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44
244
그가 얼음이 담긴 위스키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실 때 자말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이집트에서 아파트 단지 공사를 했던 태일건설 말입니다. 결국 받지 못한 공사 미수금을 다 떼일 것 같습니다.”
“결국 그렇게 됐군.”
몇 달째 공사대금 지급이 밀리고 그걸 못 참은 태일건설에서 현장 철수를 결정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한 결과였다.
“미수금이 3억 달러가 넘는다고 했지?”
“3억 2천만 달러입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상황을 방치했다니 정말 한심하군.”
“5천 세대가 넘는 아파트 단지에 도로와 병원 같은 주변 편의 시설까지 함께 짓는 대규모 공사였기에 쉽사리 포기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자말의 이야기대로 거의 신도시를 하나 새로 짓는 규모의 건설 프로젝트였다.
공사금만 9억 달러, 환화로 1조 원에 달하는 초대형 토목공사로 민주화 혁명이 터지면서 축출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국가사업이었다.
만성적인 카이로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무바라크 대통령의 치적治績 사업인 만큼 혁명 전까지만 해도 아주 순조롭게 공사가 진행됐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며 사업을 기획한 무바라크 대통령이 권좌에서 밀려나고 바로 이어서 정치 혼란과 함께 극심한 경제난이 이집트를 덮치자 일이 삐걱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국가 재정도 어려운데 새로 집권한 정부 입장에서는 쫓겨난 무바라크 대통령이 추진하던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공사 미수금 또한 지급할 의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고, 이런 상황 변화를 빨리 알아차리지 못한 태일건설만 수익은 고사하고 엄청난 공사 대금만 떼일 처지가 된 거였다.
“그래도 상황 판단이 조금만 더 빨랐다면 피해를 이렇게까지 크게 키우지는 않았을 거야.”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
“어찌 됐건 우린 운송비를 다 받았으니까 상관없는 일이지.”
퇴사를 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정도 모두 떨어졌기에 혁권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내 신경을 껐다.
급히 행선지를 바꾼 쉬굼바와 부하들은 파리를 거쳐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했다.
시내에 있는 자그마한 호텔에 짐을 푼 쉬굼바는 또다시 어딘가로 훌쩍 떠나 버리기 전에 혁권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커튼을 모두 내린 방 안에서 쉬굼바는 탁자 앞에 혼자 앉아 암거래상을 통해서 구한 권총을 분해해 손질하고 있었다.
권총은 구소련제 토카레프 TT-33이었다.
미국의 M1911 권총을 모방해서 만든 것으로 장탄수 9발에 총구 속도가 매우 빨라 관통력이 우수했다.
특징은 대량생산을 위해 안전장치가 없다는 거였다.
일부 나중에 만들어진 것과 라이선스 생산형은 수동식 안정장치가 추가되기도 했지만 쉬굼바가 가지고 있는 건 구형 모델이었다.
칠이 여기저기 벗겨져 있는 것이 오래된 티가 확 났는데 그대로 총을 쏘는 데는 큰 이상이 없었다.
깨끗한 헝겊에 윤활유를 묻혀 부품을 하나씩 닦아 내고 있을 때 부하인 조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손에 든 헝겊을 내려놓은 쉬굼바는 상체를 바로 하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
“아테네 외항인 피레아스 항구 근처 콘도를 통째로 매입해서 본거지로 쓰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아직 목표가 그대로 머물고 있기는 합니다만 워낙 경비가 삼엄해서 콘도를 바로 공격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군.”
대충 예상한 일이라는 듯 쉬굼바는 가만히 머리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놈이 밖으로 나왔을 때를 노려야 되겠군.”
“하지만 호위 차량 두 대가 항상 따라다니기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맨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
헝겊을 다시 들고 잠시 멈췄던 권총 손질을 이어 나가는 쉬굼바의 말투가 담담했다.
“콘도 앞에 감시는 붙여 놨겠지?”
“예.”
“길게 시간 끌 필요 없어. 놈이 움직이면 바로 덮친다.”
조나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 이상 할 말은 없다는 듯 원래 하던 일에 집중하는 쉬굼바를 두고 조나가 방을 나가자 실내엔 부드러운 헝겊으로 총신을 닦는 규칙적인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쉬굼바는 미처 몰랐지만 파리에서부터 그들을 주시하는 시선이 있었다.
파리에 위치한 CIA 지부 사무실에 앉아 있던 샌더슨은 얇은 서류철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인 샌더슨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부하인 루이스를 봤다.
“그러니까 이놈들의 목표가 미스터 김인 것 같다, 이거지?”
그러자 미식축구 선수 출신답게 어깨가 딱 벌어진 루이스가 맞은편에 앉아 있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테러범이라 생각하고 공항에서부터 추적을 했는데, 파리에서 곧장 아테네로 넘어가서는 줄곧 미스터 김 주변을 맴도는 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유는 얼마 전에 있었던 블러드 다이아몬드 거래 때문이겠군.”
나름 비밀스럽게 거래를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CIA의 감시망을 피할 수는 없었다.
“생각하시는 것이 맞을 겁니다.”
“몇 명이라고 했지?”
“모두 일곱 명입니다. 그중에 한 명은 쉬굼바라고 문둥가 반군 사령관의 측근입니다.”
“아주 작정을 하고 보냈군.”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팔아서 번 액수가 1억 달러라고 하니 꼭지가 돌아갈 만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인 샌더슨은 이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이놈들이 미스터 김의 동선을 어떻게 알고 아테네까지 쫓아온 거지?”
