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54
253
아직까지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과거 신을 모시던 신전의 교리의 맨 앞장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신이 우리를 굽어살피시니, 그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지어다.」
그때도. 지금도. 언제 떠올려도 한결같이 개소리처럼 들리는 문장이었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기는 개뿔.
정말로 굽어살폈으면 일이 이 지경으로 치달을 때까지 가만히 있었겠냐. 그들이 사랑한다 굳게 믿고 있는 신이 지상을 위해 보내 준 이라고는 고작 지옥에서 수백 년을 구르던 죄인 하나다.
이런 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닌 것 같은데…….
“세라. 네가 가서 기도 좀 밖에 나가서 하라고 해.”
표정이 갈수록 썩어들어 가는 세라를 보다 못한 동료가 그녀의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주었다. 저들이 시간을 지체하기 전에 빨리 사태를 해결해 달라는 의미였다. 솔직한 말로, 저들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내버려 두고 나가도 시그너스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마음씨 좋은 시그너스 길드원 중에서는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냉혈한은 없었다.
“내가 왜? 좋아하는 기도나 실컷 하게 두고 우리나 빨리 나가자.”
……세라 빼고는.
“에이, 그건 의리가 아니지. 그래도 방금 전까지 같이 싸운 동료인데…….”
“이만 가자고 한마디만 해 봐. 쟤들 대장이 네 말이라면 껌뻑 죽잖아.”
당연하게도 그녀의 제안에 넘어가지 않은 길드원들이 저쪽을 보라는 듯 기도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들을 턱짓했다.
“…….”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긴 세라가 그중에서도 단연 튀는 하늘색 머리통을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어느 길드의 골칫거리인가 싶었던 남자는 의외로 제 길드에서 파견된 이들을 이끄는 책임자였다.
……그런 놈이 남의 길드에 오자마자 처음 보는 여자에게 고백부터 하다니. 아니, 그 이전에 신을 모시는 종자면 몸도 마음도 순결해야 하는 거 아니야?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몸 따로 마음 따로 라는 건가? 그건 너무 편의적이잖아. 이왕 그렇게 굴 거면 기도는 좀 참아 주지. 남들도 못 나가게 저렇게 꾸물거리고 있을 건 뭐람. 하여튼 마음에 드는 게 한구석도 없는 자였다.
터덜터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다가간 세라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신이시여. 부디, 어리석은 죄를 범하는 이들에게 거룩한 빛의 심판을 내려 주시고-.”
“야.”
“-아직도 당신의 사랑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자애로운 깨달음을 내려 주소서. 그리하여-.”
하지만 남자는 세라의 부름을 전혀 듣지 못한 채 기도에 심취해 있었다. 겉보기엔 참 열성적인 신도처럼 보이지만, 세라는 그가 일부러 이런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자마자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듯 씰룩대는 뺨이 그 증거였다.
어휴, 한숨을 내쉰 그녀가 마지못해 남자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레오.”
“무슨 일이죠. 세라?”
이름이 불리자마자, 남자가 언제 그녀를 무시했냐는 듯 방긋 웃으며 뒤돌아보았다. 지긋지긋하다는 낯으로 그를 내려다본 세라가 불량하게 짝다리를 짚은 채 용건을 읊었다.
“이만 일어나. 곧 있으면 독기가 다리를 타고 올라올 거거든?”
네 다리야 잘리든 말든 상관없지만, 내 다리는 지켜야 하지 않겠니.
지극히 본인 걱정만 하는 말이었음에도 레오는 세상에서 가장 논리적인 말을 들은 사람처럼 순순히 설득당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사랑하는 여인의 다리가 잘리게 둘 순 없으니.”
“우욱.”
느끼해…….
어김없이 걸어오는 수작질에 세라가 자기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녀는 그딴 말 좀 하지 말라는 눈으로 상대를 노려봤다. 저 남자는 세라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그 애인이 누구인지도 다 알면서 아직까지도 그녀만 보면 헛소리를 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기겁하는 세라와는 달리 상대는 그런 반응마저 기껍다는 듯 헤벌쭉 웃었다.
