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88)
>88 화>
생각보다 연회 준비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금 더 화실에서 그림을 그려도 괜찮았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수도와는 다른 준비 시간에 조금 놀란 것도 있다.
‘별로 준비를 안 하더라도 몇 시간은 기본이었는데.’
이번에는 목욕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것을 빼면, 사실 실제 준비 시간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고 또 준비가 허술했던 것도 아니다.
머리 손질도 옷도 단순하면서도 세련됐다. 어울리지도 않는 화려하고 무거운 드레스를 입던 때와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카리나가 침대에 앉아 멍하니 고개를 젖혔다.
‘그림 그리고 싶다.’
아까 그렇게 호되게 당했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일이 없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그림이다.
이 욕망이 부풀고 부풀면 어느새 광기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니면 밀라이언이 보고 싶어.’
그녀가 한숨처럼 고개를 돌렸다.
1차원적인 이 욕망을 어쩔까. 잠깐이니까 그림을 그릴까 생각 하다가도 페리얼의 당부를 떠올리면 또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똑똑. 달칵.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제는 익숙한 패턴이다. 카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밀라이언이었다. 그는 늘 가볍게 셔츠만 걸치고 있던 차림에서 제복과도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오래 전 약혼식에서나 봤던 옷이었다.
“……밀라이언, 엄청 차려입으셨네요.”
“그대와 함께 참가하는 연회니까.”
밀라이언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허리를 굽히며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는 그를 보니 절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잘 어울리는군.”
“아, 고마워요…….”
카리나가 시선을 슬쩍 피하며 말했다.
큰일 났다. 자꾸 그의 입술만 보였다. 입술만 보이는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카리나의 얼굴이 벌게졌다.
“생각보다 준비가 빨리 끝나서 놀랐어요.”
“남부에서는 제법 화려한 옷을 입으니까. 그래서 수도가 귀찮아. 번거롭거든.”
“하긴,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는 곳에서 자랐으면 그럴 것 같아요.”
자신이라도 몇 시간 걸리는 준비보다 한 시간 걸리는 이쪽을 택하리라. 어떨 때는 또 새벽부터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북부는 훨씬 나았다.
“누가 가까이 와서 쓸데없는 추파를 던지면 내게 말해.”
“추파요?”
“그래, 한량 같은 놈들이 많거든.”
으음, 낮게 신음을 삼킨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의 사람들은 밀라이언만큼이나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진 모양이다.
카리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그는 무척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검을 휘두르는 것밖에 모르는 야만적인 놈들이야.”
“그래요……?”
“그래.”
퍽 단호한 대답이다.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이언도 확실히 조금 야성미가 있었다.
그녀가 머릿속으로 밀라이언과 같은 귀족이 여러 명 모여 있는 것을 떠올렸다.
‘……’
좀 멋있을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그런 게 아닌가. 카리나의 입가에 헤실헤실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왜 웃는 거지?’
질색하는 표정을 짓거나 조심하겠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밀라이언은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카리나를 기묘한 눈으로 바라 봤다.
“얼른 보고 싶네요.”
“…….”
그녀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다른 해석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밀라이언이 떨떠름한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경계심을 가지라고 덧붙인 말이었는데 경계심은커녕 호기심만 부추긴 듯했다.
“보고 싶다고? 그대를 귀찮게 할 거야.”
“가끔은 떠들썩한 것도 좋아요.”
“차라리 페리얼이 나을지 모르는데도?”
“그래도 밀라이언이 신뢰하는 분들이신 거죠?”
원치 않게 페리얼까지 입에 올렸다.
덧붙여지는 카리나의 말에 그의 입술이 조가비처럼 꾹 다물어졌다. 차마 신뢰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었다.
신뢰는 한다, 전우로서는.
“적어도 오늘은 아니야.”
오늘만큼은 차라리 보여 주고 싶지 않다.
약간 창백해 보이는 얼굴의 카리나는 예뻤다. 하늘하늘한 하얀색 파티용 드레스도 그랬지만 뭣보다 그 푸른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북부의 인간들은 전부 하나같이 성격들이 괄괄하고 거침이 없어서, 그들은 그녀와 같은 사람에게 제법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호기심이 부디 그녀를 상처 입히지 않길 바랄 뿐이다.
