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24
324
#모두에게 좋은 일
미국 버지니아 주 알링턴Arlington 카운티 외곽 식당.
한적한 도로 옆에 세워진 식당 내부는 바와 부스 자리가 있는 전형적인 미국 특유의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평일 낮이었지만 장거리 운행을 뛰는 화물 트럭 기사 몇몇이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딸랑딸랑.
방울소리와 함께 출입구 문이 열리면서 금발에 건장한 체격의 백인 사내가 말끔한 정장을 입은 채 선글라스를 끼고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CIA 중간 간부인 샌더슨이었다.
실내를 둘러본 샌더슨은 창가 부스 자리에 혼자 앉아 있는 혁권을 발견하고는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발걸음을 옮겨 다가간 샌더슨은 선글라스를 벗으면서 비어 있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러자 보고 있던 신문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혁권이 입을 열었다.
“식사는 했소? 여기 피시앤칩스Fish and Chips가 괜찮으니 먹어 보시오.”
“이봐, 내가 분명히 조용히 있으라고 했을 텐데.”
크게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직 지난번에 쌓인 감정이 다 안 풀린 샌더슨은 그를 노려보면서 날을 바짝 세웠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혁권은 가시가 돋친 상대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겼다.
“그래도 멀리서 찾아온 손님인데 보자마자 이러는 건 너무하지 않소?”
“불청객이겠지.”
때마침 여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오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중단했다.
“뭘 드시겠어요?”
“커피, 블랙으로.”
여종업원이 미리 드립해 놓은 커피를 잔에 따라서 갖다 놓고 가자 샌더슨이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짜증을 내며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라는 것이 뭐야?”
방금 전에 여종업원이 리필해 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혁권은 진지한 목소리로 상대를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어쩌다 보니까 카다피 정권 시절 발생한 기업과 금융기관들의 미수 채권을 회수하는 일을 맡았소.”
“이제 별일을 다 하는군. 그런데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지?”
“알다시피 자기 앞가림을 하기에도 벅찬 트리폴리 정부한테는 제대로 돈을 받아 내기 어렵지 않겠소.”
리비아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샌더슨은 팔짱을 낀 채 계속 이야기를 해 보라는 듯이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미국에 묶여 있는 카다피 정권의 동결 자금이오.”
거기까지 말을 들은 샌더슨은 대번에 혁권이 뭘 생각하는지 알아차렸다.
“동결 자금을 가지고 있는 금융기관에 지급 요청을 해서 채권을 회수하겠다?”
“그렇소.”
샌더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 가능할거라 생각하는 거야?”
전혀 당황하는 기색없이 혁권은 상대와 시선을 마주하면서 담담하게 대답했다.
“씨티 은행에 있는 이란 동결 자금 20억 달러를 9.11과 베이루트 미해병대 숙소 테러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금으로 지급하라는 대법원 판결이 있는 걸로 알고 있소. 그런 선례가 있으니 이번 건 역시 비슷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겠소.”
그러자 샌더슨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거하고 이건 상황 자체가 다르지. 그리고 설사 지급 결정이 내려진다고 해도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몇 년이 걸릴지 아무도 장담하기 어려울 걸. 호의로 해 주는 충고니까 괜히 헛힘만 빼지 말고 그냥 포기하도록 해.”
“이미 트리폴리 정부한테서도 동결되어 있는 자금으로 장기 연체된 채권을 지급받아도 좋다는 동의서를 받아 뒀소.”
그런 준비까지 해 놨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 한 샌더슨이 살짝 멈칫했지만 부정적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래도 그만두는 것이 좋을 거야. 뭐, 지루한 법정 싸움을 벌일 자신이 있으면 마음대로 하든가.”
“그 문제는 CIA에서 조금만 도와준다면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지 않겠소?”
샌더슨은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우리가 왜 그렇게 해야 되지?”
“그쪽에도 이득이 되니까 말이오.”
“이득이라고 했나?”
