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27
한제는 생각을 멈추었다. 자신의 추측이 맞든 틀리든 지금 당장은 자신과 무관한 일이었다.
한제는 순간이동을 통해 단숨에 1만 리나 떨어진 평원으로 이동했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유령과 같은 존재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주변을 배회했다. 그중에는 포효하는 한 마리의 기린 마수의 잔혼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식으로 사방을 훑던 그는 지면의 칠흑처럼 어두운 균열을 발견했다.
길이가 약 1천 척에 이르는 균열은 누군가가 거대한 비검으로 만들어낸 상처 같았고 무척 오래된 듯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다. 주위로는 잡초가 빽빽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을 듯했다.
한제가 입을 벌려 숨을 들이마시자 주위를 배회하던 주요 혼백들이 검은 연기가 되어 하나둘 그 입을 통해 혼번으로 돌아갔다.
모든 혼백을 거둔 한제는 바닥에 내려서서 고랑을 살폈다.
나운의 기억에 따르면 천귀는 천귀도(天鬼道) 특유의 신통술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하나를 얻는 데 49년이 걸린다. 허무에서 태어나 본래 형태가 없는 존재지만 천귀도 수련자들은 일반인의 피를 제물로 삼은 후, 자신의 원신으로 소환한다. 일단 포획한 뒤 영혼으로 연결된 귀령(鬼靈)으로 삼는 것이다.
“나운은 천귀도에서 꽤 높은 자였지. 이번에 그의 스승은 가지고 있는 아홉 개의 귀령 중 가장 약한 녀석을 나운에게 주었다. 허나 나운과 함께 지낸 시일이 길지 않았기에 천귀는 그를 배신한 것이지.”
한제는 혼수에게 공격당했던 자신과 천귀에게 배신당한 나운의 처지가 어쩐지 비슷하다는 생각에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한 손으로 허공을 그었다. 순간 두 갈래의 회색 기운이 그의 손가락을 맴돌며 나타나더니 곧장 튀어나와 땅에 난 그 고랑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고랑 안에는 천귀가 숨어 있었다. 녀석은 주인을 배반한 벌로 약간의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정혈로 연결된 주인을 잃기까지 해 무척 약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딱 7일만 버티면 더 이상 정혈 없어도 살 수 있었으며, 49일이 지나면 완전한 자유를 되찾아 세상 어디로든 떠날 수 있을 것이었다.
고랑 안에 숨어 있던 천귀는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자신에게 다가오는 회색 기운 중 하나에게 달려들었다.
한데 그 순간, 회색 기운은 빛으로 흩어져버리더니 확산되기 시작했다. 천귀가 흠칫 놀라 방향을 틀어 달아나려 했을 때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캬오오!”
점점 확산되던 회색빛이 천귀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응결되더니 회색빛으로 뒤덮었다. 천귀는 포효를 내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 순간, 남은 하나의 회색 기운 또한 무너져 내려 회색빛으로 변했다. 그러더니 좀 전과 마찬가지로 천귀를 중심으로 응집되더니, 순식간에 온몸을 회색빛으로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고랑 앞에 선 한제는 허공을 움켜쥐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회수!”
그러자 고랑 안에서 천귀의 분노에 찬 포효와 함께 한 줄기 검은 빛이 엄청난 속도로 튀어나와 달려들었다.
한제가 재빨리 몸을 물리자 그 검은 빛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추격했다.
“그래, 어디 와 보거라!”
한제는 차게 웃으며 다시 한번 뒤로 몸을 물렸고 이어 저물대에서 곤극 채찍을 꺼내 휘둘렀다.
짝!
“끼야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천귀의 비명이 이어졌고 녀석의 기세가 한층 누그러졌다.