“연회는 뒤쪽 야외 연회장에서 할 거야. 투명한 돔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한겨울에도 따뜻하지.”
“와…… 신기하네요.”
카리나가 순순히 감탄사를 흘렸다. 남부에선 그런 걸 볼 수 없 었지만 그의 저택에는 투명한 돔이 제법 존재했다.
그런 것이 발달한 이유는 아마 날씨 탓이 가장 크겠지.
“그래, 눈이라도 오면 장관이야. 그대에게도 꼭 보여 주고 싶어.”
“그러게요,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올해도 눈이 내릴까요?”
“아마도 내릴 거야. 매년 겨울에는 꼭 내리니까.”
“기대되네요.”
행복하다는 듯 접힌 그녀의 눈매를 보며 밀라이언이 미소 지었다.
그녀가 이렇게 좋아하니, 없는 것이라도 만들어 내 보여 주고 싶었다.
아름답고 예쁜 것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했다. 페리얼과 비슷한 종류의, 아마도 예술가들의 집착이 아닐까 싶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슬슬 가 있도록 할까? 사람이 없을 때 안을 구경시켜 줄게.”
“네.”
카리나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짝거리는 눈에서 곧 별가루라도 떨어질 것 같다.
밀라이언이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왜…… 왜 웃어요.”
“웃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어깨를 부들부들 떨던 밀라이언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시치미를 뚝 떼는 그 표정에 카리나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분명히 방금까지 웃었는데 그런 적 없다는 얼굴이 너무 결백해 보인다.
“웃으셨잖아요…….”
밀라이언이 허리를 굽혀 카리나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가 떨어졌다.
깃털이 내려앉는 것보다도 더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카리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 입술에 뭐 발랐어요……!”
밀라이언을 올려다보니 입술 정 중앙에 살짝 핑크빛이 도는 색조가 묻어나 있었다.
민망함에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카리나가 당황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괜찮아. 이대로 나가도 난 나쁘지 않은데.”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카리나가 황급히 제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 까치발을 들었다.
그러고는 밀라이언의 입술을 꾹꾹 눌러 닦는다. 그녀의 손수건이 멀어지자 밀라이언이 아쉽다는 듯 혀로 입술을 핥았다.
“괜찮았는데.”
“……부끄러워서 안 돼요.”
“아쉽군.”
밀라이언이 한 걸음 가볍게 물러나며 한 손을 뒤로하고 다른 손을 내밀었다.
“함께 가시죠, 아가씨.”
답지 않은 정중한 목소리에 카리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렇다고 차마 그 손을 내칠 용기도 없어서 그녀가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조심스럽게 밀라이언의 위에 손을 올리자 그가 냉큼 그것을 잡아 그녀를 끌어당겼다.
“카리나.”
“네.”
“최근 생각하지만 그대를 만나서 다행이야.”
“…….”
그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신이다. 고마워해야 하는 것은 카리나였다. 그를 만나서 평생 혼자서 하진 못했을 결심을 했다.
“제가 할 말이에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밀라이언이 낮게 웃었다. 그녀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심이었다. 덕분에 몰랐던 감정을 알 게 됐으니까.
‘이번 토벌의 우선순위는 하론이겠군.’
그녀의 웃음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면 자신이 조금 더 뛰는 수 밖에 없었다. 맨날 짜증스럽게 생각은 하지만 페리얼의 실력만큼은 믿고 있다.
그는 예술병과 관련된 분야에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보다 더 많은 자료를 가진 사람이 없고 그의 머리보다 더 다양한 지식을 가진 사람도 없다.
뒤쪽 연회장으로 온 밀라이언이 먼저 문을 열었다.
안에는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한 시간이나 일찍 온 것이었고. 적당히 있다가 그녀가 피곤해하는 기색을 보이면 냉큼 들어갈 생각이었다.
“…….”
“…….”
들어가자마자 두 사람이 그대로 굳었다.
카리나는 놀라움에 굳었고 밀라이언은 목까지 차오른 욕설을 내 뱉지 못하는 짜증에 그대로 굳어졌다.
“미친…….”
입술 사이로 차마 억누르지 못한 옅은 욕설 하나가 새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