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94
4.
4회 말, 자그마한 투수가 글러브로 입을 가린 채 마운드에 오르는 순간 1루 관중석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
“저 악마 같은 새끼.”
데블스의 유니폼을 입은 데블스의 팬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퍽 아이러니한 표현.
그러나 그 표현에 데블스 팬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반문을 뱉거나, 태클을 걸지 못했다.
이진용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시선은 그러했다.
악마를 보았다!
이진용의 피칭은 그 정도였다.
‘공, 진짜 더럽다.’
4회 말 선두타자로 나오게 된 데블스의 1번 타자로 나온 최정훈, 이미 이진용의 공을 한 차례 상대하는 건 물론 이진용이 자신을 제외한 여덟 명의 타자들을 상대로 던진 공을 봤음에도 그는 여전히 이진용의 공을 칠 자신이 없을 정도였다.
‘최대한 분석하고······.’
데블스의 준비가 부족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데블스 전력분석팀은 이진용에 대해서 그 어느 구단보다 철저한 분석을 했다.
라이벌이니까.
프로야구리그 소속 10개 구단 중 8개 구단에게 전패를 하더라도, 엔젤스에게 전승을 거둘 수 있다면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의 라이벌.
그런 라이벌 팀의 새로운 에이스 투수에 대한 분석은 당연히 최우선 과제였고, 데블스 전력분석팀은 이진용의 피칭을 온갖 방법을 이용해서 분석했다.
이진용이 던지는 공 하나하나를 문자 그대로 해부했다.
‘최대한 준비했는데······.’
또한 최정훈의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좌타자인 그는 이번 시즌 타율이 3할 3푼, 여기에 7개의 홈런과 10개의 도루를 기록하면서 1번 타자에 부족함이 없음을 성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아니, 그 어느 팀보다 두터운 야수진을 보유하고 있는 데블스의 1군에서 1번 타자로 섰다는 것 자체가 그가 리그 평균 이상의 타자라는 증거였다.
그렇기에 최정훈은 이것 하나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이진용이 던지는 공이 뭔지만 예측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를 상대로 안타는 물론 홈런도 뽑아낼 수 있다고.
그리고 그게 문제의 시작점이었다.
‘모르겠다.’
이진용이 뭘 던질지, 도무지 예측이 되지 않는다는 것.
‘날 어떻게 잡으려고 하는지조차 모르겠어.’
최정훈은 당장 4회 말에 올라온 이진용이 자신을 삼진으로 잡을 것인지, 땅볼로 유도할 것인지 범타를 노릴 것인지 아니면 볼넷을 염두에 둔 집요한 바깥쪽 승부를 할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게 이진용이 악마 같은 놈인 이유였다.
타자를 어떻게 잡을지조차 알려주지 않는 악마 중의 악마!
그런 이진용에게 2스트라이크를 허락한다는 건 악마에게 영혼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
“스트라이크!”
“볼!”
“스윙 스트라이크!”
그리고 최정훈의 영혼이 저당 잡히는 데 필요한 값은 공 3개였다.
스트라이크존 바깥쪽 낮은 코스를 정확하게 찌르는 포심 패스트볼.
타자의 스트라이크존을 흔들기 위해 던진 하이 패스트볼.
그리고 그보다 좀 더 낮게 스트라이크존을 향해, 그러나 앞선 공보다 덜 가라앉는 라이징 패스트볼!
그리고 최정훈의 마지막 숨통을 끊은 공은 그 공이었다.
‘젠장, 스플리터!’
스플리터!
후웅!
그야말로 홈플레이트 위에서 마법처럼 사라지는 그 공 앞에서 최정훈의 배트는 하염없이 허공만 가를 수밖에 없었다.
‘아.’
그렇게 다시 한 번 이진용에게 아웃카운트를 헌납한 최정훈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이내 마음의 준비를 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우우우웃!”
주심의 삼진 콜의 뒤를 이어 자신을 덮칠 그 빌어먹을 소리에 흔들리지 않기 위한 마음의 준비.
호우!
이윽고 그 소리가 최정훈을 덮쳤다.
그뿐이었다.
‘응?’
엔젤스 팬들이 내지르는 호우 소리만이 최정훈의 몸을 흔들 뿐, 이진용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 사실에 최정훈이 마운드 위의 이진용을 바라봤다.
그런 이진용은 최정훈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
입꼬리 한쪽을 낚싯줄에 걸린 것마냥 올린 채.
그 순간 최정훈은 깨달았다.
“저 씨발 새끼가?”
이진용,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개 같은 악마 새끼였다는 사실을.
5.
[155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4회 말 데블스의 3번 타자를 상대로 마지막 삼진을 잡는 순간 이진용은 그 어떤 소리도 내지르지 않았다.
지그시 타자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입꼬리를 한쪽만 올린 채.
