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1
31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혁권은 상대를 재촉하지 않고 충분히 생각을 해 보도록 가만히 기다려줬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고심을 거듭하던 유기백은 앞에 있던 술잔을 집어 단숨에 들이켰다.
“좋아. 까짓것 해 보지, 뭐!”
호기롭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유기백이 외쳤다.
제안을 받아들일지 반신반의했던 혁권은 그때서야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수고비는 두둑이 챙겨 주지.”
“지랄.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준 봉투도 이러려고 미리 밑밥을 깔아 둔 거지!”
유기백이 눈을 치켜뜨며 묻자 혁권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 정도로 약삭빠르지는 않아.”
“흥. 시꺼먼 속을 누가 알아.”
“이거 섭섭한데.”
“웃기지 마.”
가볍게 투덕거리면서 두 사람은 다시 술잔을 부딪쳤다.
* 카다피 컬렉션
며칠 뒤.
몇 가지 일을 더 처리한 혁권은 다시 리비아로 돌아왔다.
갈 때와 달리 커다란 캐리어를 손에 끌고 입국장을 나오자 마중을 나온 자말이 앞으로 다가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별일 없었지?”
“예.”
대답과 함께 자말이 그가 가져온 캐리어를 대신 잡았다.
“비행기를 세 번이나 갈아탔더니 피곤하군. 숙소로 바로 가지.”
“그러시죠. 이쪽입니다.”
자말이 앞장을 서자 혁권이 그 뒤를 따라갔다.
대낮인 데다 막 일주일에 한 번뿐인 비행기가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트리폴리 국제공항은 인적이 거의 없었다.
여기저기 군인들이 무장을 한 채 경비를 서고 있어 분위기를 더욱 삭막하게 만들었다.
천천히 걸어가던 혁권은 힐끗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공항 경비가 더 삼엄해진 것 같군.”
그러자 자말이 살짝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며칠 전에 반정부 단체들이 대공미사일을 쏴서 공항을 이륙하는 여객기 격추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일이 있어서 그럴 겁니다.”
“허어. 대공미사일이라니.”
혁권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어떤 미친놈들이 그런 일을 벌인 거야?”
“소문으로는 이슬람 형제단의 소행이라고 합니다.”
“지난번 테러도 그놈들 짓이었잖아.”
우뚝 멈춰선 혁권이 정색을 하며 묻자 자말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 정부군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거기다 알리탈리아 항공Alitalia-Linee Aeree Italiane에서 이번 사건을 핑계로 항공기 운항을 중단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갈수록 태산이군.”
알리탈리아 항공은 이탈리아 국영 항공사로서 현재 내전 중인 리비아에 유일하게 취항 중인 곳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그나마 있는 정기 노선마저 없어진다면 트리폴리를 오가는 항공편은 부정기적으로 오가는 비행기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끊기는 거였다.
그러면 가뜩이나 점점 격화되어 가는 내전과 테러로 외부와의 소통이 힘든 리비아의 고립이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건 친서양 성향의 정부 전복을 노리는 반군들의 의도대로 되는 거였다.
청사 밖으로 나온 혁권은 주차장 한쪽에 세워 둔 SUV를 타고 출발했다.
원래 있던 차량은 지난번 테러 때 박살이 나서 새로 마련한 거였다.
공항 지역을 벗어나는데 중무장한 군인들이 배치된 검문소를 세 곳이나 통과해야 되는 걸 보고 새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차가 시내로 향하는 도로에 들어서자 운전석에 앉은 자말이 말했다.
“보스가 안 계실 때 압둘라흐만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용건으로?”
“자세한 건 이야기하지 않고 며칠 뒤에 오실 거라고 하니까 다시 전화를 한다더군요.”
“뭐 짚이는 거라도 없어?”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라……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반군 세력과 거래를 한 것 때문에 입장이 곤란해졌다는 겁니다.”
“압둘라흐만이?”
혁권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암시장의 거물인 압둘라흐만은 반군과 정부군을 가리지 않고 상당한 인맥을 가지고 있고 영향력 또한 큰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코린시아 호텔 테러와 이번 공항 미사일 발사 사건에 사용된 무기들을 이슬람 형제단에 공급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이야?”
자말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돈을 준다면 뭐든지 할 자이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요.”
“으음.”
혁권은 낮게 숨을 흘렸다.
트리폴리 상황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 혁권을 힐끗 쳐다보며 자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상황이 이런 만큼 당분간은 압둘라하흐만을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참고하지.”
그렇게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듣는 가운데 SUV는 트리폴리 시내로 들어갔다.
숙소는 예전과 같이 코린시아 호텔이었다.
끔찍했던 테러의 기억과 흔적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었지만, 트리폴리에서 이만한 거처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머물게 됐다.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건 또다시 테러가 발생하는 걸 막기 위해 경비가 대폭 강화됐다는 거였다.
중무장 군인들이 곳곳에서 보초를 서는 물론이고 호텔 입구에는 정부군 장갑차까지 세워져 있었다.
작정을 하고 덤비면 공격을 못 할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없는 거보다는 훨씬 나았다.
자말을 보내고 객실에서 쉬고 있을 때 탁자 위에 있던 전화기 벨이 울렸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여보세요.”
-미스터 김, 나요.
“……!”
무심코 수화기를 집어 들었던 혁권은 압둘라흐만의 목소리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국은 잘 다녀왔소.
