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86
나천성역에서 한제의 정뇌선 자격은 사라졌지만 한제에 대한 소문만큼은 수백 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그 괴팍한 수련자는 머리가 저릿해졌다. 그는 마도자 허목이 얼마나 살육에 미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대의 조각상을 파괴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섬뜩한 일이었다.
그는 몸을 바르르 떨더니 곧장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나갔다.
염뇌자 등과 시음종 사람들 역시 그 조각상을 알아보고는 제자들에게 절대로 그것을 파괴하지 말 것을 엄하게 당부했다.
시음종과 나천성역 그리고 연맹성역의 각 세력들은 주작성에 모여든 뒤 각자가 가진 정보에 따라 수마해로 향했다.
사실 각 세력에서 주작성으로 보낸 수련자들의 수는 많지 않아 총 7천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이들은 말하자면 각 세력에서 탐사자들이었다. 정보에 대한 검증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그보다 훨씬 많은 수련자들이 지금 주작성 밖 우주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마해의 모든 금제는 이 첫 번째 탐사자들에게 아무런 위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이들은 파죽지세로 금제들을 뚫고 고신의 땅 입구인 쇄성란(碎星亂)에 이르렀다. 그 타원형 빛 고리로 이루어진 입구 안에서는 찢어지는 듯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입구를 통해 고신의 땅에 들어가면 마주하게 되는 첫 번째 관문에는 본래 끝이 없는 시커먼 심연 속에 원뿔 모양의 거대한 돌들이 떠 있었지만 지금 그 돌들은 모두 무너진 상태였다. 그리고 아래쪽의 시커먼 심연에서는 거친 눈알들이 번득였다.
당시 한제가 목숨을 거의 잃을 뻔했을 만큼 위험했던 곳, 뇌와를 발견한 곳이기도 했던 이곳에는 수많은 마수들이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쇄성란에서 울려 퍼지는 포효에 수련자들은 흠칫 놀랐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이들은 하나둘 그 빛 고리 안으로 달려들었다.
이 끝없는 심연에 첫 번째 수련자가 나타난 순간, 한 줄기 붉은 빛이 아래쪽으로부터 훌쩍 튀어 올라 순식간에 그 수련자의 몸을 뒤덮었다.
“큭!”
수련자는 몸을 바르르 떨면서 잠시 마비됐다. 눈 깜짝할 사이 달려든 붉은 빛은 길이가 약 10만 척에 달하는 핏빛 뱀으로 녀석은 입을 쩍 벌려 수련자를 집어삼켰다.
이것은 학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캬오오오!”
포효가 연이어 터져 나오면서 심연 안에서 수많은 짐승들이 튀어나와 수련자들과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피는 비가 되어 쏟아져 내렸고 이에 마수들은 더욱 사나워졌다. 점점 많은 수련자들이 들어서면서 학살로 인해 야기된 원력의 거대한 파동이 심연 깊은 곳까지 미쳤다.
당시 한제가 살피지 못한 이 심연의 아주 깊은 곳에는 잠들어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 존재의 두 갈래 붉은 눈은 저 멀리 떨어진 곳까지 꿰뚫어보듯 상공에 나타난 한 무리의 수련자들에게 향했다.
★ ★ ★
같은 시각, 고신의 땅 피바다 안. 거대한 원뿔형 바위 위에는 붉은 머리의 탁삼이 앉아 있었다. 그는 손톱으로 바닥을 긁어 날카로운 소리를 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일그러진 얼굴로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어딘가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탁삼의 손짓에 피바다에서는 층층이 파도가 일었고 지면을 뒤덮은 선혈이 격렬하게 끓어오르면서 하늘을 놀라게 할 정도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심지어 붉은 하늘도 왜곡되기 시작했다. 어떤 힘이 밖으로 뚫고 나가려는 것 같았다.
콰쾅!
격렬한 소리와 함께 한 줄기 균열이 하늘을 갈랐다. 길이가 족히 10만 척에 달하는 균열이 나타난 순간 상상을 초월하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고 이에 피바다가 진동했다. 또한 균열로부터 위압감이 끊임없이 발산되면서 지면의 피바다는 일렁임을 멈춘 채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번쩍이는 번개가 하늘과 균열마저 뒤덮었다.
고개를 든 탁삼은 잔인하게 웃으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왕족의 성물 멸신모(滅神矛)여, 탁삼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강림하라!”
