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74
교랑의경 474화
반근이 먼저 마차에서 내려 정교랑이 내리도록 부축하고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왕부를 훑어보았다.
“그리 큰 곳은 아니지만, 황궁과 가까이 있는 곳을 찾기가 어려워서요.”
영접하러 나온 상궁이 웃음 지으며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내디뎠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지, 사실 이 정도면 꽤 규모가 되는데. 이 낭자는 어째 진담으로 받아들이나 보네?
예상치 못한 정교랑의 반응에 상궁은 깜짝 놀라 잠시 제자리에 서 있었지만, 정교랑을 평범한 사람 대하듯이 하면 안 된다는 총관의 당부가 떠올라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정교랑의 뒤를 쫓아갔다.
“왔어요?”
정교랑이 막 문가에 다다랐을 때,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청자색 바탕에 은은한 하얀색 꽃무늬가 새겨진 장포를 입은 진안 군왕이 환한 웃음으로 정교랑을 맞이했다.
“이쪽으로 들어가요.”
진안 군왕은 총관의 놀란 표정을 애써 무시하면서 말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린 뒤, 문턱을 넘어 그를 따라갔다.
“왜 그러세요?”
상궁이 총관의 놀란 표정을 보고 물었다. 총관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여인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이를 위해 치장한다더니.”
“무슨 그런 말씀을. 저 낭자가 얼마나 원칙을 중시하는데요. 허튼 생각 마세요.”
상궁이 나지막이 말하자 총관이 미소 띤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낭자를 두고 한 말이 아닐세.”
저 낭자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니?
상궁이 의아한 얼굴로 총관에게 더 물어보려 했지만, 총관은 벌써 정교랑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육가아, 육가아. 어서 이리 와서 정 낭자에게 인사해야지.”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졌다.
“전하께서는 저 낭자를 볼 때만 경왕을 먼저 불러오시네.”
“그렇지, 뭐. 평소에는 경왕이 다른 사람과 마주칠까 봐 겁나서 항상 꼭꼭 숨겨두시잖아.”
대청 안에서 물러난 두 시녀가 소곤거리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무거운 헛기침을 했다.
“정 낭자께서 경왕을 뵙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의술을 아는 분이 아니더냐. 그게 아니라면 낭자를 왜 초청하셨겠어?”
상궁이 정색을 하며 나무라자 두 시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입을 꾹 다물었다.
상궁이 대청 안을 쳐다보자, 진안 군왕의 손에 이끌려 와 정교랑 앞에 선 경왕이 보였다. 남의 손에 잡혀 있는 것을 질색하는 경왕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괴성을 질렀다. 하지만 정교랑의 얼굴에서는 겁을 먹거나 꺼리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정교랑의 표정은 진안 군왕이 경왕을 대할 때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역시 신의라 다르긴 다르네. 하긴, 저 여인의 눈에는 병이 있든 없든, 모두가 다 똑같아 보이겠지.
정교랑이 경왕에게 예를 표한 뒤 몸을 일으켰다. 진안 군왕은 그제야 경왕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 사이에 경왕은 재빨리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한번 둘러볼래요?”
진안 군왕이 손으로 주위를 가리키며 웃었다.
“좋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경왕을 불렀다.
“육가아, 우리 나가서 좀 걸을까?”
진짜로 둘러보겠다는 거야?
상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서둘러 진안 군왕의 뒤를 따라갔다.
“정방, 저기 좀 봐요. 원래는 저기가 연못이었는데, 내가 흙으로 메워서 꽃을 잔뜩 심었어요. 아마 내년 봄이나 여름쯤이면 꽃밭이 되어 있을 거예요.”
진안 군왕이 손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교랑은 진안 군왕이 가리키는 곳을 내다보면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꽃으로 모양을 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좋은 생각인데요? 어떤 모양이 좋을까요?”
진안 군왕이 기뻐하는 모습으로 물었다.
“음양도(陰陽圖)가 좋겠네요.”
정교랑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 말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옆에 있던 총관에게 지시했다.
“전하, 이곳의 구도와 풍수는 모두 사천대에서 정한 것이라 함부로 바꿔서는 아니 되옵니다.”
총관이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들이 본 거라 바꾸려는 게다.”
진안 군왕 역시 목소리를 낮추고 총관에게 대꾸했다. 총관이 멈칫하자 진안 군왕은 총관을 보며 자신의 말대로 하라는 눈짓을 보낸 후,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보며 씩 웃었다.
