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69
269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 속보를 쳐다보며 기차 출발 시간을 기다리던 혁권은 경찰 두 명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고 살짝 얼굴을 굳혔다가 폈다.
허리에 권총을 찬 경찰관들은 이쪽에 시선을 준 채 곧장 걸어오고 있었다.
옆에 있던 하킴도 상황을 눈치채곤 바짝 몸을 긴장시켰다.
여차하면 안쪽에 숨겨 둔 권총을 뽑아 들려고 손을 움직이려는 걸 혁권이 가만히 잡으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신호하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어.”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면 일이 완전히 꼬인다는 걸 하킴 역시 모르지 않았기에 작게 머리를 끄덕이곤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사이 경찰관들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신분증 좀 확인하겠습니다.”
각진 얼굴에 푸른 눈을 가진 경찰관이 두 사람을 아래위로 훑어보곤 한쪽 손을 내밀었다.
“왜 그러십니까?”
혁권이 유창한 영어로 묻자 경찰관이 약간 짜증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런던에서 일어난 테러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 협조 부탁드립니다.”
말과 달리 강압적인 목소리에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가차 없이 체포라도 할 기세였다.
괜히 문제를 만들어서 좋을 것이 없는 입장이었기에 그는 순순히 안주머니에서 여권을 꺼내 보여 줬다.
경찰관의 건네받은 두 사람의 여권을 천천히 살펴보고는 옆에 앉아 있는 하킴을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셈 모하마드가 그쪽 이름이오?”
“그렇습니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요?”
함부로 건드리면 골치 아픈 미국 여권이라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고 있었지만 거의 시비조였다.
아무래도 방송 뉴스 속보에서 오늘 벌어진 사건의 배후에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이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이야기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나오자, 한눈에 봐도 아랍계인 하킴을 계속 걸고넘어지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괜히 꼬투리라도 잡히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었기에 혁권이 슬쩍 끼어들면서 말했다.
“비즈니스 때문에 온 겁니다.”
그러면서 만약을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 둔 가짜 회사 명함을 하나 꺼내서 보여 줬다.
처음부터 의심스러운 것이 있어 검문한 게 아니라 눈에 확 띄는 아랍 사람을 보고는 괜히 시비라도 걸려는 마음으로 온 거였기에 경찰관은 건성으로 확인을 하고는 여권과 함께 돌려줬다.
멀어지는 경찰관들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살짝 이맛살을 찡그렸다.
“이런 식이면 다른 길로 간 일행은 상당히 어려움을 겪겠는걸.”
그나마 여긴 혁권이 있어서 큰 의심을 받지는 않았지만 다른 조는 둘 다 아랍계였기에 오히려 시선을 끌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에 머리가 아팠지만, 이미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다시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보스, 이제 기차에 타셔야 될 시간입니다.”
고개를 들어 힐끗 한쪽 벽에 붙어 있는 시계를 확인한 혁권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킴과 함께 승강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MI5의 상황실.
벽면 전체를 뒤덮은 모니터에는 런던 시내에 위치한 CCTV의 영상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몇 초마다 각도를 바꿔 가면서 전환되는 영상은 그야말로 사각지대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으나, 절묘하게 허점을 노린 테러범들 때문에 사건 조사는 난항을 겪고 있었다.
“용의자들의 모습이 좀 더 자세하게 나온 장면은 없나?”
젬블레 팀장의 물음에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요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확보한 CCTV 화면 중에선 그나마 이게 제일 나은 겁니다.”
처음 사고가 벌어졌을 때부터 꼬박 반나절 이상을 계속 모니터만 붙잡고 있었던지라 코끝에 걸친 안경을 벗고 눈 사이를 매만지는 손길이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쯧.”
젬블레 팀장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처럼 혀를 차고는 모니터에 비친 녹화 영상을 노려보았다.