“염려해 주신 덕분에.”
마치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정확한 타이밍에 전화를 걸어오자 조금 당황스러워하던 혁권은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잠시 만날 수 있겠소?
“지금 말입니까?”
-오늘 막 도착해서 피곤할 테니 내일쯤 보는 것이 어떻겠소?
호텔로 오면서 자말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잠시 고심하던 혁권은 이내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러시죠.”
-구시가지에 있는 모스크에서 정오에 만납시다.
“알겠습니다.”
-그럼 쉬시오.
통화를 끝낸 혁권은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일단 압둘라흐만과의 관계 때문에 만나겠다고 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부담이 됐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의 동선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다 알고 있다는 사실도 기분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혁권은 객실에 비치된 전화기 대신 위성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자말입니다.
“지금 어디야?”
-호텔 근처입니다.
“잘됐군. 다시 객실로 좀 와.”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와서 이야기를 하지.”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자말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금방 가지요.
“그래.”
푹신한 소파에 몸을 파묻듯 기댄 혁권은 트리폴리에 발을 내딛자마자 생긴 골치 아픈 일에 머리가 아픈지 한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얼마 있지 않아 자말이 객실로 돌아오자 혁권은 방금 전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해 줬다.
“느낌이 좋지 않군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자말의 말에 혁권이 동조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오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당분간은 만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미 약속을 잡았는데 어떻게 그래.”
“그거야 적당히 핑계를 대면 되지 않겠습니까?”
잠시 망설이던 혁권은 이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속보이는 행동이잖아. 곤란한 입장에 처했다고 해도 여전히 힘이 남아 있는데 괜히 척져서 좋을 것이 없어.”
“그러면 내일 압둘라흐만을 만나실 겁니까?”
혁권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이야.”
마주 앉아 있던 자말은 내키지 않는 듯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렇게 결심을 하셨다면 어쩔 수 없지요. 내일 부하들을 준비시켜 놓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혁권이 손을 휘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싸움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경호원을 잔뜩 데려가면 쓸데없이 상대를 자극할 수도 있어.”
“구시가지는 대낮에도 정부군과 경찰 들이 들어가는 걸 꺼릴 정도로 치안이 안 좋은 곳입니다. 압둘라흐만이 아니더라도 보스의 안전을 위해 대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색을 하며 자말이 이야기를 하자 혁권은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자네를 포함해서 세 명만 데려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세 명이면 어느 정도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수긍을 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의문은, 압둘라흐만이 왜 나를 보자고 하느냐인데…….”
“뭔가 원하는 것이 있으니 그러는 거겠지요.”
“그게 뭐냐 이거지.”
누가 그걸 모르냐며 가벼운 타박과 함께 다리를 꼰 자세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말 역시 딱히 짚이는 데가 없어 가만히 앉아 있는데 곧 혁권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쯧. 내일 만나 보면 알겠지.”
가벼운 말투로 내뱉은 그는 금방 화제를 바꿔 자말과 함께 내일 일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곤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호텔 로비에 걸려 있는 시계가 정확히 정오를 가리켰을 때 한 대의 SUV가 정문 앞에 다가와 멈춰 섰다.
혁권은 넥타이를 매지 않은 가벼운 정장 차림에 초록빛이 감도는 미러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머리 위에 떠오른 강렬한 태양 빛이 선글라스 테에 반사되어 반짝 빛나고,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의 열기를 뒤로한 혁권이 차에 올라타자 에어컨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냉기가 그를 맞이했다.
앞에는 하킴과 라미가 앉아 있었고 그의 옆으로 자말이 탔다.
“출발해.”
“예.”
짧게 대답한 자말이 턱으로 신호를 보내자 룸미러로 뒤를 보던 하킴이 가속페달을 가볍게 밟았다.
부우우웅.
부드러운 엔진 소리를 내며 출발한 SUV는 금방 호텔 입구를 지나 구시가지 쪽으로 달려갔다.
내전으로 많이 망가지는 했지만 카타피 정권 시절 만들어진 현대식 건물과 잘 정비된 도로가 깔려 서방 세계의 여느 대도시 못지않은 신시가지와 달리 구시가지는 오일머니의 혜택이 전혀 미치지 않은 곳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허름한 흙집이 빽빽하게 붙어 서 있고 도로는 차 한두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고 꾸불꾸불했다.
그나마 있는 도로도 포장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조금만 많은 비가 내리면 순식간에 진창으로 변해 버릴 것 같았다.
주민들의 행색 역시 초라하고 지저분한 것이 힘든 삶을 그대로 보여 줬다.
차창 밖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광경을 보며 혁권이 굳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자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깁니다.”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 주변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돔과 네 모서리에 하나씩 우뚝 세워진 높은 첨탑이 인상적인 모스크Mosque가 보였다.
“규모가 상당하군.”
“압둘라흐만이 지은 모스크라고 합니다.”
“그렇군.”
무슬림들은 예배당인 모스크를 직접 짓는 걸 큰 공덕功德으로 생각하기에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저와 라미가 따라 들어가고 하킴이 밖에서 대기할 겁니다.”
자말의 말에 그는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어느새 SUV는 회색 돌담으로 둘러싸인 모스크 입구에 도착했다.
그가 차 문을 열고 내리자 자말과 라미가 양옆에 붙어서며 주위를 경계했다.
혁권의 등장에 근처 행인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보냈지만 별다른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