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4
교랑의경 34화
아랫것들은 혼수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정교랑이 다시 도관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소식이 더 중요했다.
“뭐라고? 아씨를 도관으로 보낸다고?”
마당에 있던 정교랑의 몸종과 여종들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도관 같은 곳에 가야 한다니, 그것도 바보를 따라가면 높은 확률로 거기서 평생 못 나올 수도 있잖아!
역시 이 바보의 시중을 드는 사람 치고 운 좋은 이가 없네. 전에 모시던 이들은 일가 전체가 쫓겨나질 않나, 이제는 평생을 도관에서 썩어야 한다고? 차라리 쫓겨나서 어디론가 팔려 가는 게 나을지 몰라. 이 바보는 정말 불운을 달고 다니는구나. 엮이는 족족 불운이 옮잖아! 마당에 있던 몸종과 여종은 허둥지둥 달려나가 빠져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한편 회랑 아래에 앉은 몸종은 평온한 표정으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방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몸종은 바느질거리를 내려놓고 얼른 들어갔다. 정교랑이 침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씨, 깨셨어요?”
몸종은 얼른 다가가 부축하여 옷을 갈아입히고 얼굴을 씻게 한 후 창가 앞 팔걸이 책상에 앉혀 주었다. 이어 따뜻하게 끓인 물을 건넸다. 몸종은 그 모든 과정을 능숙하게 해냈다.
“아씨, 말씀하신 대로 하얀 연밥을 구해다가 쌀가루와 벌꿀을 넣고 찐 다음 식혀 놨어요. 잘라 올 테니 드시겠어요? 제 입맛엔 당도가 딱 적당하던데 아씨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은 작은 백자 접시에 담은 누르스름하고 먹기 좋게 생긴 쌀떡을 정교랑은 한두 개 집어 먹었다.
“괜찮네.”
몸종은 기쁘게 웃음을 지었다.
“짐은 다 챙겼니?”
정교랑이 물었다.
“네, 남은 건 아씨께서 보실 이 책뿐이에요. 떠나시는 그날, 소인이 직접 들고 갈게요.”
정교랑이 눈을 들어 몸종을 쳐다봤다.
“나랑 같이 가려고?”
정교랑이 물었다.
“소인이 아씨께로 왔다는 건 이미 이 집에서 대접을 못 받고 있었단 뜻이에요.”
몸종은 웃으며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여기 남는 건 얼핏 좋게 들릴지 몰라도 어차피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야 해요. 소인도 나이가 있으니 1~2년 후면 짝을 찾아야겠죠. 노비 신분으로 어떤 사람과 혼인할지는 안 봐도 뻔하잖아요. 그런데 요즘 아씨를 모시면서부터는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먹고 마시는 거나 명성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사람이 살면서 평생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일만 있을 순 없죠. 소인은 그저 자유로우면 됐지, 딱히 바라는 거 없어요.”
정교랑은 몸종을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렇게 길게 말하면 나 같은 바보가 알아듣겠어?”
몸종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씨, 놀리지 마세요. 아씨가 바보면 소인도 바보예요.”
정교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숙여 책을 봤다. 몸종도 말없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앉아 아까 하던 바느질거리를 손에 들었다.
“사람이 살면서 평생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일만 있는 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냐.”
정교랑이 돌연 말을 이었다. 아씨는 보통 사람보다 말이 한 박자 느리다는 걸 몸종은 잘 알고 있었다. 몸종은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지만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았다.
문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창가 쪽에서 바라보자 정씨 가문의 하인과는 차림새가 다른 낯선 여종의 모습이 보였다. 정교랑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다들 그렇듯 여종 역시 잠시 얼이 빠져 있다가, 정교랑이 그 멍한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자 정신을 차렸다.
“저기, 주씨 가문에서 아씨께 갖다 드리래요.”
여종은 몸을 굽히며 네모반듯한 함 하나를 밀어주었다.
“반근.”
정교랑이 돌연 입을 열었다. 여종은 화들짝 놀라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사람이나 일을 기억 못 한다지 않았나? 어떻게…….
“네, 아씨.”
몸종이 대답하며 손을 뻗어 함을 받았다. 어리둥절해진 몸종은 무언가 생각이 날 듯 말 듯했다.
“아씨, 먹을 거네요.”
몸종이 함을 열어 보더니 반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포장을 뜯어 보니 2층으로 된 찬합이었는데, 네모반듯한 격자 안에 각종 화려한 정과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경성에서 유명한 간식 가게 거예요. 반, 아니 집안 식구가 아씨께서 간식을 좋아하신다며 특별히 골라 줬어요.”
여종이 이번에는 몸종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너무 많이 먹진 마. 배탈 안 나게 조심해야지.”
