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really good RAW novel - Chapter 75
75
제75화: 소리 없는 추적자(1)
해가 떠오른다.
바다에서 일출을 본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365일 중 250일 이상을 바다에서 보내기 때문에 일출과 일몰은 흔한 광경이었지만 지금은 평소와 다르다.
뒤집힌 구명정 위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숭고하기까지 했다.
살 수 있을까.
사방을 둘러보아도 망망대해이고 지나가는 배 한 척 없다.
목이 마른다.
조난 시 가장 무서운 일이 목마름이다.
대개의 조난자들이 목마름 때문에 죽는다.
물만 마시고 최대 보름까지도 살 수는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5일을 넘기기 힘들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태우면서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셨다가는 죽음을 재촉하는 길이다.
문득 어린 시절 뛰어 놀던 나폴리 뒷골목이 떠올랐다.
부모님이 다섯 살 때 이혼했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눈이 맞으면서 자신과 어머니를 팽개친 것이다.
사춘기의 반항은 나폴리 할렘가의 청소년들과 자연스럽게 뭉치게 만들었고 15살 때 처음으로 소년원이라는 곳을 구경했다.
이후 경찰서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고 어머니 또한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떠나버렸다.
혈혈단신 고아가 되어 세상의 모진 풍파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기죽지 않고 살아온 건 복수 때문이었다.
돈을 벌어 부모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였으며 하늘은 그의 뜻을 적극 지지해 거대한 화물선 선장이 되도록 밀어주었다.
그리고 연이어 찾아온, 합법을 가장한 불법 항해는 많은 부를 축적하게 만들었고 이번에도 200만 달러라는 거액을 챙겼다.
옥수수는 위장용이고 그 안에는 러시아제 중고 탱크와 57밀리미터 자동포를 장착한 전투차량 BRM-3K가 실려 있다.
그것 말고도 시아파 예멘 반군에 넘어가면 당장 전력 증강을 가져올 막강한 공격 장비들이 수두룩하다.
20년 동안 일백여 차례 비합법적인 무기를 싣고 다녔지만 이번 건이 규모 면에서 제일 컸다.
무려 5억 달러어치였다.
눈앞으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이 점차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로 조난 사흘째이다.
눈앞으로 아지랑이가 피면 최소한 다섯 시간 이내에 수분을 섭취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의식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조난자가 의식을 잃는다는 건 죽는다는 뜻이다.
핸드폰이 있지만 물이 들어갔는지 완전히 먹통이다.
팟!
졸음까지 밀려오는 최악의 상황에서 볼턴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수평선 멀리 작은 점이 하나 다가오고 있었다.
착시인가 싶어 눈을 비비고 봤지만 분명한 물체였다.
바다에 못 보던 물체가 나타났다면 거의 배일 가능성이 크다.
볼턴은 윗도리를 벗어 흔들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
그야말로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었으므로 일어나 미친 듯 옷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
감비노의 무기 거래상 로건은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손에서 떼지를 못했다.
사흘째 볼턴과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인도양을 지날 때까지만 해도 즐겁게 통화를 했고 물건 수송을 끝내고 나면 뉴욕으로 한번 초대를 할 예정이었다.
그는 백전노장이다.
그리고 과감하다.
오랫동안 거래를 했지만 단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았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여주었다.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19층 건물의 공기는 얼어붙어 있었다.
초비상사태이다.
일이 잘못되면 5억 달러가 날아간다.
그뿐 아니라 제때에 물건을 넘겨주지 못한 피해 보상까지 계산한다면 6억 달러에 육박했다.
물론 감비노에 그 정도의 예산은 있다.
중요한 건 자신의 위치이다.
가뜩이나 언더보스 자리를 맥그리거에게 빼앗기고 자신은 물론 단원들까지 위축되어 있는 판에 배달 사고까지 생긴다면 치명적이다.
벽시계는 오후 3시이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저물어 가는가 싶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이다.
받을까 말까 망설인다.
FBI가 어떤 꼬투리를 잡기 위해 걸어온 전화일 수도 있다.