CCTV는 사건이 발생한 워털루 브리지가 아니라 시내에서 회수한 것이었다.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몰라도 사건 현장 근처에 있던 CCTV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쓸 만한 영상은 하나도 건지지 못했고, 그나마 시내를 이 잡듯이 뒤진 끝에 겨우 발견한 것이 이 영상 하나였다.
화면은 워털루 브리지가 아니라 소호 쪽으로 향하는 시내의 교차로 중 하나를 비치고 있었다.
일반 차량들 가운데 오토바이를 탄 일행이 여섯.
모두 피에로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린 상태였으며, 검은색 위장복에 전술 조끼를 걸치고 군화까지 갖춰 입은 차림새였다.
“어지간히도 꽁꽁 싸맸군.”
건장한 남성이라는 것 외에는 인종도, 머리카락 색도 식별할 수가 없으니 그가 골머리를 앓는 것도 당연했다.
“정체를 감추려고 준비를 철저히 한 것 같습니다.”
“놈들도 들키면 끝이라는 걸 아는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작은 흔적이라도 남기 마련이었지만 아직까지는 그걸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좀 더 확대해 봐.”
요원이 마우스 휠을 돌리자 일행의 모습을 잡은 화면은 커졌으나, 픽셀이 깨져 아까보다 훨씬 더 알아보기 힘들었다.
“보정 프로그램을 돌려 보겠습니다.”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길이 바빠지고, 반쯤 뭉개졌던 화면이 조금은 선명해졌다.
하지만 젬블레 팀장의 기대와는 달리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이 이상은 무립니다.”
“어떻게 더 안 되나?”
“애초에 교통용 CCTV 화질 자체가 좋은 편이 아닌 데다, 거리가 원체 떨어져 있어서요. 슈퍼컴퓨터를 갖다 줘도 지금 이상으로 화질을 좋게 끌어올리진 못할 겁니다.”
그 말에 젬블레 팀장의 인상이 확 찡그려졌다.
조금이나마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막다른 벽에 부닥친 느낌이었다.
팔짱을 낀 채 모니터를 잠시 바라보던 젬블레 팀장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소호에서 놈들이 갈아탄 차량 번호는 확인했어?”
“예. 조회 결과 01년식 폭스바겐 뉴비틀로 나왔습니다.”
“차량 종류가 다르잖아.”
동선을 따라가서 확인한 차량은 분명 구형 폭스바겐 샤란이었다.
“아무래도 혼선을 주기 위해서 번호판을 바꾸어 단 것 같습니다.”
“M1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세인트 올번스에서 빠졌다고 했지?”
“네. 현재 주변 지역에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이야기를 듣던 젬블레 팀장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고속도로에 들어가고 나오려면 톨게이트Tollgate를 통과해야 되잖아.”
“그렇지요.”
“거기 있는 CCTV에 용의자들의 얼굴이 잡히지 않았을까?”
그러자 요원이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잡히긴 했는데……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보시죠.”
요원은 마우스를 움직여서 톨게이트 CCTV 영상을 모니터에 띄웠다.
“이게 뭐야?”
영상을 확인한 젬블레 팀장이 얼굴을 구기자 요원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보시다시피 모자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서 얼굴을 전혀 식별할 수 없습니다. 거기다가 앞 유리창에 뭘 뿌렸는지 햇빛이 강하게 반사돼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요.”
확실히 거리는 가까웠으나 요원의 말대로 화질은 완전 엉망이었다.
기껏 떠올린 생각조차 쓸모없었다는 게 밝혀지자 젬블레 팀장은 쓴 약이라도 삼킨 것처럼 떨떠름한 표정으로 무릎을 쳤다.
앞뒤로 길이 다 막혀 버렸으니 이젠 어디를 파야 할지 도통 짐작조차 되질 않았다.
그렇게 막막한 심정을 속으로 삼키고 있는데, 그때 급한 발걸음으로 다른 요원이 가까이 다가왔다.
“팀장님!”
“왜 그래?”