“그렇소.”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안주머니에서 여러 번 접힌 쪽지를 한 장 꺼내 샌더슨 쪽으로 밀었다.
“읽어 보시오.”
“…….”
혁권한테 말려 들어가는 느낌이었지만 뭘 가지고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구는지 궁금증을 참지 못했던 샌더슨은 쪽지를 집어 들어 펼쳤다.
쪽지에는 40억 달러라고 숫자로 적혀 있었다.
“이게 뭐지?”
고개를 든 샌더슨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현재까지 회수를 위임받은 채권 액수요.”
생각보다 큰 액수에 샌더슨은 티를 하지 않았지만 내심 크게 놀랐다.
“일을 도와준다면 회수하는 금액의 20%를 CIA에 주겠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조건이지 않소?”
샌더슨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대충 잡아도 8억 달러가 넘는 거액이었다.
어느새 등받이에서 몸을 뗀 샌더슨은 앞에 앉아 있는 혁권을 한참 동안 가만히 쳐다봤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상대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 달라는 거지?”
달라진 태도에 말이 먹혀 들어갔다고 생각한 혁권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아까 지적했다시피 재판으로 가서 오랫동안 판결을 기다려야 된다면 여러 가지로 곤란한 점이 많으니까, 그 기한을 줄일 수 있도록 힘을 써 줬으면 좋겠소.”
말을 듣자마자 샌더슨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우리라도 재판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긴 어려워.”
“알고 있소.”
혁권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분쟁 당사자들 간에 협의가 이루어진다면 재판을 오래 끌 이유가 없지 않겠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단번에 알아차린 샌더슨은 눈을 반짝였다.
“동결 자금이 묶여 있는 금융기관에 손을 써 달라 이거군.”
“바로 맞혔소. 채권자와 카다피 동결 자금에 권리를 가진 트리폴리 정부 모두가 동의한 일이니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지 않겠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샌더슨은 굳이 그걸 들추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이 일이 자신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지 생각했다.
그런 샌더슨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혁권은 몸을 앞으로 바짝 당겨 앉으면서 말했다.
“일이 잘 해결된다면 그쪽 조직 내에서 다시금 위치를 단단히 다질 수 있지 않겠소?”
누구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됐는데 뻔뻔한 혁권의 태도에 샌더슨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혁권이 가져온 건수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잘만 하면 영국에서의 실책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애써 분을 삭였다.
“어떻소, 내 제안이?”
입을 꾹 다문 채 한참을 고심하던 샌더슨은 이내 손에 들린 쪽지를 다시 접어 자신의 양복 안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했다.
“윗선에 보고를 하도록 하지.”
원하던 대답에 혁권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
혁권의 이야기만 듣고 일을 진행할 수는 없었기에 나름대로 미국 내에 묶여 있는 카다피 동결 자금과 채권 상황에 대해서 알아본 샌더슨은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자 러셀 CIA국장을 찾아갔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샌더슨은 내심 바짝 긴장한 채 소파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는 러셀 국장을 바라봤다.
반쯤 머리가 벗겨진 러셀 국장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보고서를 천천히 읽고 있었다.
방 안에는 러셀 국장 말고도 라이언 팀장이 함께 앉아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러셀 국장은 보고서를 덮으면서 고개를 들어 샌더슨한테 시선을 줬다.
“꽤 흥미로운 제안이군. 이걸 블랙레빗이 가져왔다고?”
“그렇습니다.”
“내가 듣기로는 밀수업자라고 알고 있는데, 아니었나?”
“맞습니다.”
샌더슨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좀 더 알아봐야 되겠지만 한국 정부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세히 설명을 해 봐.”
“한국 정부가 국책은행을 내세워 무리하게 리바아에 대출을 해 줬다가 미수금으로 묶여 버린 것이 있는데, 현재 그게 정치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방법을 찾다가 트리폴리 정부에 끈이 있는 블랙래빗한테 일을 의뢰한 걸로 보입니다.”
