지, 주춤주춤 도망치려던 잡신들 역시 옳다 싶었던지 얼른 그녀에게 사과를 건넸다.
바로 쫓겨날 처지에서 간신히 대화의 가닥을 잡게 되자, 잡신들은 세 여신들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하기 시작했다.
“밤의 신께서 세 분을 각별하게 여기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뭔가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건…”
보호와 균형은 난처해졌다. 좋게 좋게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는데, 이들이 그런 자신을 물고 늘어질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탓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 마침내 공포와 죽음이 입을 열었다.
“앞서도 밤의 신께서 말씀하셨지만, 일전에 인턴을 너무 많이 받아들인 탓에 저희들도 딱히 여력이 없는 상황입니다.”
“아…”
잡신들은 다시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공포와 죽음은 그런 그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정말로 이곳을 빠져 나가고 싶은 열의가 있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죠.”
“저, 정말입니까?”
공포와 죽음은 여전히 신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역시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특별한 상황에서는 특별한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법. 밤의 신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보통의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을 테니까요.”
조용히 말을 이어가는 공포와 죽음의 말에, 잡신들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포와 죽음께서는, 그분의 뜻을 돌릴 만한 특별한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글쎄요. 한 가지 방법이 떠오르긴 합니다만, 과연 여러분들이 그와 같은 일을 해내실 수 있을는지.”
잡신들은 얼른 그녀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매달리듯 외쳤다.
“제발 그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달리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길이 있고 방법이 있는데 어찌 시도해 보지 않겠습니까.”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그러자 잡신들은 다시 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보지도 않고 후회를 하느니, 되든 안 되든 일단 시도라도 해보고 싶습니다. 부디 그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흠…”
하지만 공포와 죽음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 번이고 잡신들이 고개를 숙이며 애원하자 그제서야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원하신다니, 어쩔 수 없네요.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또한,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요. 그래도 도전해 보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니 말씀해 주십시오.”
눈치가 빠른 이라면 도전이라는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겠지만, 그들은 이미 공포와 죽음의 페이스에 휘말려서 다른 건 생각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공포와 죽음. 형진 이전에 대신들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존재감과 뛰어난 수완을 자랑했던 신답다.
공포와 죽음은 찻잔을 가만히 흔들어 그 안에 담겨져 있는 감홍색의 차가 만들어내는 소용돌이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저나 여기 희망과 생명 같은 이는 본래부터 대신이라 불리던 이였습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보호와 균형은 그렇지 못했지요. 그런 그녀가 지금 이렇게 다른 신들보다 앞선 위치에 설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 생각하십니까.”
“그건…”
잡신들은 이내 밤의 신에게 총애를 받아서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그런 말을 함부로 입에 담을 바보 같은 신은 아무도 없었다. 얼핏 밤의 신에게 몸이라도 바치라는 건가 싶은 생각을 떠올린 이들도 있었지만,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것이 그의 반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역시 고개를 저어 그런 생각들을 떨쳐 버렸다.
당사자인 보호와 균형도 화들짝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느닷없이 자신의 이름이 거론된 탓에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 건가 싶어 조마조마한 기분마저 들 정도다.
“간단합니다. 그녀는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밤의 신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간절하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여기 계신 어떤 분들과는 다르게 말이죠.”
“…”
그렇다. 보호와 균형은 형진에게 코가 꿰인 첫 번째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다. 따지고 보면 정규직이니 인턴이니 개척 교단이니 해서 형진 밑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신들의 선구자적인 존재라고나 할까.
“지금은 이런 모습이지만, 보호와 균형은 아바타조차 갖추지 못한, 그래서 일신의 힘만으로는 요정보다도 못한 상태로 거친 바다를 헤엄쳐 건너 그가 머물고 있던 왕성을 찾아왔습니다. 어찌 보면, 지금 그녀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공포와 죽음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날카로운 시선으로 잡신들을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었을지, 여러분은 짐작이나 하실 수 있습니까.”
“…”
잡신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공포와 죽음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말이 쉽다. 아바타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로 헤엄쳐서 바다를 건너다니. 자신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그렇다. 지금 자신들이 이렇게 신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건 그들이 지닌 힘이나 신격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먼저 나서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호와 균형이 과거 대신들에 버금가는 힘과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은 오직 그녀가 스스로 나서서 몸소 바다를 헤엄쳐 건너는 위험을 감수했기 때문이다.
얻고자 한다면, 손을 뻗어야만 하는 법.
이제 막 태어난 아이라면 몰라도, 그렇지도 않은 이상 자기 밥숟가락은 자신이 들어야만 하는 법이다.
“그럼… 공포와 죽음께서는… 저희들이 스스로의 의지를 증명해 보이길 원하시는 겁니까.”
공포와 죽음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이미 여러분은 두 번이나 되는 기회를 걷어찼습니다. 첫 번째는 오디션이었고, 두 번째는 인턴 모집이었지요. 그런 여러분의 의지를 밤의 신에게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잡신들은 입술을 깨문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공포와 죽음께 지혜를 청합니다. 저희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 말에 공포와 죽음은 대답했다.
“간단한 얘깁니다. 증명해 보이십시오. 보호와 균형, 꽃과 바람, 황혼과 망각, 그리고 비와 낭만이 보여주었던 방식 그대로. 당신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그 모든 것을 갈구하고 있는지 드러내 보이십시오.”
공포와 죽음은 이내 시선을 찻잔으로 다시 돌리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한다면, 밤의 신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밤의 신은 그런 분입니다.”
그러자 보호와 균형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희망과 생명 역시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
“쳇. 이깟 녀석들이 뭐가 예쁘다고 그런 방법을 알려줘.”
“저기… 차 더 드실래요?”
“칫.”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툴툴거리는 희망과 생명을 보호와 균형이 다독이는 모습을 보며, 잡신들은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공포와 죽음이 알려준 이 방법에 도전하기로.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