곤극 채찍은 주로 원신을 공격하는 무기로 실체가 없는 천귀에게는 특히 효력이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천귀는 더욱 분노한 듯 다시 달려들었다. 그 광포한 살기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한제는 다시 몸을 물렸는데 그러면서도 두 갈래 회색 기운으로 천귀의 몸을 이리저리 관통시켜 대량의 생기를 빼앗았다. 천귀는 그 회색 기운은 무시한 채 한제만에게 달려들었고 녀석이 지나는 곳마다 지면의 풀들이 노랗게 말라 죽었다.
잠시 후, 한제는 더 이상 뒤로 물러나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채찍을 휘둘렀다. 몇 번의 채찍질 소리가 울려 퍼졌고 천귀는 신음을 흘리며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러더니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허나 한제는 골칫거리가 될지도 모를 천귀가 도망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더구나 나운의 기억을 통해 천귀가 배반을 한 뒤 7일, 그리고 49일이 지날 때 어떤 변화가 발생하는지도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한제는 재빨리 천귀를 뒤쫓으며 곤극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은 마치 한 마리 용처럼 튀어나가 천귀를 휘감았다.
“캬오오!”
천귀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그러다가 더 이상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겼는지 맹렬히 몸을 돌리더니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녹색의 어스름한 불꽃이 녀석의 입에서 튀어나와 눈 깜짝할 사이 곤극 채찍을 뒤덮었다.
이 불꽃은 천귀의 목숨과도 같은 것으로 녀석이 가진 최강이자 최후의 공격 수단이었다. 녀석은 한제보다도 직접적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곤극 채찍에 더 큰 분노를 느낀 것이다. 죽더라도 채찍만큼은 망가뜨리겠다고 마음먹은 듯했다. 목숨을 걸고 불을 뿜어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한제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는 일찍이 천귀의 강력함을 알고 있었기에 잡으러 나서기 전에 망설이기도 했다. 허나 천귀가 가장 약해진 상태인 지금이라면 가능하다는 결론에 녀석을 포획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녀석이 내뿜은 불을 본 순간, 잠시나마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한데 그는 그 화염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 천귀가 내뿜은 화염은 육신이 아니라 원신을 태우는 화염이었던 것이다.
“크윽!”
한제는 원신이 타오르는 듯한 통증에 어쩔 수 없이 곤극 채찍을 내팽개치고 곧장 물러났다.
한데 바로 그때, 천귀의 화염으로 뒤덮인 곤극 채찍의 표면이 쩌적 하고 갈라지더니 한 줄기 금빛이 그 안에서 번쩍 튀어나왔다. 그 빛은 딱 한 번 번쩍이고 곧장 사라졌지만 한제의 표정이 변했다.
“이럴 수가!”
그 한 번의 번쩍임으로 채찍을 뒤덮은 천귀의 불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싹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천귀는 마치 있을 수 없는 일이라도 목격한 듯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재빨리 달아났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 금빛은 어느새 천귀의 몸까지 투명하게 만들어 버렸고 천귀는 공포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한제는 재빨리 달려나가 곤극 채찍을 잡아챘다. 곤극 채찍은 한 번 부르르 떨더니 멈추었다. 만약 한제가 재빨리 채찍을 거두지 않았다면 천귀는 소멸됐을 것이다.
한제는 혼번을 꺼내 천귀를 봉인됐다. 혼번 안의 특수한 환경에 천귀는 소멸을 멈출 것이다.
한제는 곤극 채찍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채찍은 천귀의 불에 탄 뒤 약간 변한 상태였다. 여러 층의 얇은 가죽으로 휘감겨 있어 살짝 만져보아도 단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허물을 벗은 뱀 같았으나, 이제 막 탈피를 시작해 마무리하지는 못한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겠군. 언젠가 알게 되겠지.”
잠시 후, 한제는 채찍을 저물대에 집어넣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사흘 뒤, 저 멀리 일전에 머물렀던 산골짜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산골짜기를 덮은 진은 천천히 돌며 강렬한 위압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위압감은 한제에게도 익숙했다. 금번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제는 그 산골짜기를 떠나기 전에 금번을 꺼내 진에 배합해둔 상태였다. 산골짜기를 요령들의 습격에서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였다.
