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63
163
“후우.”
다른 기관투자자들도 잘 다독여야 되겠지만 김범진이 운용하는 미래투금 펀드가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니 일단 이걸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한쪽 손을 들어 목에 매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이동철은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었다.
하얀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 그는 오늘 일어난 일들을 차분히 정리했다.
통정거래에 끼어들어 물량을 떠넘기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 나온 찌라시 기사 그리고 바로 이어진 주가 폭락, 누가 봐도 잘 짜인 한 편의 시나리오였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까지 악재가 겹칠 수는 없었다.
누군가 손을 댔다는 걸 확신하는 또 한 가지 증거는 기사가 뜨는 것과 동시에 나온 대량의 매도 물량이었다.
혹시나 해서 차트를 확인해 보니 간격이 채 2분이 되지 않았다.
정확한 정보도 아니고 증권가 찌라시 기사만으로 이렇게 빨리 매도 주문을 넣는다는 건 사전에 조율이 되어 있지 않다면 어려운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이때 나온 매도 주문에 겁을 집어먹은 개미들이 너도나도 주식을 던지면서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결정타를 먹인 건 장 막판에 나온 10만 주짜리 매도 폭탄이었다.
4만 원선에 걸치면서 하락세가 줄어드는 것 같았던 주가가 감당 안 되는 물량에 그대로 저지선이 깨져 버린 것이다.
같은 편을 믿지 못한 조현태가 벌인 팀 킬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이동철 입장에서는 정말 뼈아픈 일이었다.
엉망으로 망가진 주가 차트를 어떻게 다시 살릴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급한 대로 홍콩으로 빼돌렸던 자금을 투입하고 마지막 패로 쓰려고 아껴 뒀던 다이아몬드 원석을 공개한다면 어느 정도 상황이 수습될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쩐지 이게 끝이 아닐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자꾸만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 주식시장이 열리자마자 어제의 충격을 말해 주듯 TC인터내셔널은 쏟아지는 매도 주문과 함께 큰 폭의 하락을 기록하면서 출발했다.
하지만 김인철 쪽에서 매수를 통해 물량을 받아 내고 증권 방송과 여러 경로를 통해 다시 약을 쳐서 그런지 하락세는 차츰 진정됐다.
여전히 불안했지만 어제 있었던 폭락장 속에서도 대주주와 기관 투자자 들이 주식을 던지지 않고 계속 가지고 있다는 것에 패닉에서 벗어나 조금씩 안정을 찾아 갔다.
아지트로 쓰고 있는 임대 사무실.
한쪽 벽에 설치된 대형 텔레비전으로 TC인터내셔널 주가 차트를 지켜보던 혁권은 예상대로 진행이 되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정말 말씀하신 대로 하락세가 멈췄군요.”
감탄한 얼굴로 하킴이 쳐다보자 그는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사탕을 꺼내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금방 손 안에 넣을 것 같던 돈을 그냥 흘려보내기는 어려운 법이지.”
그때 안주머니에 넣어 둔 대포폰이 진동을 했다.
우웅.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한 혁권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
그러자 특유의 활달한 목소리로 카민스키가 이야기를 했다.
-아주 재미있는 소식이 있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
-방금 이동철이 보유한 주식을 팔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한 가지 정보를 줬는데 그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나랑 스무고개라도 하자는 거야?”
-딱딱하시기는. 그러시면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바쁘니까 본론만 말해.”
조금은 퉁명스러운 혁권의 태도에 카민스키는 김이 빠졌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저쪽에서 오늘 기자들을 불러 놓고 다이아몬드 원석을 공개한다고 합니다.
“다이아몬드 원석이라고?”
-예. 그것도 무려 100캐럿짜리라고 하더군요.
100캐럿이라는 말에 혁권의 눈이 살짝 커졌다.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 원석을 가져다 놓고 시에라리온 광산에서 캐낸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제법 머리를 잘 굴렸지 않습니까?
“설마 진짜 시에라리온에서 원석을 캐낸 건 아니겠지?”
-당연하지요. 그랬으면 이렇게 골치 아픈 짓을 벌이고 있겠습니까.
카민스키의 이야기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100캐럿이나 되는 원석이 갑자기 어디서 난 거야?”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어디서 잠시 빌려온 거겠지요.
“그게 가능해?”
-그 정도 되는 원석이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못 구할 물건도 아닙니다. 보석 거래가 활발한 런던이나 홍콩 쪽에 가서 발품을 팔면 어렵지 않게 빌릴 수 있습니다. 물론 비용이 꽤 들겠지만요.
“그렇군.”
갑자기 그만한 크기의 다이아몬드 원석을 구하지는 못했을 테고 D-데이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주가를 띄우기 위해 김인철이 준비해 놓은 패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거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한국어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혁권은 대포폰을 고쳐 쥐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또 쓸 만한 정보가 있으면 바로 연락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한쪽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잠시 고심하던 혁권은 이내 다시 대포폰을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사람은 홍콩에 있는 L&S코프레이션 임원인 스텐저였다.
“존슨입니다.”
가명을 대자 스텐저가 반갑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어제 TC인터내셔널 주가가 크게 꺾인 건 아시지요?
“그래서 말인데 내일부터 HK펀드를 뺀 나머지 보유 지분을 조금씩 쪼개서 처분해 주십시오.”
-당장 정리하는 것이 아니고요?
의아한 듯 상대가 되묻자 그는 분명한 어투로 재차 이야기를 했다.