몸종은 쌩긋 웃으며 잠자코 있었다.
“그럼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
여종이 말했다. 이 바보가 예쁘게 생기긴 했지만 바보 앞에 있는 건 어쩐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저기.”
또다시 입을 연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 옆에서 공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걸 그 애한테 갖다 줘.”
여종은 멈칫하여 정교랑을 바라봤다. 그 애가 누군데? 누가 그 애야? 이 바보는 누가 누군지 아는 거야? 설마?
몸종은 벌써 손을 뻗어 공책을 여종에게 건네고 있었다. 여종이 힐끔 보니 손으로 잘라 실로 간단하게 묶은 공책인데 아주 얇았다. 여종은 글을 모르는 터라 무어라 쓰여 있는지 알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받아 들고 예를 표한 후 밖으로 나왔다. 몸종이 회랑까지 직접 배웅을 나왔다.
“여기 언니는 이름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
계단 아래로 내려선 여종은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는 듯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몸종은 여종을 향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소인, 반근이에요.”
경성은 날씨가 서늘해 강남보다 국화가 더 많이 피었다. 주육낭의 마당은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국화들로 가득했다. 몸종들은 국화를 둘러싸고 꽃을 구경하거나 정담을 나눴다.
“두 개 더 꺾어 와라.”
진 공자의 말이었다. 진 공자는 한 손에 작은 절구통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절굿공이로 콩콩 찧고 있었다. 몸종 둘이 네 하고 대답하더니 국화를 두 송이 꺾어 돌아왔다. 진 공자는 아까운 기색은 조금도 없이 꽃을 절구에 그대로 넣고 콩콩 찧어 짓이겼다.
“상자 자네가 꽃이며 잎을 이렇게 거리낌 없이 꺾는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거야.”
주육낭이 회랑 아래에서 무릎을 세우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웃으며 말했다.
“이건 차를 만드는 거야. 만들고 나면 아주 매력적이고 아름다울걸.”
진 공자가 대답했다.
“괜히 쓸데없는 걸 만들고 난리네.”
주육낭이 대꾸했다. 뒤에서 몸종 하나가 총총 걸어와 무릎을 꿇고 차 두 잔을 올렸다.
“차 드세요.”
몸종이 고개를 숙인 채 말하자 주육낭이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아 단숨에 비웠다. 진 공자는 찻잔을 받지 않고 계속해서 꽃을 빻았다.
“난 그런 차 안 마신다, 맛없어. 내가 직접 만들어 봐야지.”
주육낭은 웃으며 말없이 있었지만 몸종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공자님도 이 차가 맛없으세요?”
진 공자는 손을 멈추었다.
“공자님도?”
진 공자는 몸종을 쳐다봤다.
“반근, 네 입맛에도 이 차가 맛없느냐?”
주육낭의 물음에 반근은 고개를 숙였다.
“네, 소인은 천박해서요.”
반근이 불안한 말투로 대답하자 진 공자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천박하지 않다, 천박하지 않아. 모처럼 뭘 좀 아는 사람을 만났구나. 좋다, 좋아.”
주육낭은 입을 삐죽거리고 진 공자에게 주려던 차까지 받아 고개를 젖혀 가며 깨끗이 비웠다. 반근은 진 공자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살짝 긴장했다. 자신을 주시하는 진 공자의 눈길에 반근은 늘 불안을 느꼈는데, 이번만큼은 자신을 보는 표정이 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럼 어떤 차가 맛있는데?”
진 공자가 웃으며 물었다. 반근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여종 하나가 다가와 이들의 대화를 끊었다.
“여섯째 공자님.”
여종은 예를 표하고 입을 열었다. 여종을 본 반근은 누구 앞인지 잊은 듯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쪽에서 소식이 왔느냐?”
“네.”
주육낭의 심드렁한 물음에 여종이 대답했다.
“똑바로 말을 해.”
“네, 대부인께서는 점포 하나를 둘로 나누고 농토는 전부 우리에게 돌려주는 것에 동의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씨 가문 이노야께서 반대하며 교랑 아씨는 장차 그 농토에 기대 먹고살아야 한다고 하셔서 지금 다시 나누고 있습니다.”
주육낭은 냉소를 지었다.
“오래 해 먹었었는데 뱉어내려니 아깝긴 하겠지. 그럼 천천히 나누라고 해라. 우리 집 재산을 공으로 가로채는 게 그리 쉽진 않을 거다.”
“네, 노야와 부인께서도 그리 분부하셨습니다. 바로 그쪽에 다녀오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여종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도관으로 보내졌답니다.”
“뭐라고요? 아씨를요?”
자신의 신분도 잊은 채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반근은 눈가가 그렁그렁해져서 무릎을 꿇고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아씨를 도관으로 보냈다고요?”