마피아는 자신이 아는 번호가 아니면 절대 안 받는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평소와 다르다.
“여보세요.”
이를 물며 입을 열었다.
[로건!]“볼턴!”
볼턴이라는 말에 사무실에 각자 흩어져 있던 단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한편 볼턴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까만 점은 화물선이었고,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에서 원목을 싣고 오던 파나마 선적 2만 톤급 발보아 호에 극적으로 구조가 되어 그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볼턴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한순간 전화기 속에 정적이 흐른다.
배가 가라앉았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로건이 입을 닫아 버렸다.
***
로건은 전화를 내렸다.
통화가 끝나자 단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는데 무슨 내용이냐는 질문이다.
윗주머니에 있는 담뱃갑을 꺼냈는데 비었다.
담뱃갑을 구겨버리자 행동대장인 펠프스가 재빨리 자신이 피우던 말보로 한 개를 꺼내 건넨다.
“고맙네.”
딸칵!
불을 붙인 로건은 담배를 깊숙하게 빨아 당겼다.
담배를 반쯤 태웠을 때서야 굳게 닫힌 로건의 입이 열렸다.
“일이 크게 생겼군.”
“왜 연락이 안 된 겁니까?”
펠프스가 물었다.
“배가 아덴만에 가라앉았다는군.”
“네?”
“모두 죽고 볼턴 선장만 살아난 모양이야. 운 좋게 지나가는 파나마 선적의 발보아 호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군.”
“어떻게 배가 가라앉았단 말입니까?”
“뉴욕으로 온다고 하니 만나서 듣지.”
답답하다는 듯 이마를 찡그렸다.
***
스크린에 조태수의 사진이 걸렸다.
스크린을 주시하는 사람들은 사무엘과 알렉스와 데커 그리고 십여 명의 FBI 요원들이다.
조태수가 여러 사건에 연루된 건 분명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물적 증거가 없었다.
맥그리거라는 차기 마피아 언더보스와 깊은 신뢰를 쌓고 있다는 것도 밝혀졌지만 조태수가 마피아 단원이라는 증거 또한 없다.
유일한 증거라면 전화 도청 내용인데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도청은 법적 증거로 사용할 수 없는데, 그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태수를 한국으로 추방하자는 의견들이 나왔는데 사무엘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임무는 적을 체포하고 죽이는 것이지, 살려 보내는 것이 아니다.
조태수는 이미 자신의 총에 죽어야 할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누구든 자신의 총을 피하지 못한다.
악은 절대 선으로 돌아서지 않는다는 것이 사무엘의 확신이었다.
선이 안 될 악은 처형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후버 국장이 종신형을 선고받은 자신을 끄집어내준 이유는 체포가 아닌 압살의 방식을 선호하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후버 국장에게 실망을 안길 수는 없다.
“알렉스.”
사무엘이 권총을 분해해 닦고 있는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자네 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네.”
문제라는 말에 알렉스 이마가 찌푸려졌다.
“감시 말이야. 한 달이 넘었는데도 평범한 직장인처럼 모범적인 출퇴근을 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
알렉스를 조태수 감시에 붙인 것은 그의 추적 능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알렉스의 보고를 들으면 조태수는 철저한 샐러리맨이었다.
현재 공식적으로 조태수가 다니는 회사는 그랜드 파이터라는 부동산 중개업체였다.
물론 FBI를 의식해 만든 회사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랜드 파이터는 한 달에 십여 건, 그중 두세 건은 꽤 굵직한 거래를 성사시켰다.
세무서를 통해도 전혀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건실한 업체였다.
세금 포탈도 없고 직원들 월급도 정상적으로 지급된다.
“내 감시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알렉스의 말이 단번에 예리해진다.
감히 천하의 현상금 추적자인 날 뭘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도발이었다.
“그게 아니라.”
사무엘은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막강한 적을 놔두고 내분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자신은 리더이다.
리더의 덕목을 보여야 한다.