“시끄러워지기 전에 손해를 보더라도 미수금을 일부 회수해서 명분을 만들려고 한 모양이군.”
눈에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기에 러셀 국장은 한국 정부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고작 이런 일 하나 해결하지 못해서 밀수업자한테 도움을 받으려고 하다니 정말 한심하군요.”
노골적인 경멸의 빛을 숨기지 않은 채 라이언 팀장이 말했다.
러셀 국장은 굳이 대꾸하지 않고 대신 샌더슨에게 계속 얘기해 보라는 듯 눈빛으로 재촉했다.
“그랬던 걸 블랙래빗이 돈 냄새를 맡고는 일을 키운 걸로 보입니다.”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는 듯 러셀 국장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자는 매번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날 놀라게 하는군. 우리한테 주겠다는 돈이 8억 달러라고 했지?”
“현재까지는 그 정도지만 추가로 더 늘어날 걸로 보입니다.”
“어째서 그렇지?”
“최근 홍콩에 세워진 페이퍼 컴퍼니 한곳이 국제 채권시장에서 리비아 관련 채권을 헐값에 싹쓸이하다시피 가져갔는데, 블랙래빗이 관여된 것으로 보입니다.”
나름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했는데 단 하루 만에 이만큼이나 정보를 파악하다니 역시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다웠다.
이야기를 들은 러셀 국장은 짧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허어. 그런 생각을 하다니 보통 영리한 자가 아니군. 동결되어 있는 카다피 자금을 이용하려는 생각도 블랙래빗의 머리에서 나온 것 같군.”
“발 빠르게 리비아 채권을 확보해 놓은 걸 보면 아마 생각하시는 것이 맞을 겁니다.”
“정말 대단해.”
불량 채권으로 분류돼 액면가에 비해 형편없이 낮다고는 해도 아직 어찌 될지 모르는데, 큰돈을 들여서 물량부터 확보한 혁권의 과감성과 추진력에 러셀 국장은 진심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 같았으면 쉽게 그런 선택을 하지 못했을 거였다.
러셀 국장은 시선을 옆으로 돌려 라이언 팀장을 보면서 의견을 물었다.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때?”
국장실로 들어오기 전에 샌더슨한테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던 라이언 팀장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러셀 국장을 힐끔 쳐다보곤 입을 열었다.
“문제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가능성이 꽤 높아 보입니다. 의회의 감사를 받을 필요가 없는 8억 달러가 넘는 비자금이 생긴다는 것도 꽤 솔깃한 부분이고 말입니다.”
“내 말이 그거야.”
정보기관의 특성상 예산 집행 내역을 상세하게 공개하지는 않지만, 의회의 시시콜콜한 간섭과 감사를 받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감시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재량껏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비자금이 생긴다는 상당히 끌리는 일이었다.
물론 현재도 CIA 내부에 비슷한 용도의 비밀 자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원래 돈이라는 건 많을수록 좋은 법이었다.
“그리고 블랙래빗의 제안대로라면 지급된 동결 자금 일부가 IS를 비롯한 과격 이슬람 무장 단체 싸우고 있는 트리폴리 정부에 들어간다고 하니, 그것도 큰 틀에서 저희 CIA의 정책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일에 개입할 수 있는 그럴듯한 명분을 라이언이 제시하자 러셀 국장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이야.”
몇 번을 고심해 봐도 득이 됐으면 됐지, 손해 볼 것이 전혀 없는 제안이었다.
결심을 굳힌 러셀 국장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샌더슨에게 지시를 내렸다.
“좋아. 계획을 승인해 줄 테니까, 샌더슨 자네가 맡아서 일을 진행시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절대 실수하지 말고.”
“물론입니다.”
마지막 말에 살짝 표정이 굳어졌지만 샌더슨은 다부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러셀 국장은 보고서 한쪽 끝에 클립으로 꽂혀 있는 혁권의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과연 주머니를 얼마나 채워 줄지 어디 한번 기대해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