주육낭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반근을 힐끔 쳐다봤다.
“뭘 그리 호들갑을 떨어?”
반근은 고개를 숙이고 가까스로 눈물을 삼켰다.
“정씨 집안 아이니 저들이 알아서 하겠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네, 노야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어요.”
주육낭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여종이 웃으며 대답했다. 반근은 주육낭 뒤에서 무언가 말하려다가 감히 입을 열지 못했고, 진 공자는 그들의 대화를 못 들은 듯 한쪽 옆에서 조용히 꽃을 빻았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뒤돌아 나가려던 여종이 걸음을 멈추고 공책 하나를 꺼냈다.
“반근, 그쪽에서 인편에 보낸 거야. 너한테 주는 거래.”
반근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일어나 신도 신지 않은 채 달려가 물건을 받더니 공책을 보고는 몸을 떨며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모두가 반근을 쳐다봤다. 꽃을 빻는 데 여념이 없던 진 공자마저도 고개를 들어 힐끔 바라봤다.
“아씨, 아씨.”
반근은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듯 공책을 꽉 쥐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목이 멘 목소리로 오열했다.
“그 바보가 준 것이냐? 뭔데?”
“아씨와 돌아오던 길에 겪은 일을 소인이 기록한 공책이에요.”
반근은 울며 대답했다. 주육낭은 아 하고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진 공자는 무언가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아씨께서 저한테 전한 말씀은요?”
반근은 울며 고개를 들어 그 여종에게 물었다. 진 공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반근을 힐끔 쳐다봤고, 여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러가거라.”
주육낭의 말에 여종은 뒤돌아 몇 보 걸어가더니 또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삼키는 듯했다.
“한 가지 일이 있긴 한데…….”
여종이 뒤돌아 머뭇거리며 말했다.
“말해라.”
“그 아씨 곁에 새로 온 몸종의 이름도 반근이랍니다.”
반근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더니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잠시 멍해졌다가 곧이어 목 놓아 대성통곡을 했다. 아씨께서 그래도 이 이름을 기억하시다니, 아직 날 그리워하시는 게 틀림없어! 주육낭은 여종과 반근을 모두 내쫓고 나자 비로소 귀가 깨끗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자들 울고불고하는 게 제일 짜증 난다니까.”
말을 마친 주육낭은 진 공자 쪽을 쳐다봤다. 진 공자는 꽃을 빻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울음소리에 넋이 나간 게야?”
진 공자가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공이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육낭, 정씨 가문에 갔을 때 그 바보 누이부터 보고 나서 저 계집을 본 거지?”
“아니, 그 바보를 뭐 하러 봐.”
주육낭은 긴 소매를 털고 몸을 곧추세워 앉았다.
“안으로 들어서니까 저 계집이 아주 훌륭한 연극판을 벌이고 있더라고. 정씨 가문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게 정말 재미있더군. 더 대단한 건 저 계집이 내가 온 이유를 알고 그 바보를 부추겨 정씨 가문 사람들한테 물을 먹인 일이지.”
주육낭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랬음 내가 정씨 가문에서 하루 더 머물며 시간을 낭비했겠나. 생각할수록 속이 다 시원해.”
“그 바보를 안 만났다고?”
진 공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뭐 잘못됐나?”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데 말로는 표현을 못 하겠네.”
진 공자는 비스듬히 기대앉아 정원에 가득한 국화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쪽에서 반근에게 보냈다는 공책 말이야.”
한참 말을 기다리던 주육낭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 애 물건이잖아. 정씨 가문엔 필요 없으니 돌려보낼 만도 하지.”
“그래. 그리고 새로 온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준 것도 그래. 같은 이름이잖아.”
“정씨 가문 사람들이 그 바보를 달래려고 한 일일 뿐이야. 그런 하찮은 일을 생각하고 있다니 한심하군.”
진 공자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었다.
“정말 그 정씨 가문 사람들이 별 뜻 없이 한 일이면 상관없는데, 혹여 그 바보의 뜻이라면…….”
“바보? 그러면 뭐?”
주육낭이 물었다.
“그 바보는 정말 속 좁고 뒤끝 있는 사람인 거지.”
진 공자가 박수를 치며 말하자 주육낭은 그를 힐끔 보고 고개를 젖혀 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저 계집이 정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한 일도 그 바보가 가르쳤을지 모르는 일이군.”
주육낭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진 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일이지.”
진 공자가 주육낭을 보며 말했다. 주육낭은 다시 한번 무릎을 치며 크게 웃었다.
“상자, 내가 바보일지도 모를 일이네!”
주씨 가문의 마당은 깊은 곳에 있어서 웃음소리가 멀리 문밖까지 전해지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