“저희 판단에 의하면 누군가 고의적으로 반군한테 정보를 지속적으로 흘려 주는 것 같습니다.”
“그게 누구냐 이거야.”
살짝 미간을 좁힌 샌더슨이 짜증을 내자 루이스가 신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보헤멘 회장이 유력합니다.”
“보헤멘이라면…… 드비어스사 회장을 말하는 거야?”
“예.”
그러자 샌더슨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구입해 놓고 뒤로 반군한테 정보를 흘리다니…… 이거 아주 재미있군.”
“어떻게 할까요?”
“뭘 말인가?”
“저쪽에서는 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 못 채고 있는데 그냥 놔둬도 되겠습니까.”
재떨이에 담배를 가볍게 털며 샌더슨이 입을 열었다.
“다루기가 조금 까다롭긴 해도 아직 꽤 쓸모가 있는 자인데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이번 기회에 빚도 하나 지워 두고 말이야.”
“맞는 말씀입니다.”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그만 나가 봐.”
“네.”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루이스가 방을 나가자 혼자가 된 샌더슨은 한쪽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잠시 뭔가를 생각했다.
그러다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혁권한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요. 샌더슨.”
-무슨 볼일이오?
퉁명스러운 혁권의 반응에 샌더슨이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별로 반갑지 않은 사람인 건 알지만 이거 너무 티 나게 말하는 거 아니오?”
-함께 놀아 줄 시간 따위 없으니까 용건만 짧게 말하시오. 아님 끊겠소.
“하하하. 알겠소.”
샌더슨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느긋하게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에 런던에서 꽤 큰 거래를 했다고 들었소.”
-…….
혁권은 이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뭘 하든 그쪽에서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소?
“블러드 다이아몬드에는 관심이 없으니 오해는 하지 마시오.”
-그럼 뭐요?
“우연히 알게 된 정보인데 문둥가 사령관이 유럽에 킬러들을 보낸 것 같소.”
뜻밖의 이야기에 혁권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샌더슨은 재미있다는 듯 반응을 살폈다.
“다이아몬드를 처분해서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둥가 사령관이 화가 아주 많이 난 모양이오.”
-확실한 정보요?
“이미 아테네까지 쫓아와 있다니까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요.”
-으음.
이미 몰타에서 한번 습격을 경고해 준 적이 있었기에 그는 샌더슨의 이야기를 흘려들을 수 없었다.
“원한다면 관련 정보를 넘겨줄 수도 있소?”
-물론 공짜는 아니겠지.
“후후후. 원래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이 있는 법 아니겠소. 나중에 필요할 때 한번 도와주면 되오.”
어쩐지 상대한테 끌려가는 것 같아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지금 아쉬운 건 자신이었기에 혁권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소.
“잘 생각했소.”
스마트폰을 귀에서 떼며 샌더슨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걸려 온 전화를 받은 혁권이 인상을 구긴 채 스마트폰을 내려놓자 앞자리에 앉아 있던 자말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겁니까?”
“반군이 날 노리고 킬러를 보냈다는군.”
“그게 무슨……!”
자말이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내가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처분한 걸 알게 된 모양이야. 벌써 아테네에 들어와 있다는군.”
“그럼 큰일이지 않습니까.”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자말과 달리 혁권은 자신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데도 불구하고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그렇게 호들갑 떨지 않아도 돼. 존재가 파악된 이상 놈들한테 당할 일은 없으니까 말이야.”
“어쩌실 겁니까?”
“날 찾아 여기까지 왔다는데 환영 인사를 확실하게 해 줘야지.”
그리 크지 않게 이야기를 했지만 매섭게 번득이는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 어려 있어 자말은 무의식적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 같았는데 흥분하지 않고 얼음처럼 차갑고 냉철하게 행동하는 것이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부하들로 열 명 정도를 추려 놔.”
“먼저 손을 쓰실 생각이십니까?”
“상대를 알고 있는데 굳이 앉아서 기다릴 필요는 없잖아.”
“맞는 말씀입니다.”
“분명 우릴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 봐.”
“예.”
자말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고 얼마 있지 않아 스마트폰 알람이 울리면서 샌더슨이 보낸 메일이 도착했다.
메일을 열자 파리 공항 세관 심사대에서 찍힌 쉬굼바와 부하들의 얼굴 사진과 현재 위치가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액정 화면 가득 떠 있는 쉬굼바의 얼굴을 그는 한참 동안 가만히 내려다봤다.
쉬굼바는 호텔 창가에 서서 물끄러미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해가 지고 불이 하나씩 켜진 아테네 야경은 생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뉴욕이나 파리 같은 대도시의 화려함은 없지만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마치 수만 개의 별들이 지상에 내려와 있는 것처럼 빛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특히나 시내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리카비토스 언덕과 아크로폴리스는 조명을 받아 마치 인간 세계 위에 떠 있는 신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낮게 감탄성을 내뱉던 쉬굼바는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풍족하게 지내는 그리스 사람들과, 오랜 내전으로 피폐해 있는 시에라리온의 상황이 너무나도 비교가 됐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높은 이상과 의지를 가지고 총을 들었지만 어느새 그런 건 다 사라져 버리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한 회의감이 밀려오면서 쉬굼바는 문득 혁권이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팔아서 받았다는 1억 달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고생을 해서 복귀한다고 해도 결국 문둥가 사령관만 좋은 일을 시킬 뿐 자신한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그 돈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침대 옆 탁자에 놔둔 스마트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띠리릭. 띠리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