그 외침에 균열에서 포효하듯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전광이 급속도로 번쩍거리면서 한 줄기 붉은 빛이 튀어나와 탁삼의 오른손으로 돌진했다.
탁삼이 틀어쥐자 그 빛은 잠시 발버둥 치다가 차차 저항을 멈추고는 1천 척에 달하는 붉은색의 긴 창이 되었다. 그 위로는 한 줄기 빛이 흘렀고 상상을 초월하는 기운이 발산되었다.
탁삼은 피비린내 어린 미소를 지으며 창을 세차게 휘둘렀다.
콰르릉!
요란한 소리를 울리며 튀어나간 멸신모는 곧장 하늘로 돌진했다. 이에 하늘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붉은 하늘을 관통하고 솟구쳐 오른 창은 더욱 빠른 속도로 고신의 땅에 자리한 겹겹의 관문을 꿰뚫고 심연에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도 빠른 속도와 쇄열기 수준 수련자마저 덜덜 떨 정도의 기운을 가진 창은 붉은 빛을 번득였다. 그 빛은 한 마리 용처럼 질주하여 마수들과 고투를 벌이고 있는 수련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수련자들은 멸신모가 나타난 순간 심신이 떨려왔다. 그들이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붉은 빛이 한 번 번쩍일 때마다 근처의 수련자들은 피를 뿜어냈다. 하지만 이 피는 흩어지지 않고 붉은 빛에 그대로 흡수됐다.
멸신모에 저항할 수 있는 수련자는 없었다. 번쩍 하는 순간 수천 명의 수련자 중 절반이 무너져 내렸고 남은 이들은 마수 떼에게 공격당하면서 부상을 당하거나 죽음을 맞았다. 살아남아 재빨리 흩어진 수련자는 1천여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붉은 빛으로 뒤덮인 멸신모는 흩어진 수련자들을 추격하지 않고 허공을 가로지르더니 고신의 땅 밖의 쇄성란으로 향했다.
그때, 주작성 전체가 콰르릉 하고 진동했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강림했다.
세상의 원력은 그 기운에 분분히 밀려났다. 마치 감히 멸신모 앞에 존재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붉은 빛이 10만 척 길이로 늘어나 번득이는 동안 수마해로 나간 멸신모는 한 줄기 번개처럼 하늘을 꿰뚫었다.
하늘 위의 강한 바람이 부는 층마저 갈라버린 멸신모는 곧장 우주로 진입했다.
주작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각 세력은 거의 동시에 심신을 강하게 흔드는 기운을 느꼈다. 허나 무슨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멸신모는 붉은 빛을 번쩍이며 뇌선전의 어느 대전을 향해 곧장 돌진했다.
멸신모에 관통된 뇌선전의 대전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더니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으로 갈라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멸신모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연달아 몇 채의 대전을 관통하며 무너뜨렸다.
시음종도 못지않은 타격을 받았다. 그들의 관들 역시 멸신모에 관통당하면서 무너져 내렸고 그 안에 있던 시체들 역시 순식간에 재가 되어 버렸다.
다른 세력들도 마찬가지였다. 멸신모는 이들 가운데 뛰어들어 단박에 수많은 수련자들을 꿰뚫었고 여기저기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중에는 연맹성역 어느 세력에 속한 쇄열기 수준의 노파도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멸신모를 저지하려 했으나, 멸신모는 거리낌 없이 노파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노파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가슴에 뚫린 구멍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원신마저 흩어져 버렸다.
염뇌자의 두 눈동자도 바짝 졸아든 채 곁에 있는 수많은 노인들과 함께 곧장 날아올라 멸신모를 향해 달려들었다. 시음종에서도 수련자들이 나서서 멸신모를 포위하려 했다.
허나 그 순간, 멸신모는 돌연 방향을 틀어 주작성 쪽으로 향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 고신의 땅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리고 멸신모가 떠나간 순간, 거친 목소리 한 자락이 세상에 울려 퍼졌다.
“기다리고 있겠다.”
곧 우주는 고요해졌다.
모든 사람은 착 가라앉은 얼굴로 두려움에 떨었다.
“저⋯⋯ 저게 대체 뭐였지?”
“이한제의 말이 사실이었어!”