“네. 내일입니다.”
-흐음.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지시였다.
하지만 최종 결정권은 언제나 고객 본인한테 있는 것이고 TC인터내셔널이 작전주라는 걸 알았기에 딱히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처리를 하죠.
전화를 끊은 그는 입가에 짙은 미소를 머금은 채 3만 원 후반에서 등락을 거듭하고 있는 TC인터내셔널 주가를 지그시 바라봤다.
발표를 앞두고 대기실에 모인 두 사람은 약간 긴장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잘되겠지?”
“당연하지요. 무려 100캐럿짜리 원석입니다. 영국 여왕의 왕관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와 필적할 만한 물건이니 절대 실패할 리 없습니다.”
이동철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물론 여왕의 왕관에 있는 다이아몬드는 가공된 것이었지만 어쨌든 이만한 원석이 자주 나오는 건 아니다.
게다가 다른 것들은 왕가의 보물이니 뭐니 하여 대중에 공개되는 일이 적으므로 국내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다이아몬드 원석이니 적어도 화제성 하나만큼은 뒤지지 않으리라.
그런 굳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시계 초침이 흘러갈 때마다 조금씩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부하인 이동철이 있어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것이지, 혼자였다면 벌써 중압감에 못 이겨 술을 입에 대거나 한쪽 다리를 덜덜 떨면서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고 말았을 것이었다.
입 안에 침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기다리기를 10여 분 쯤.
드디어 시작 5분 전이라는 신호가 들어왔고, 두 사람의 앞에 설치된 커다란 LED 화면에 발표회장의 모습이 비쳤다.
이미 기자들은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맨 앞자리는 조금이라도 사진을 더 잘 찍기 위해 삼각대와 대포 같은 렌즈를 무기로 앞세운 카메라맨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 시작하려나 봐.”
“그 소문이 사실일까? 100캐럿짜리 원석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할까?”
“못해도 수십억은 넘어가겠지.”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기자가 볼펜으로 귀 옆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이만한 원석이 우리나라에서 공개되는 건 몇 번 없었지?”
“아, 그래. 나도 사진으로만 봤으니까.”
“이게 정말 시에라리온 광산에서 캔 거라면 TC인터내셔널은 완전 대박이 난 거군.”
“왜 주식이라도 사게?”
동료가 장난스럽게 묻자 기자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못 할 것도 없지. 가격도 조금 떨어졌던데.”
“저번에 깡통을 차 놓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쳇.”
기자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TC인터내셔널 직원 서너 명이 무대 한쪽에서 올라왔다.
이제 슬슬 시작하려는가.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약한 열기와 흥분감이 고조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기대에 부응하듯, 마침내 커다란 천에 감싸인 상자가 등장했다.
양손에 얇은 장갑을 낀 직원이 상자를 안고 계단을 오르는 동안 천 사이로 슬쩍 투명한 유리판과 바닥을 풍성하게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벨벳이 엿보였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마이크를 든 사회자가 기자들을 향해 인사했다.
그는 상투적으로 쓰는 멘트들을 주워 삼키다가, 이내 잔말하지 말고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기자들의 눈빛을 보고선 알겠다는 듯 눈가를 휘며 웃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간 여러분께 원망을 살 것 같으니, 인사는 이쯤 해 두도록 하지요.”
그리고 그는 무대 위에서 준비하고 있던 직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개합니다. 저희 TC인터내셔널에서 준비한 지상 최고의 보석! 시에라리온 광산에서 캐낸 100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원석입니다!”
화악!
상자에 덮여 있던 붉은 천이 벗겨지며, 드디어 대중 앞에 커다란 다이아몬드 원석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쏟아지는 밝은 조명 아래 오로지 다이아몬드만이 낼 수 있는 투명한 광채가 찬란한 빛을 뿜었다.
어린아이의 주먹 크기만 한 그것은 아직 세공을 거치지 않아 투박한 면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인지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박력이 있었다.
“와.”
“맙소사.”
몰려든 기자들조차 순간적으로 넋을 잃고 신음을 뱉을 정도였으니 그 존재감이란 엄청난 것이었다.
모두가 커다란 다이아몬드 원석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가장 먼저 본능적으로 손을 움직인 것은 탁월한 피사체를 앞에 둔 카메라맨들이었다.
파바바박!
마치 전쟁터에서 총알을 쏘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터지는 셔터 소리가 요란했다.
그와 함께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다이아몬드 원석 태양처럼 화려하게 빛났고, 오로라같이 일렁이는 아름다운 섬광을 사진에 담기 위해 카메라맨들은 더욱 열성적으로 셔터를 눌러 대었다.
홀 한쪽에서 그런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김인철은 다시 자신감을 찾은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첫 번째 폭락을 기록하고 사흘째 되는 날.
적극적으로 언론 플레이를 펼치고 매물을 주워 담은 덕분에 하락을 멈추고 3만 원 후반대에 머물면서 관망세를 유지하던 TC인터내셔널 주가는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어제 공개한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인해 회사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는 다시 회복된 거였다.
사실 시에라리온에서 개발권을 획득한 다이아몬드 광산의 가치를 생각하면 TC인터내셔널은 아주 유망한 종목이었다.
여기에 5만 원대를 넘보던 주가가 떨어져 3만 원 후반대에 머물자 상대적으로 싸졌다는 느낌도 한몫했다.
물론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주당 300원에 불과한 잡주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