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38
이 청년은 사실 남장을 한 여인이었다. 얼굴은 법술로 바꿔둔 상태였는데 한제는 처음 들어선 순간부터 이를 알고 있었다. 다만 상대의 진짜 얼굴을 억지로 살피려 하지는 않았다.
방으로 들어간 한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저물대에서 1천 개의 선옥을 꺼냈다. 그는 양손으로 결인을 그리며 주위의 선옥들에 몇 갈래의 기운을 쏘아 보냈다. 그러자 짙은 선기가 곧장 피어올라 한제에게로 몰려들었다.
한제는 눈을 감고 호흡을 시작했다. 선기는 가는 실처럼 변해 천천히 그의 얼굴에 있는 일곱 구멍을 통해 체내로 흘러들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사흘 뒤,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가루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있던 주위의 선옥들은 그가 두 눈을 뜬 순간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더 많은 선옥이 필요해. 손가에서 20만 개를 받는다 해도 문정기 중기에 이르기는 힘들 거야. 문정기 후기에 이르기는 더욱 어려울 거고 음양이의의 경계에 이르기는 더더욱⋯⋯.”
한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선옥은 매우 희귀한 존재로 영변기 이상 수련자들이 수련할 때 꼭 필요한 소모품이었다. 그렇다면 지난 오랜 시간동안 소모된 선옥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터였다. 그렇다면 그 많은 선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더구나 선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이전에도 몇 차례 생각해본 문제였지만 여전히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수련의 첫 번째 단계에서 필요한 선옥의 양이 이 정도인데 두 번째 단계에 이르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선옥이 필요할지⋯⋯.”
한제의 미간이 점점 더 구겨졌다.
“설마⋯⋯ 수련의 두 번째 단계에서는 선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선옥을 대체할 방법이 있는 것인가?”
한참 고민하고 있던 한제의 표정이 순간 변하더니 고개를 들어 방 밖을 내다보았다. 가벼운 바람이 휙 스쳐간다 싶더니 손가의 저택에서 봤던 검은 옷의 노인이 공손한 태도로 방 밖에 나타났다.
한제는 손을 휘둘러 방 앞에 걸어둔 금제를 열었다. 잠시 고민하던 검은 옷의 노인은 결단기로 자신의 수준을 감춘 뒤 쓴웃음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선배님, 저번에는 상황이 너무나 다급하여 제 소개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손가의 지파 소속으로 이곳 손가의 책임자인 손계명입니다. 선배님의 함자는 어떻게 되십니까?”
노인의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본가의 시조 어르신을 직접 임하게 할 정도라면 상대는 절대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될 자라 여겼기 때문이다.
“허목.”
한제가 덤덤하게 말했다.
“허 선배님, 본가에서 선옥 20만 개를 보내왔습니다. 확인해보시지요.”
노인은 얼른 품에서 저물대를 꺼냈다.
한제는 저물대를 받아 들고는 확인하지도 않았다. 손가의 그 문정기 수준 수련자라면 이런 일로 화를 일으키지 않으리라 믿었다.
노인은 저물대를 건넨 뒤 말을 이었다.
“선배님께서는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아래 녀석들에게 그날의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할 것을 분부해두었습니다. 오늘도 이곳에 오면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해두었으니 선배님의 수련에 방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 선배님께서 폐관수련을 원하신다면 더 좋은 장소를 제공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한제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툭 내뱉었다.
“괜찮네. 가보게.”
그 말에 얼른 공손하게 물러나던 노인이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선배님, 7일 뒤 이 성 안의 염가 보합루에서 경매가 열린다고 합니다. 판매할 물건 중에는 8품 차신단(次神丹)도 있다더군요.”
한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노인을 훑어보았다.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방 안은 고요했다. 이 고요함은 무형의 압력이 되어 노인의 심신을 경련하게 했다. 본가에서 상대의 수준을 떠보고 오라는 명이 내려진 만큼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벌였지만 다행히도 이 허목이라는 상대는 자신의 의도를 파악한 것이 아니라 8품 차신단에 신경을 쓰는 듯했다.
“가져와!”
한참 뒤, 한제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노인은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한제를 바라보다가 얼른 품에서 붉은 영패 하나를 꺼냈다.
“이번 경매의 입장 영패입니다.”
“가봐.”
한제는 영패를 받아 들고 눈을 감았다.
노인은 황급히 방에서 나오고 나서야 한시름을 내려놓았다. 식은땀에 옷이 흠뻑 젖은 상태였다.
한데 그때, 그의 귓가에 한제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은 없다.”
노인의 얼굴에서 순간 핏기가 싹 가셨다. 그는 몸을 돌려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더니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성 안의 한쪽 구석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노인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한제의 마지막 말에 그는 상대가 자신의 의도를 완전히 꿰뚫었음을 알 수 있었다. 너무도 두려운 순간이었다.
본가에서는 8품 차신단에 대한 정보로 상대의 반응을 떠보고 상대의 마음이 움직인다면 영패를 넘기라고 지시했다. 이는 상대가 문정기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허나 만약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다른 말 말고 곧장 이 성에서 철수하라고 했다.
땀을 닦아낸 손계명은 결국 답을 얻어냈음에도 여전히 불안했다.
한편, 그 무렵 한제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8품 단약이라⋯⋯.”
모완은 단약의 대가였기 때문에 한제 역시 단약의 등급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단약은 총 9등급으로 나뉘고 각 등급에는 상, 중, 하 세 단계가 있다.
한제는 원영기에 이르려 할 당시 6품 상급의 단약을 먹은 적이 있다.