“철수한다.”
그러고는 바로 다음 순간, 같은 사람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진중한 얼굴을 하고선 동료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얼굴이 휙휙 달라지는 책임자가 부끄럽지도 않은지, 경건하기 짝이 없는 낯으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행렬에 합류했다.
“크으, 역시 세라 말은 듣는구만.”
“잘했어!”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동료들이 연신 엄지를 치켜들고 있었다. 세라는 괜한 호들갑 떨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젓고는 자리로 복귀했다.
꾸물대던 이들이 합류하자, 공략대는 곧장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행렬의 가장 끝에 선 탐색조에서는 벌써부터 모든 게 끝난 것처럼 들뜬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제 몇 개나 남았지?”
“듣기로는 앞으로 두세 개만 더 파괴하면 최상층이라던데.”
“그 소식 들었어? 최상층 공략하기 전에 꽤 길게 휴식기를 가질 거라던데.”
“오, 그래?”
신나게 떠들어대던 동료들이 일제히 세라를 바라봤다. 자기들이 들은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몰라. 들은 거 없어.”
세라는 부러 쌀쌀맞게 모르쇠로 일관했다. 사실은 에녹에게 이미 들어서 그들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걸 하나하나 대꾸해 주기 시작했다가는 끝이 없었으므로 귀찮은 일은 미리 방지하는 취지였다.
어차피 며칠만 기다리면 알게 될 일이기도 했고 말이다.
“연인이라면서, 그런 것도 안 알려 주나 봐요?”
그때, 탐색 조원들 사이로 하늘색 머리통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행렬의 선두에 있어야 할 레오였다. 언제부터 이 무리에 섞여 들었는지, 흥미롭게 눈을 반짝인 그가 빈틈을 놓치지 않고 둘 사이를 이간질했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예요.”
“맞아요. 얘가 자기 애인 닮아서 귀찮은 건 싫어하거든요.”
그 같잖은 시도에 반응한 건 세라가 아니라 주변에 있던 시그너스 길드원들이었다. 은근슬쩍 세라와 레오 사이를 갈라놓은 그들이 한마디씩 그녀를 변호해 주었다. 친절한 척 웃고는 있지만, 그 안에는 적당히 하고 꺼지라는 뉘앙스가 짙게 담겨 있었다.
처음에야 애인이 있는 줄 모르고 쫓아다녔으니 재미있는 구경거리 취급이나 해 준 거지. 지금은 알 거 다 아는 양반이 남의 애인에게, 그것도 길드장의 애인에게 집적대고 있으니 시그너스 길드원들이 레오를 고깝게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방탕하고 게으르던 길드장이 드디어 마음 좀 고쳐먹고 정착하겠다는데 굴러 들어온 돌이 방해를 해서야 쓰겠는가.
하하하.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린 길드원들이 자연스러운 척 다분히 의도적으로 세라의 주변을 빙 둘러싸며 레오를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그러고는 그로부터 세라를 지키려는 것처럼 너도나도 그녀에게 들러붙었다.
“그러지 말고, 우리한테만 살짝 귀띔해 줘 봐.”
“어머, 그래. 우리도 네 덕 좀 보자.”
“맞아. 맞아. 동료 좋다는 게 뭐니?”
“세라, 우리 진짜 쉬어? 쉰대?”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은 길드원들이 입을 쩍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 새처럼 알려 줘. 알려 줘. 아우성을 쳐댔다.
왜 이래. 징그럽게.
넘치는 애정을 받게 된 세라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들어 갔다.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이제는 후끈한 체온에 뒤덮이기까지 한 세라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저리 안 가?! 더워! 떨어져! 왜 자꾸 들러붙고 지랄이야?!”
가까이 오지 마. 건드리지 마. 죽일 거야!
크르르……. 맹견처럼 이를 드러낸 세라가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굳이 친근하게 들러붙지 않더라도 손가락 하나 까딱 대기만 해도 물어뜯을 듯이 눈을 번뜩였다.