그 사실에 이진용에게 삼진을 당한 타자가 이진용을 죽일 듯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눈빛에, 이진용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제스처로 대답을 대신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굳이 해석을 달아줄 필요 없을 정도로 그 의도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제스처였다.
“아오, 저 씨발 새끼!”
그렇기에 이진용의 그 모습을 본 데블스의 타자들이 결국 폭발했다.
– 우와!
그리고 김진호는 감탄했다.
– 진용아, 내가 진짜 어떻게든 널 메이저리그에 보내줄게!
그 감탄과 함께 나온 김진호의 말에 이진용이 글러브로 입을 가린 채 되물었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개소리에요?”
– 메이저리그 타자 애들이 네 도발에 어떻게 대응할지 보고 싶어서라도 널 메이저리그에 데려가겠다고!
김진호, 그는 이진용에게 주문했다.
데블스에 시비를 걸라고.
시비를 걸어서 덤비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치킨 레이스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들라고.
누구 한 명이 지쳐서 제 발로 마운드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피투성이가 되어 타인의 손에 끌려 경기장을 나갈 만큼 치열하게 치고받는 경기 분위기를 만들라고.
하지만 김진호는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진짜 네 도발 능력은 최고야. 너 정도의 도발 능력을 가진 건 막 잠들 무렵에 들리는 모기 소리 말고는 없는 거 같아.
애초에 프로 선수들이 프로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자기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것이었으니까.
릴렉스, 침착하게, 냉철하게.
그런 단어를 수도 없이 머금으며 상대방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은 채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선수들은 무수히 많은 훈련과 수행을 하며, 때로는 정신과 의사의 도움까지 받는다.
– 장담하는데, 진용이 네가 메이저리그에 가면 전 세계 복싱팬하고 격투기 팬들이 네 경기를 볼 거다. 아마 매 이닝마다 마운드가 링으로 변할 걸? 캬! 진용이가 주먹 맞고 강냉이 털리는 건 보고 성불할 수 있겠네!
그런데 이진용은 그런 프로 선수들의 평정심을 눈빛과 입꼬리를 실룩거리는 것만으로도 무너뜨려 버렸다.
– 다시 생각해도 진짜 감탄이 나온다. 어떻게 거기서 아가리를 싸무는 방법을 꺼낼 줄이야!
침묵.
그것으로 도발에 성공한 것이었다.
– 아마 지금 데블스 애들은 네가 호우 외치는 게 그리워질 거다.
그렇기에 지금 데블스의 상태는 김진호가 한 말 그대로였다.
“아오 빡쳐!”
데블스 더그아웃.
“봤어? 저 새끼 마운드에서 고개 흔드는 거?”
“젠장, 엔젤스 새끼들에게 이런 식으로 취급받는 날이 올 줄이야.”
“아, 진짜 씨발 저 새끼 마운드에서 내쫓고 싶다. 아, 빠따로 패버리고 싶다!”
지금 그곳은 이진용을 향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씨발 차라리 호우호우 지랄을 하는 게 낫지.”
이진용, 그가 아웃카운트를 잡을 때마다 내지르는 그것은 환호이자 동시에 포효였다.
내가 이겼다!
그런 의미의 포효.
맹수가 맹수를 사냥하는 순간 내지르는 포효였다.
때문에 당하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더럽지만 한편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포효는 이진용이 상대방을 자신의 적수로 인정했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까.
달리 말하면 이진용이 포효조차 하지 않는다는 건, 지금 그가 데블스를 적수로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고 포효하지 않는 것처럼.
‘미치겠네. 이제 와서 호우하라고 할 수도 없고.’
‘오히려 입 다물고 있으니 딴지를 걸 수도 없고.’
심지어 이런 이진용의 행동 자체를 두고 데블스의 타자들이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차라리 호우 소리를 외칠 때라면 모를까, 마운드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입꼬리만 실룩거리는 투수에게 항의해봤자 그 항의가 씨알도 먹힐 리 없을 터.
그저 속만 썩어 문드러지는 상황.
‘어떻게 방법이 없네.’
‘여기서 제일 좋은 건 점수를 내는 거지만······ 안 될 거야.’
더불어 데블스의 코칭스태프 역시 이런 상황에서 어찌할 도리 같은 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데블스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버틀러 부탁한다.”
“OK.”
에이스는 에이스로 상대하는 것밖에 없었다.
6.
“Howoo!”
5회 초.
마운드 위에서 터진 우렁차기 그지없는 음색의 환호성이 그라운드를 넓게 퍼졌다.
그 사실에 모두가 멍한 눈으로 마운드 위를 바라봤다.
‘뭐지?’
‘버틀러가 지금 호우라고 한 거야?’
마운드 위의 2미터 장신의 투수, 데블스의 에이스이자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투수 중 한 명이 된 버틀러를 바라봤다.
버틀러는 그런 좌중의 시선 속에서 당당하게 가슴을 편 채 마운드를 내려왔다.
“우아아아!”