짜증 가득한 마음에 말투가 자연스럽게 퉁명스러웠다.
“용의 차량을 찾아냈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다그치듯 묻자 요원이 곧장 대답했다.
“세인트 올번스 근처에 위치한 국도 변입니다. 그런데 이미 의도적으로 차량에 방화를 하고 놈들은 사라지고 난 뒤였습니다.”
소호 지역에 있는 소극장에 이어서 또다시 뒷북을 친 꼴이었지만, 어찌 됐건 용의자들의 행적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거기서 차량을 버렸다면 아직 주변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겠군. 주변 지역 CCTV 영상을 전부 확보하고 세인트 올번스로 요원들을 보내!”
“이미 분석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좋았어.”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꼬리를 하나씩 잡아 가는 이상 곧 뒷덜미를 낚아채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며 젬블레는 눈빛을 번들거렸다.
사우샘프턴Southampton은 영국 남동부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로마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 정도로 역사가 깊은 곳이었다.
한때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정기 여객선의 출발지로 크게 번성하기도 했는데, 전성기는 지났지만 지금도 주요 항구로 수많은 배들이 오갔다.
도시 동쪽 오션 빌리지 선착장에는 크고 작은 고급 요트들이 빼곡하게 정박해 있었다.
그런 선착장 한쪽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혁권이 선글라스를 끼고 모습을 드러냈다.
옆에는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하킴이 붙어 있었다.
요트를 구경하면서 얼마쯤 서 있자 이마에 굵은 주름살이 있는 백인 중년인이 가까이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로커 씨 되십니까?”
고개를 돌린 혁권은 선글라스 뒤에 숨겨진 눈으로 날카롭게 상대를 훑어보고는 능숙한 영어로 입을 열었다.
“브루노 씨?”
“예. 제가 통화를 했던 브루노입니다. 빨리 나온다고 했는데,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배부터 보시겠습니까?”
중년인이 두 손을 가볍게 비비면서 묻자 그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죠.”
“이쪽입니다.”
계류장 안쪽으로 얼마쯤 걸어간 중년인은 한쪽 손을 들어 정박해 있는 요트 하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배입니다.”
시선을 돌리자 새하얀 그림처럼 아름다운 보트가 눈에 들어왔다.
“요트 명가인 이탈리아 페레티사에서 만든 페레티780입니다. 전체 길이가 74피트(22.4미터)에 너비 19피트(5.8미터)로, 내부에 3개의 침실과 응접실을 갖추고 있어 바다 위에 떠 있는 스위트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디지털 운항 장치를 갖춰서 조종도 아주 간편하게 되어 있습니다.”
중년인이 침을 튀겨 가며 설명했지만 그런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요트는 아름다웠다.
자동차와 아름다운 트로피 아내 다음으로 재력을 갖춘 사내들이 욕심내는 물건이 요트라고 하더니, 직접 와서 보니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저절로 이해가 됐다.
“어떻게 마음에 드십니까?”
“렌트비가 얼마라고 했지요?”
“하루에 1,442파운드입니다. 조금 비싸기는 해도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한화로 200만 원 남짓 되는 액수였다.
확실히 비싸기는 했지만 직접 요트를 보고 있자니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쓴 채 잠시 요트를 바라보던 혁권은 이내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이걸로 빌리겠소.”
“잘 생각하셨습니다.”
간만에 올린 큰 건수에 중년인은 반색을 했다.
혁권은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3박 4일간 총 5,768파운드(한화 800만 원)에 요트를 빌리고 부가적인 서비스 비용으로 6,000파운드를 더 지급했다.
이렇게 큰돈을 써 가며 고급 요트를 빌린 건 영국 정보당국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공항이나 일반 여객선을 이용하는 것보다 고급 요트를 타면 감시가 덜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혁권과 부하들의 여권을 받아 간 중년인은 런던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출입국 심사가 상당히 까다로울 텐데도 불구하고 금방 출국 스탬프를 찍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