염뇌자의 눈이 번득였다. 그가 이번에 이곳으로 온 것은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이 그리하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던 염뇌자는 이내 결심한 듯 외쳤다.
“나천성역 수련자들이여, 나를 따라 주작성으로 진입하라!”
말을 마친 그는 몸을 훌쩍 날려 주작성으로 향했다. 수많은 수련자들이 긴 빛을 그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시음종에서도 돌이 갈리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시음종, 출동!”
이에 시음종의 모든 사람들도 벌떼처럼 각자의 관을 들고 곧장 주작성으로 향했다. 대열의 가장 앞에 선 여덟 명은 모두 검은 안개로 뒤덮인 채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연맹의 각 세력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고 이내 절반 정도의 인원만을 남긴 채 각 세력의 종주나 장로를 뒤따라 주작성으로 향했다.
★ ★ ★
같은 시각, 고신의 땅 입구 안의 끝없는 심연 깊은 곳에서는 좀 전의 소동으로 잠에서 깨어난 존재가 서서히 위로 올라오면서 그 흐릿한 몸체를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길이가 약 20척 정도로 어렴풋한 인간의 형태인 듯했다.
허나 그 거구보다도 더욱 사람들의 심신을 뒤흔들 만한 것은 목이었다. 목에서는 마치 뱀 같은 열여덟 갈래의 뼈가 뻗어 나와 있었는데 각각의 길이가 족히 1천 척은 될 법했다. 그리고 각 뼈에는 남녀노소가 뒤섞인 머리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세상에 단 한 마리뿐이라는 이 짐승과 관련해서는 태고 시절부터 믿기 어려운 소문이 있었다. 태고에 길이라는 이름의 영혼이 있었다.
인간의 형태를 가진 그것은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존재로 생겨난 지 사흘 만에 성년이 되었고 하늘에 거역했다.
그러나 결국 패배해 머리가 잘렸고 그렇게 죽은 그 시체에서는 짐승 한 마리가 태어났다. 이 짐승은 길궁이라 불렸다.
길궁은 본래 머리 하나만을 가진 채 태어났는데 세상을 한 번 삼킬 때마다 머리가 하나씩 생겨났고 그 신통력은 배로 증가했다. 허나 결국 하늘에 거역하다가 영원히 잠들었다.
금색 자물쇠
한편 같은 시각, 우(雨)의 선계는 언제나처럼 평안했다. 하늘과 땅 사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균열과 대지의 진동만 제외한다면…
한제 일행의 수준은 우의 선계가 견뎌낼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이들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우계의 조각 중 하나가 무너지면서 거대한 흡인력을 발휘해 나머지 조각들을 끌어당겼다.
한제는 높은 곳에 서서 익숙한 우계의 조각들을 내려다보며 당시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렸던 그 조각을 찾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모인 수십 명은 모두 한제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이번 청룡성황을 구출하는 데 있어 그들은 한제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했다. 어쨌거나 한제는 주작성황이었으며 오직 그만이 청룡성황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제는 우렁찬 천둥소리와 함께 몸을 훌쩍 날려 아래로 내리 떨어졌다. 일행들 역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뒤를 따랐다.
우의 선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면 청룡성황을 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청림을 구하는 일도 다 물거품이 되기에 속도가 관건이었다. 다른 이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한제는 속도를 약간 줄이더라도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우의 선계에 최대한 충격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의 선계에는 균열이 점점 많아졌고 콰쾅 하는 요란한 소리도 전해져 왔다. 또 하나의 조각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한제는 당시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거대한 자물쇠 같은 산봉우리에서 들려왔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대지에 발을 딛자마자 신식을 펼쳤고 곧 1만 리 너머에서 그 산봉우리를 찾아내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그 산과 점차 가까워지면서 한제를 뒤따르던 청룡성종 장로들의 표정에는 감격이 드러났다. 그들은 오늘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왔다. 허나 기대가 큰 만큼 걱정도 클 수밖에 없었기에 심지어 도심까지도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저 멀리 자물쇠 같은 산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곳이다. 당시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들었던 곳이야!”
한제가 그쪽을 가리키자 그의 뒤를 따르던 청룡성종 장로들이 몸을 훌쩍 날려 그 산봉우리로 돌진했다.
“살려줘⋯⋯ 살려줘⋯⋯!”
그들이 산봉우리 근처에 이른 순간, 미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제는 곧장 멈춰 섰지만 다른 이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