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87
한제는 허공에 뜬 채로 덤덤하게 말했다.
부풍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보라색 빛을 소환해냈다. 그러자 일전의 그 비석이 나타나더니 허공을 찢어발길 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제에게 돌진했다.
비석 위의 수많은 문양이 번득이면서 하늘을 뒤덮는 강력한 힘을 형성해 한제를 압박했다.
한제 주위의 허공 반경 1천 척에서는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균열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허상으로 나타난 비석이 달려든 그 순간, 한제의 앞에 떠 있던 방패, 청광순(靑光盾)이 눈부시게 빛나더니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그 비석과 충돌했다.
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비석은 순식간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비석이 무너져 내린 순간 방패가 그 안에 깃들어 있던 원력을 몽땅 흡수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방패의 빛이 한층 휘황찬란하게 번득였다.
한제는 말없이 상황을 살피더니 손을 휘둘러 방패를 거두었다. 손으로 돌아온 방패를 바라보는 한제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웠다.
‘왕족의 법기는 아니지만 꽤나 수준 높은 고신이 만들어낸 물건이군. 아까 습득한 정보에 따르면 이것이 충분한 원력을 흡수하면 그 알 수 없는 고신의 봉인 속에 있는 구명(救命) 신통력까지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다!’
자제력이 뛰어난 한제도 이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8성급 고신이 만들어낸 구명 신통력이라⋯⋯ 대체 얼마나 강할까?’
한제는 마음을 다잡고는 방패를 한 줄기 녹색 빛으로 바꾸어 자신의 오른쪽 눈동자 안으로 녹여 넣었다. 그 순간, 한제의 긴 머리카락 아래에 가려진 오른쪽 눈은 깊은 남색 빛을 띠었다.
윤회 같은 꿈
그 시각, 수령성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천운성 근처로 한 줄기 긴 빛이 달려들었다.
이 빛의 주인은 바로 사도환으로 그의 주위로는 흘러넘칠 듯 강렬한 원력이 짙게 풍겼다.
검은 머리카락이 뒤로 나부끼면서 드러난 그의 거친 얼굴은 마치 마신(魔神) 같았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곁에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매우 아름다운 동시에 음탕한 느낌도 풍기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비행하고 있는 지금, 얇은 천으로 된 치마가 몸에 딱 달라붙으면서 굴곡진 여체가 여실히 드러났다.
“이 빌어먹을 천운성, 어찌나 찾기가 어려운지. 주위를 몇 바퀴 돌다가 운 좋게 이 선녀 같은 여동생을 만나게 되어서 망정이지, 그러지 못했다면 여태 찾지 못했을 거야.”
사도환의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곁에 있던 여인은 입을 가리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오호호! 선배님도 참. 한데 사도 선배님이 이 천운성에 오려고 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여인은 눈을 반짝이며 애교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의 형제를 찾기 위해서지.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 지금쯤 녀석의 수준이 어느 정도나 되었을지 궁금하군.”
사도환은 추억에 잠겨 속으로 뇌까렸다.
‘한제와 헤어진 지도 수백 년이 지났구나. 그간 녀석이 어떻게 지냈을지…’
“선배님의 형제분의 이름이 뭔데요? 혹시 제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잖아요.”
아름다운 여인이 웃으며 물었다.
“그 동생 녀석은 여색을 밝히지 않는 편이라 네가 알 가능성은 없을 거야.”
사도환은 짓궂게 웃으며 어느새 여인의 허리에 올려놓은 손으로 그녀의 몸을 지분거렸다. 여인을 안은 사도환은 크게 웃으며 천운성으로 돌진했다.
“홍분궁(紅粉宫)에 자매들이 아주 많다고 했지? 어디 가서 한 번 보자꾸나. 네가 말한 대로 모두들 그렇게 아름다운지.”
여인은 입을 가리며 웃더니 교태 어린 눈빛으로 사도환을 바라보았다.
“사도 선배님도 분명 만족하실 거예요. 우리 홍분궁 자매들을 잊지만 말아 주세요.”
그 말을 듣고 내심 의기양양해진 사도환은 봉란성의 그 아름다운 여인들을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언젠가 봉란성을 정복하는 날이 오면 한제 그 녀석과 함께 양쪽 팔에 여인들을 끼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겠노라고…
‘한제 그 녀석이 목석과도 같은 놈이라 문제야. 내가 수백 년간 가르친 것들을 낭비만 하고 있으니…’
사도환이 행복한 상상에 잠겨 있던 그때, 천운성에서 멀리 떨어진 수령성(水靈星)에서는 오른쪽 눈이 파랗게 변한 한제가 다시 궁전 안으로 돌아가 폐관수련을 시작했다.
몰려들었던 사람들도 하나둘 흩어지면서 수령성은 밤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그날 밤, 수많은 사람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 좌선을 하면서도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진도삼자도 그랬고 부풍자도 그랬으며, 영이라는 이름의 소녀 역시 그랬다.
그녀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인영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가 없었다. 좌선에 집중할 수도 없어서 아예 침상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거렸지만 끝끝내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어째서 그 거대한 인영을 보자마자 윤회를 꿈꾸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을까? 마치 그 순간 마음속에서 전에 없던 숭배심이 차오르는 것 같았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 고민하던 영이는 하늘이 밝아올 때가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
잠든 시간은 짧았지만 그녀는 꿈속에서 인생 전체를 경험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꿈속의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낯선 옷을 입은 채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세상에 있었다.