그 순간 1루쪽 관중석, 데블스의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지!”
“시발 니들만 호우냐? 우리도 호우다!”
“호우다, 호우!”
버틀러, 그가 내지른 호우가 데블스의 팬들 그리고 선수들의 가슴을 꽉 막고 있던 것을 뚫어줬다.
반면 엔젤스 팬들과 선수들은 그저 얼빠진 표정으로, 마치 잘 타고 가던 자신의 자동차를 빼앗긴 듯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아.”
이윽고 정신을 차린 이들이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5회 말 마운드에 올라갈 투수를, 그리고 자신의 포효를 빼앗긴 투수를 바라봤다.
자신의 심볼을 빼앗긴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약간은 두려움 섞인 궁금증을 품은 채.
그런 그들은 볼 수 있었다.
– 진용아, 시비 아주 제대로 받아줬네. 그래서 넌 어떻게 할래?
“콜.”
씨익,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글러브와 모자를 챙긴 채 마운드로 올라가는 투수를.
7.
5회 말.
마운드에 올라온 이진용의 피칭은 언제나처럼 똑같았다.
투스트라이크, 타자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후에 저마다 맞는 맞춤형 방법으로 그들은 벼랑 끝으로 밀어버렸다.
이제까지 이진용이 보여준 것을 생각하면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물에 대해 이진용은 환호성을 내지르지 않았다.
호우, 그 두 글자를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대신 아웃카운트를 잡을 때마다 말없이 몸을 돌려 전광판을 잠시 동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진용, 저 새끼 왜 호우 안 하는 거야?”
“갑자기 개과천선한 건 아닐 테고.”
“아, 호우야 호우 좀 해!”
그 사실에 엔젤스 팬들은 답답함을 느꼈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 법인데, 자기 것이라고 생각됐던 것을 원수에게 빼앗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으니까.
물론 데블스 팬들의 기분도 좋지는 않았다.
“젠장, 차라리 호우 소리 듣는 게 낫겠어. 이호우 새끼 우리를 완전히 좆밥 취급하잖아?”
“엔젤스 놈들에게 이런 대우를 받는 날이 올 줄이야. 굴욕이다, 굴욕!”
이진용의 침묵이 예의를 갖추기 위함이 아니라, 데블스를 얕잡아 보기 위함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그런 광경은 6회에도 마찬가지였다.
6회 초, 마운드에 올라온 버틀러는 이번에도 아웃카운트를 잡을 때마다 소리쳤다.
“Howoo!”
처음에는 이진용의 도발에 도발로 응수하기 위해서 꺼냈지만, 이제는 본인이 진심으로 맛을 들인 듯 환호성을 내지르는 버틀러는 이제 어퍼컷 세레모니까지 곁들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 환호성이 본래는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반면 이진용은 반대였다.
“흠.”
6회 말에 마운드에 올라온 이진용의 피칭은 여전히 악마와 같이 데블스 타자들의 영혼을 뽑아먹었지만, 이진용은 포효를 내지르지 않았다.
그저 타자를 상대할 때마다 그리고 마운드에 오를 때와 내려갈 때 전광판을 확인할 뿐이었다.
– 이진용 쟤 뭐 보는 거임?
ㄴ 시계 보는 듯.
ㄴ 시계?
ㄴ 보고 싶은 드라마 있는 듯.
ㄴ 그게 말이 됨?
ㄴ 됨. 쟤 또라이임.
“대체 왜 자꾸 전광판을 확인하는 거지?”
“괜히 신경 쓰지 말자고. 이진용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다가는 머리가 터져버릴 테니까.”
그 사실에 경기를 보는 관중들은 물론 기자들, 관계자들 그리고 데블스 선수단과 코치들과 시청자들이 의구심을 품었다.
하지만 엔젤스 선수들은 이진용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기보다는 위기감을 품었다.
‘이제 7회다.’
엔젤스 선수들, 개중에서도 타자들에게는 이진용과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었으니까.
‘점수 내야 해.’
7회 이전에 득점을 하는 것.
그리고 이제 그 7회가 왔다.
‘어떻게든!’
팀의 승리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선수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위해서라도, 더 나아가 연봉인상을 위해서라도 점수를 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엔젤스 타자들에게 버틀러의 도발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걸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어떻게든 점수를 내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 엔젤스 타자들은 그 덕분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평정심이 가능케 했다.
“버틀러 패스트볼 던질 때 팔이 좀 더 높은 거 같지 않아?”
“그렇지? 네가 봐도 그렇지?”
“호우 외치다가 맛탱이가 간 거 아냐?”
“확실히 평소 같진 않겠지.”
평소와 다른 피칭을 하는 버틀러가 저도 모르게 드러낸 자신의 약점을.
그 상태로 7회 초가 시작됐다.
엔젤스의 타순은 3번부터 시작.
사고가 터지기에 가장 좋을 때.
그때에 사고가 터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