“답답해서 한 소리지, 감히 누가 알렉스의 감각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제서야 알렉스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번에 그레이슨을 중심으로 하는 마약단을 섬멸한 것도 조태수의 통화 내용을 엿들은 덕택이다.
도청기는 이상 없이 잘 돌아가고 있고 조태수의 움직임은 알렉스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
볼턴이 뉴욕에 나타났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볼턴과 얘기를 나눈 로건의 안색이 돌덩이처럼 굳어 버렸다.
전투기가 폭격을 했다는 말에 아연실색한 것이다.
공격자를 알기 위해서는 전투기의 종류와 국적을 파악해야 한다.
비록 고장 난 핸드폰이지만 사진을 찍었으므로 곧장 전문가에게 출력을 맡겼다.
시간은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전투기는 전문가에 의해 F-15로 판명되었다.
결국 사우디 정부에서 테크니컬 호를 공격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란과 앙숙인 사우디로서는 친 이란 노선을 걷는 예멘이 눈엣가시이다.
그런 예멘으로 무기가 들어간다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볼턴을 만난 로건은 하루를 더 고민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로건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마가디노를 찾아갔다.
전화로 보고를 해야 할 일이 있고 직접 만나 얼굴을 보면서 얘기를 할 것이 있었다.
비록 언더보스 경쟁에서는 탈락했지만 로건에 대한 마가디노의 신뢰는 변함이 없었다.
큰 소리로 맞았고 뜨겁게 포옹하며 잃어버린 옛 동생을 만난 것처럼 격하게 환영했다.
하지만 로건의 입에서 테크니컬 호 소식이 나오자 마가디노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로건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한 번도 마가디노의 이런 얼굴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승사자라고 해도 지금처럼 무서운 얼굴은 하고 있지 않을 것이었다.
로건은 감비노 패밀리에서 자신의 출셋길이 막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어떤 꿈을 꾼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
한편 급작스런 호출에 맥그리거는 영문도 모르고 뉴욕으로 떠났다.
자세한 설명도 없이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조태수는 뭔가 중대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별 볼 일 없는 일로 차기 보스를 부르지는 않는다.
과연 무슨 일로 맥그리거를 급히 불러들였는지 동료들과 이것저것 짚어 보고 있을 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상대는 커너였다.
커너는 맥보란의 지시를 받고 그레이슨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와 조태수가 깊숙이 개입한 일이기 때문에 어떤 결과를 얻어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라스베이거스에 와 있다고 했다.
약속장소인 맥도널드 가게에 도착하자 커너는 버거를 시켜서 먹고 있었다.
“점심을 먹지 않아서 말이야. 한 개 들겠나?”
조태수는 조금 전 밥을 먹었다면서 과일 주스를 한 개 시켰다.
“바쁠 테니 용건만 말하지. 조사를 종결할 방침이네.”
“어떤 식으로 마무리할 셈이오?”
당연히 궁금했다.
치명적인 용의자인 자신과 커너를 제외하고 어떤 보고서가 작성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간단하네. 내부자의 소행이란 심증은 99.99퍼센트지만 물적 증거는 없네.”
“심증이라도 좋으니 말을 해보라고 한다면 누구를 댈 생각이오?”
“그런 질문은 절대 없을 걸세. 배신자를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순히 심증만으로 누군가를 의심한다는 건 조직의 건강 차원에서라도 아주 좋지 않기 때문이지. 물증 없는 심증이지만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 위원장님은 물론 보고를 받게 될 보스도 그를 미워하게 될 거야. 증거도 없이 조직의 최고 우두머리들이 부하를 의심한다는 건 아주 해로운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걸세.”
듣고 보니 그러했다.
예상대로 맥보란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물증은 없고 의심이 가는 인물은 있다는 보고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그건 의심이 가는 인물이 누구냐고 묻고 싶어 하는 충동 때문이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아주 위험한 질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 맥보란이기 때문에 지금 참고 있는 것이다.
맥보란은 끝내 의심 가는 인물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자신은 물론 조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