짙푸른 비단처럼 펼쳐진 하늘이 매우 아름다워 자꾸만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그녀는 구름을 뚫을 듯 높게 솟은 제단에 서 있었다. 그 제단 아래에는 기이한 옷을 입은 사내와 여인들이 가득했는데 그녀가 돌아보자 그들은 모두 바닥에 꿇어앉았다.
뒤이어 그들이 기이한 주문을 외는 소리가 하늘을 가득 뒤덮었다.
엄숙한 표정의 그녀는 두 팔을 벌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과 소통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참 뒤, 하늘에는 돌연 바람과 구름이 나타나 갑작스러운 변화를 일으켰다.
구름이 용솟음치면서 푸른 하늘을 가득 뒤덮었고 제단 아래 엎드린 사람들이 주문을 외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들의 표정에서 깊은 감격과 열광적인 숭배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병 모양으로 모아 쥔 두 손을 가슴에 댄 뒤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어떤 목소리가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돌연 하늘을 뒤덮은 구름층이 격렬하게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두 갈래의 강력한 빛이 그 위에서 곧장 대지로 쏘아졌다.
기이한 힘에 뒤덮인 구름층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 뒤에서 거대한 인영이 나타났다.
고신이었다.
거대한 고신은 허리 윗부분만 드러났는데도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울 듯했고 미간에서는 여덟 개의 반점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이 고신이 나타난 순간, 제단 아래에 자리한 모든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들의 얼굴에는 열광적인 빛이 드러났다.
꿈은 여기에서 돌연 끝나버렸다.
두 눈을 번쩍 뜬 영이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는 의식을 가지게 된 이후로 이런 꿈을 자주 꿔왔다.
허나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꿈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꺼려졌고 여태까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이인 조설이나 일진자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꾼 꿈이었지만 언제나 한 층의 얇은 천으로 뒤덮인 듯 명확하지 않았다. 한데 이한제를 만난 그날, 처음으로 그 얇은 천이 벗겨진 것처럼 꿈이 명확해졌다. 그리고 그날의 꿈을 통해 그녀는 마침내 꿈속의 모든 것을 명확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 상황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어째서 이 선배를 보자마자 어떤 친근감이 느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허나 그녀는 그 사실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꿈은 그저 환상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방금의 꿈으로 인해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녀가 잠들기 전 하늘에서 보았던 거대한 인영은 꿈속에서 보았던 거인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미간의 반점으로부터 무언가가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 전달되는 느낌만큼은 똑같았다.
자신의 꿈에 등장했던 거인이 실재하는 존재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그녀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 ★ ★
이른 아침, 영이는 방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작은 소리를 들었다. 한참이 지나도록 기척이 없자 방밖에 있던 조설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러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딜 간 거지?”
조설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몸을 돌려 떠나갔다.
그날 밤, 한제는 궁전에서 가부좌를 튼 채 수련에 임하고 있었다.
‘고신의 구명 신통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원력이 필요해. 전투를 통해 흡수하는 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고민에 빠진 한제는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잠시 호흡하던 그는 저물대에서 반짝이는 빛 하나를 꺼냈다. 그의 손바닥에 떨어진 빛이 느릿하게 흩어지면서 화려한 왕관이 나타났다.
왕관에는 붉은 그림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그림자에서는 보기 드문 고고함이 느껴졌다. 또한 붉은 그림자 밖에서는 한 줄기 금색 실이 맴돌고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금색 실은 아주 작게 축소된 한 마리 금룡(金龍)의 혼이었다.
금색 실은 붉은 그림자를 상당히 두려워하는 듯했고 오로지 붉은 그림자를 따라서 움직였다.
잠자코 왕관을 들여다보던 한제의 동공에 점차 그 옛날의 고운 붉은색 인영이 드러났다.
‘홍접⋯⋯.’
홍접은 당시 죽기 직전 한제에게 자신의 고향에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곳에서 한제는 푸른 장미 한 송이를 찾았는데 그 장미에서 피어나는 고고함은 홍접의 고고함과 똑같았다.
그 후 이 왕관을 찾은 한제는 푸른 장미와 왕관을 융합시켰다. 당시에는 왕관의 작용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 허무의 공간에서 금룡이 포효하며 왕관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본 후에야 한제는 순간 깨달음을 얻어 이 진정한 왕관을 꺼내 들었다.
왕관의 번득이는 빛 속에서 홍접과 똑 닮은 붉은 인영이 나타났다. 심지어 그 고고한 기운마저 똑같았다.
“홍접인가?”
한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홍접은 한제가 처음으로 탄복한 사람이었다. 설역국의 하늘의 딸, 즉 천녀(天女)라 불린 이 여인을 끌어들이고자 주작국(朱雀國)에서는 자신들의 규칙을 깨면서까지 설역국의 등급을 올려주었고 설역국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 역시 묵인해주었다.
한제가 중얼거린 순간, 왕관의 붉은 그림자는 한 번 진동했지만 다른 대답은 없었다. 허나 한제를 꺼리는 듯 그림자는 점점 흩어지려 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한제는 왕관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이것을 제련하여 내 통제에 따르게 만들 수만 있다면 요령의 땅에서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높아진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한제는 저물대를 두드렸다. 그 순간, 짙은 음기가 가득 피어오르더니 은빛을 발산하는 여인의 시체가 나타났다.
나천성역과 연맹성역의 큰 전투가 있던 날, 연맹성역에서는 해옥계(骸獄界)의 연시(煉尸)까지 동원한 바 있었다. 이 여인은 세 개의 최고급 연시 중 하나로 부상을 입은 뒤 한제의 손에 들어오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