“알았어. 알았어. 안 건드릴게.”
그 기세에 밀린 길드원들이 항복하듯 두 손을 들고 얼른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어우, 애가 점점 사나워지는 것 같애…….
더 큰 화를 입기 전에 제자리로 돌아간 길드원들이 무서워 죽겠다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연애를 하면 사람이 유해진다던데, 세라는 어째서인지 날이 갈수록 앙칼졌다. 같은 길드원들조차 혀를 내두르는 와중에도, 레오만큼은 아련한 표정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 매력적이야…….”
흩어지는 사람들을 역으로 거슬러 들어간 레오가 수줍은 목소리로 데이트를 신청했다.
“저기,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꺼져!”
물론, 이번에도 냉정하게 거절당했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세라가 제시간에 남부 길드원들을 끌어낸 덕에, 임무를 마친 토벌대는 순조롭게 출구에 도착했다.
“전원! 무사 복귀했습니다!”
대표로 기드온 앞에 선 탐색 조장이 당당하게 복귀 신고를 했다. 보고를 들은 기드온이 눈대중으로 인원수를 확인하며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예상 기간보다 빠르게 층 하나를 공략했군. 모두 수고가 많았다.”
탐색 조장을 자리로 돌려보낸 기드온이 대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휴가와 복귀 일정을 읊으며 빠르게 해산시켜 줬을 텐데, 무언가 중요한 전달 사항이 있는지 말을 이어 나갔다.
“알다시피 중앙 가시 토벌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세 개의 층만 더 공략하면 진짜 핵이 숨겨져 있는 최상층에 도달하지.”
무슨 용건인가 했더니 앞으로의 일에 대한 대략적인 계획을 알려 주려는 모양이었다. 마침 다른 대원들이 궁금해하던 주제였기에, 무사 귀환으로 들떠 있던 공기가 금방 기드온에게 집중되었다.
“최상층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를 거다. 그러므로 최상층 공략에 앞서-.”
“……음.”
“-마지막으로 태세를 정비할 휴식기를 가지기로 했다. 남부 길드에서도 추가로 인원을-.”
“……으음.”
“-파견해 주기로 했으니…….”
“……으으음.”
분명, 그래야만 할 텐데. 어째서인지 기드온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게 다, 기드온의 목소리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잡음 때문이었다.
“나, 데리러 왔어?”
“응.”
“그냥 집에서 기다려도 되는데…….”
“걱정돼서 그러지.”
중요한 소식 사이사이로 끼어드는 간지러운 대화 소리에 고집스럽게 앞을 바라보고 있던 길드원들이 하나둘 뒤를 힐끔거렸다.
“중앙 가시만 다녀오면 더워서 힘들어하잖아.”
“내가 뭐 어린애도 아니고.”
그곳에는 마주 보고 선 두 남녀가 자기들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한쪽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붙어 있었으면서 그새를 못 참고 마중을 나온 에녹이었고, 다른 한쪽은 더위와 피로에 지쳐 맹견처럼 사나워졌던 세라였다.
“……내가 와서 싫어?”
은은한 미소를 그린 에녹이 세라에게 몸을 딱 붙인 채 땀에 젖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보고 싶어서 입구까지 마중을 나왔건만 자신을 영 환영하지 않는 것 같으니 서운한 눈치였다.
“아니. 뭐, 언제 싫다고 했나…….”
그 한마디에 세라가 금방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다. 그게 더위 때문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 수 있었으나, 세라는 눈 가리고 아웅 하듯 에녹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더워’하고 투덜거렸다.
그럼 떨어지면 되잖아…….
그 광경을 지켜보는 모두의 마음속에 같은 문장이 떠올랐으나, 그걸 입 밖으로 내뱉을 정도로 용기 있는 자는 없었다.
“와, 진짜…….”
“별꼴이다.”
“우욱.”
다만, 자신들을 대할 때와는 180도 다른 세라의 차별적인 태도에 숫제 배신감이 느껴지는 얼굴로 수군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