“정방, 우리 이쪽으로 가 봐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갔다.
경왕은 앞쪽에서 바람개비 한 개를 손에 들고 신나게 뛰어다녔다. 경왕의 뒤로 시녀와 내시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갔고, 그 행렬은 청석판이 깔린 길 위로 쭉 이어졌다.
“진짜로 바꾸신대요?”
다른 사람이 총관에게 물었다. 총관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군왕의 성격을 너희도 알지 않느냐. 어서 사람을 보내 황궁에 알리거라.”
“사천대 사람들이 이 일을 알면 분명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내시 하나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참, 대인. 사천대 사람들한테 묻기 좀 그렇다면, 다른 이에게 물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내시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누구한테? 설마 보수사의 승려들은 아니겠지?”
총관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니요. 그때 반강현에서 일식 시간을 정확히 맞혔던 한 대인께서 곧 경성에 오신다고 합니다. 한 대인을 이곳으로 모셔 구도를 보게 하시지요. 한 대인이 괜찮다고 하면, 사천대 관리들도 아무 말 못 하지 않겠습니까.”
내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천대에서 예측한 일식 시간은 열에 아홉은 틀리곤 했다. 어쩌다 한 번 일식 시간을 맞혀도, 늘 운이 좋아서 때려 맞힌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천대가 일식 시간을 맞히지 못한다고 한들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런데 올해는 누군가가 일식 시간을 정확히 맞히고 온 성의 백성들을 대동해서 천구를 쫓아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런 상서로운 일은 해당 성의 백성들뿐 아니라, 다른 성의 백성들에게도 선망을 자아내는 일이었다.
백성들을 모아 함께 일식을 막아낸 관리도 그 일로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때마침 관리에 대한 고과가 있었던지라, 반강현의 모든 관리가 한 대인의 평가를 후하게 준 덕에 한 대인은 단번에 지현(知縣)에서 지주(知州)로 진급했다. 이런 연유로 한 대인은 곧 경성으로 들어와 황제를 알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맞아. 그런 방법이 있었지. 한 대인께서 경성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주의 깊게 살피거라. 그분이 경성에 당도하시는 즉시 내게 알리도록 하고.”
내시들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총관은 금세 멀어진 진안 군왕을 보고 서둘러 그를 쫓아갔다.
“이제 자네 차례야.”
누군가가 말했다. 넋을 놓고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던 진십삼이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외쳤다.
“좋은 시네, 좋은 시야.”
“좋긴 개뿔. 빈말은 넣어 둬. 뒤의 두 구절이 남았잖아.”
소년이 손에 쥔 술잔을 빙그르르 돌리며 말했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문이 열리더니 주 낭자가 들어왔다. 그 뒤로 칠현금을 품에 안은 몸종이 따라 들어왔다. 별실에 있던 일고여덟 명이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진짜로 주 낭자를 모셔온 거야?”
“주 낭자를 모시기란 하늘의 별 따기인데!”
시끌벅적한 와중에 주 낭자는 미소 띤 얼굴로 사람들에게 예를 표하고 진십삼의 근처로 걸어갔다. 진십삼이 웃으면서 주 낭자에게 목례했다.
복도에서 취객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원산을 마시고 싶다니까? 왜 안 팔아? 여기가 경성에서 제일 좋은 술집이라며?”
“손님, 무원산은 정 낭자한테만 있습니다. 그분이 팔지 않겠다는데, 우린들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정 낭자한테만 있고, 남한테는 없는 술. 팔지도 않을 거면서 맛만 보이는 바람에 입맛을 다시는 사람들이 수두룩해졌지. 하지만 정 낭자는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잖아.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협박을 겁내는 사람도 아닌 데다, 부귀영화도 관심 없는 사람이니, 그 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들만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
진십삼이 입꼬리를 올렸다. 별실의 문이 닫히자, 복도에서 들리던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차단되었다.
“진호!”
누군가가 술잔을 흔들면서 진십삼이 듣기 싫어하는 이름을 큰소리로 외쳤다. 진십삼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왜 그렇게 불러?”
“그래야 내 말을 들으니까.”
사내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자네 오늘 왜 그러는 거야? 자네의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일부러 다들 모였는데, 정작 당사자는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으니, 원.”