9품 단약은 신단(神丹), 8품 단약은 차신단(次神丹), 7품 단약은 선단(仙丹)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런 이름은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것일 뿐. 선단이니 신단이니 하는 이름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진정한 신이나 신선의 단약은 아니야. 둘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지. 정확히 말하자면 9품 단약이 한계인 셈이지. 수련의 두 번째 단계에 이르면 진정한 선단이나 신단이 아닌 이상 이런 단약은 효력이 없을 거야. 허나 지금 나의 수준에서는 8품 단약으로 효과를 볼 수 있겠지.”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결정을 내렸다.
“저 노인 혼자서 단약을 가지고 내 수준을 떠보려는 엄두를 냈을 리는 없어. 분명 손가 배후에 있는 그 문정기 수련자의 지시였겠지. 내 수준을 알아내려고 그렇게 떠본 건가? 만약 내가 단약의 소식을 듣고도 반응이 없었다면 내 수준이 이미 수련의 2단계에 이르렀을 거라고 예측했겠지.”
한제는 20만 개의 선옥이 든 저물대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특수 법보
나천성역 북역, 미친 듯이 질주하는 한 줄기 빛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야, 이곳이 이 스승의 고향이자 네가 앞으로 수련할 곳이다. 곰곰이 헤아려보니 수천 년 만에 돌아오는 것이구나. 만약 우리 환가 선조님이 남긴 나천석(羅天石)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쉽게 너를 데리고 오지는 못했겠지.”
긴 빛 속에서는 한 여인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이 낯선 성역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 성역에 소속감은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저 유리 같은 곳이 천환성이다. 북역의 5대 주성(主星) 중 하나로 나의 가문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 미야, 우리 나천성역에서는 가문과 혈통을 중시한단다. 가문이 없으면 높은 등급의 공법을 수련할 수 없고 가문의 비호를 받을 수도 없지. 앞으로 너는 나의 제자일 뿐만 아니라 나의 수양딸이기도 하다. 환혈법(換血法)을 써서 네 피에 우리 환가의 피를 섞어 넣을 것이고 네 이름 역시 류미가 아니라 환미가 될 것이다. 동의하느냐?”
노인은 기대감이 어린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제자를 끔찍이 아끼는 그로서는 혈통이 없다는 관계로 제자가 아무런 신분도 가지지 못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에 그는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는 환혈법을 써서라도 직접 이 제자를 자신의 가문으로 들일 생각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바가 있었기에 류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노인은 기분이 좋은 듯 유쾌하게 웃었다.
“미야, 나는 너를 수련의 두 번째 단계에 이르게 할 것이다. 어쩌면 현재 나의 수준인 규열기를 뛰어넘게 될지도 모르지!”
빛은 빠른 속도로 나아가며 노인의 웃음소리를 퍼트렸다. 전방에서 반짝이는 천환성은 갈수록 가까워졌다.
여인은 천환성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천성역에서의 삶은 내게 있어 새롭게 태어난 것과 같다. 이한제와 주작성에 관한 일들은 연기처럼 흩어버렸다. 이한제의 자질로는 아직 문정기에 이르지도 못했을 거야. 그가 과연 생과 사의 관문을 넘길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지. 이제 그는 나의 적수가 될 수 없어. 안타깝군, 그를 위해 준비해둔 그 특수한 법보를 쓸 데가 없어졌으니…’
여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특수한 법보를 떠올리는 여인의 눈에 고통이 차올랐다. 허나 그 고통은 곧 냉랭한 빛으로 바뀌었다.
‘지금 그는 아마 주작성에 있겠지. 나와는⋯⋯ 이미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된 거야.’
빛은 천환성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 ★ ★
한제는 수많은 선옥들을 주위에 펼쳐놓고 천천히 흡수했다. 순식간에 7일이 지난 후에야 그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에서는 기이한 전광이 번득였다.
깊은 숨을 들이마셔 남은 선기를 전부 흡수한 한제는 사방 가득한 선옥 가루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성의 북쪽 구역 바위 밑에는 예의 그 청년이 언제나처럼 호흡을 하고 있었다. 깊은 숨을 들이마신 그가 뿜어낸 하얀 콧김이 주위를 맴돌다가 사라졌다.
이내 두 눈을 뜬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질이 부족하다 해도 근면하게 수련한다면 언젠가 원영기 중기에 이를 수 있겠지.”
그때 저 멀리서 한 사내가 다가왔다. 검은 머리에 보라색 옷을 입고 있었고 장신구는 하나도 걸치지 않은 자였다. 서른 전후로 보이는 그는 늠름하면서도 날카로운 외모에 어딘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사내는 뒷짐을 진 채 입구를 바라보았다. 뭔가를 기다리는 듯한 눈치였다.
그는 바위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은 청년을 잠시 힐끗거리더니 이내 신경을 거두었다.
바위 아래 청년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저 사내의 수준은 파악할 수 없었지만 절대로 쉽게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사내의 몸에서는 마치 영혼까지 위협하는 듯한 느낌이 풍겨났다.
그때 입구에서 빛이 번득이더니 한제가 걸어 나왔다.
보라색 옷의 사내는 한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압도적인 위엄이 담긴 눈빛이었다. 사내에게서는 은근한 전의가 흘러나오기도 했는데 사내가 이를 잘 갈무리한 상태라 한제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 순간, 주위의 기온이 떨어진 듯했다. 마치 한겨울이 된 것만 같았다. 청년은 불길함을 느끼고는 한제에게 외쳤다.
“돌아가!”
한제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입구에 배치된 진까지 걸어 나오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돌아가지 않고 뭘 보고 있어? 저자는 너를 찾아온 모양이다. 허나 이곳은 내 책임이니 내게는 너를 보호할 의무도 있어.”
그는 말을 마치며 저물대에서 옥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한제는 청년을 자세히 살피다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