머지않아 한제는 그 산골짜기 밖에 이르렀다. 산골짜기를 뒤덮은 진은 한제가 일전에 한 번 파괴한 적이 있었던 데다가 지금은 그의 금번을 섞어두기까지 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산골짜기 중심지에 부족원들을 모아두고 무언가 이야기를 하던 구양화는 한제를 보자마자 얼른 달려와 허리를 깊이 숙여가며 절을 했다.
“어르신 오셨습니까?”
구양화는 몇 가지 일로 인해 한제에 대한 반감이 사라지고 오히려 존경심만 가득했다. 더구나 두 외부자가 마주쳤을 때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얼마 전 다른 외부자와 함께 사라졌던 한제가 혼자 돌아온 것을 보고는 그 강력함에 전율했다.
“산골짜기 깊은 곳은 금지된 구역으로 명한다. 방해하지 말도록!”
한제는 그 말만을 남긴 뒤 눈 깜짝할 사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요력(妖力)의 결정
구양화는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만약 한제가 여기에 뿌리를 내린다면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될 뿐만 아니라 세력을 확장하기도 쉬워질 것이다.
구양화는 부족원들에게 소리 높여 말했다.
“산골짜기 깊은 곳은 어느 누구의 출입도 금한다! 아이들 단속 잘해! 절대 이를 어겨서는 안 돼!”
부족원 대부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몇몇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중 한 장정이 중얼거렸다.
“어째서 안 됩니까? 산골짜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시원한 곳인데…”
구양화는 눈을 부릅뜨며 호통 치듯 말했다.
“규칙이야! 오늘부터 이 규칙을 우리 부족의 법으로 정할 것이다! 이를 어기는 이는 가족과 함께 산골짜기 밖으로 내쫓을 거야!”
구양화의 말에 그 자리의 누구도 더는 반발하지 못했다.
자신이 너무 심하게 말했다 싶었는지 구양화는 마른기침을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산골짜기는 너무 작아. 그러니 터전을 좀 바꿔야 하지 않겠어? 우리 부족을 조금 더 키워야 할 거 아냐?”
그 말에 몇몇 부족원의 눈빛이 변했다.
“장로님, 전쟁을 하는 겁니까?”
구양화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제는 산골짜기 깊은 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 요령의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터전이 필요했고 그 터전을 기반으로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전공을 세워야 했다. 그는 반드시 고요성에 갈 생각이었지만 그러려면 준비가 필요했고 고요성 안에서 준비하기란 어려웠다.
만약 나운의 기억을 얻기 전이었다면 한제는 곧장 고요성으로 갔을 것이다. 허나 나운의 기억을 살피던 한제는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나운의 기억에 따르면 고요성 좌익 요장의 휘하에는 고수가 상당히 많은데 이들은 모두 이 땅의 원주민들로 요력을 위주로 힘을 발휘했다. 그들의 신통술 역시 그랬다.
“우선은 이 산골짜기의 원주민들을 교화시키고 그들에게 내 법술과 신통력을 가르친다. 그럼 후에 나만의 세력을 키울 수 있을 테니까.”
한제의 눈에 결연한 빛이 어렸다.
“큰일을 해내는 사람은 작은 일들에 구애되지 않는 법. 저들에게 혼번술을 전수해줄 것이다. 비교적 쉬운 술법인 데다가 살육에 강점이 있지. 많은 살육을 저지를수록 더 많은 혼백들을 얻게 될 테고 그럴수록 세력은 공고해질 테지.”
그럼 이를 기반으로 존혼번을 회복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만 되면 문정기 수련자도 두려울 게 없다.
“이번에 들어온 외부자 중 열 손가락 안에 들고 만다! 그래야만 고요령을 얻을 기회를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생각을 마친 한제는 저물대에서 두 개의 옥패를 꺼내 신식으로 주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