고개를 숙인 채 칠현금을 조율하던 주 낭자는 생일이라는 단어에 멈칫했다. 주 낭자가 고개를 들어 진십삼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진십삼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자, 자, 그래서 나머지 두 구절은?”
진십삼의 말에 사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계속해서 자신이 만들다 만 시를 생각했다.
“마당의 오래된 오동나무, 줄기가 하늘을 뚫고 솟았네(庭除一古桐,聳干入雲中).”
사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같은 말만 되뇌었다.
“가지는 남북을 오가는 새들을 반기고, 나뭇잎은 바람을 맞이하는구나(枝迎南北鳥,葉送往來風)”.
주 낭자가 화답했다. 사람들이 주 낭자가 읊은 시를 다시 한번 따라 해 보고는, 손뼉을 치며 좋은 시라고 감탄했다.
“주 낭자, 역시 경성의 제일 화괴답습니다.”
사내들이 웃으면서 칭찬했다. 사내 중 하나는 주 낭자에게 술을 한 잔 따라 주기까지 했다.
“하찮은 재주일 뿐이에요.”
주 낭자는 웃으며 술잔을 받아 소매로 입을 가리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화려한 춤 솜씨에 글재주까지 겸비하셨군요!”
대청 안의 사람들이 주 낭자에게 환호했다. 진십삼은 빙긋 웃으며 주 낭자를 바라보고 술잔을 비웠다.
“생일 당일인 내일은 우리가 같이 있기 힘드니까, 오늘 아주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보자고.”
진십삼에게 말하던 사내들이 주 낭자를 쳐다보았다.
“낭자, 생일 주인공 옆에 동석하는 건 어떻습니까?”
진십삼은 얼른 손사래를 치면서 어찌 감히 그런 부탁을 하느냐고 했다.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고말고. 걱정하지 마. 자네 부친께서 아셔도 자네 다리 몽둥이를 부러트릴 리는 없을 테니까.”
사내들이 웃으면서 진십삼에게 말했다. 주 낭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진십삼의 옆에 앉지 않고 웃으며 예를 표했다.
“동석하는 것은 별일 아닙니다만, 차라리 소인이 여러분께 가무를 보여 드리고 공자님들의 흥을 돋우는 건 어떨까요?”
주 낭자의 가무는 가히 경성 최고였지만, 남들 앞에서 선보이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평소에는 기껏해야 손님들에게 칠현금을 연주하는 게 전부고, 꽃등 놀이나 새해 명절 때처럼 권문세가에서 거금을 들여 초청할 때나 겨우 가무를 보이곤 했다.
사내들은 횡재한 듯한 기분이었다. 주 낭자를 모셔 온 것도 모자라, 주 낭자의 가무까지 볼 수 있다니!
“이게 다 생일 주인공 덕분이네, 다 자네의 복 덕분이야!”
사내들이 웃으면서 외쳤다. 진십삼이 사내들을 따라 웃으면서 술잔에 술을 부어 주고, 주 낭자를 향해 미소 지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주 낭자는 진십삼을 향해 웃으며 가볍게 목례한 뒤 한 걸음 물러섰다. 주 낭자가 팔을 들며 소매를 허공에 던지자, 풍악이 울리면서 주 낭자의 춤이 시작되었다.
별실 안의 사내들은 주 낭자의 가무를 보며 계속해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진십삼은 주 낭자의 춤을 보면서 웃음 짓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오늘 있다던 선약은 어느 연회에 가는 거였을까? 나는 왜 낭자에게 어디 가냐고 묻지 않았지?
아니지, 묻는다 한들, 뭘 어쩔 수 있겠어? 따라가기라도 할까.
진십삼은 홀로 실소를 터트린 후 술잔을 들고 천천히 술을 음미했다.
화려한 춤솜씨로 사내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주 낭자는 휘날리는 소매 사이로 진십삼을 보았다. 주 낭자의 눈가에 잠시 씁쓸함이 비쳤지만, 주 낭자는 곧바로 눈빛을 숨기고 춤에 집중했다.
주 낭자의 섬세한 손끝과 구름 위를 나는 듯한 춤솜씨는 사내들을 정신 차리지 못하게 만들 만큼 매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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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당나라 때의 명기이자 여성 시인이었던 설도(薛濤)는 어릴 때부터 음률을 익혔습니다. 본문 내의 시 구절은 설도의 아버지가 시의 앞 구절을 읊자, 어린 설도가 뒤 구절을 지어 화답한 일화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