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53
453
안면이 있는 함단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면서 혁권을 소개했다.
“제가 모시는 분입니다.”
“존슨입니다.”
하얀 시가 연기를 내뱉으면서 물끄러미 혁권을 바라보던 코자레바 중장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내민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눴다.
“코자레바라고 하오.”
양측이 소파에 마주 보고 앉자 부관이 온더록스 잔에 위스키를 따라서 가지고 왔다.
“얼굴을 보기가 정말 어려운 것 같소.”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군요.”
“하긴 리비아 쪽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니 그럴 만도 하겠소이다.”
“…….”
마치 너희들이 뭘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상대가 민감한 이야기를 슬쩍 던지자 혁권이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혁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잘 아시는군요. 먼저 이야기를 꺼내셨으니 저도 편하게 말을 하겠습니다. 거래를 갑자기 중단시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이유가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두툼한 시가를 한쪽 손가락 사이에 끼운 코자레바 중장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
“군 비축 물자인데 함부로 다 처분할 수는 없지 않겠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나라도 더 많이 못 팔아서 안달이었던 걸 떠올린 혁권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다른 나토 국가들과 연합작전을 위해 군 장비를 서방식으로 모두 교체하고 있어서 이제 예전 러시아제 무기들은 불필요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말 그대로 비축 물자는 유사시를 대비해서 가지고 있는 것이지 않소.”
코자레바 중장이 탐욕스러운 눈을 번들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무 헐값에 처분한다는 말도 있고 해서 거래를 보류시켰소.”
결국 돈이 적으니 더 내놓고 가져가란 거였다.
“얼마를 더 받길 원하십니까?”
길게 이야기를 끌 생각이 없던 혁권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코자레바 중장이 손가락을 세 개 들어 올렸다.
“지금 가격에서 3배는 더 쳐줘야 되겠소이다.”
혁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갈라치에 쌓여 있는 물건을 가져가는 것이 여러 가지로 이점이 많은 만큼 적절한 수준의 요구는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코자레바 중장의 이야기는 허용 범위를 넘어서는 거였다.
이맛살을 찌푸린 혁권이 머리를 흔들었다.
“너무 무리한 요구군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만. 우리 물건을 가져다가 손쉽게 큰돈을 벌고 있으니 최소한 그 정도는 받아야 되겠소.”
미소를 지운 채 혁권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부터 무기 거래가 쉬운 일이 됐는지 모르겠군요. 뭐, 좋습니다. 그동안 거래를 한 것도 있으니 50%를 더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코자레바 중장이 어림도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난 분명히 3배라고 했소.”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입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요.”
코자레바 중장이 눈을 부라리자 순간 실내 분위기가 경직됐다.
차가운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혁권이 느릿한 동작으로 앞에 놓인 온더록스 잔을 들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협박이라……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군요. 아시다시피 전 사업가입니다.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서로 의견이 달라 협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고 해도 지금처럼 일방적인 요구는 곤란하지요.”
“…….”
“자꾸 이러시면 아쉽지만 저도 거래를 여기서 끝낼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원하던 것과 완전히 다른 반응에 코자레바 중장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 뭘 하자는 거요!”
“서로 뜻이 맞지 않다면 거래를 끝내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싫다는 쪽을 붙잡고 억지로 비즈니스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코자레바 중장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함단 역시 그가 이렇게 나갈 줄은 몰랐는지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작 혁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새로 EU에 가입한 동구권 국가들 가운데 러시아제 무기를 잉여 물자로 가지고 있는 곳은 루마니아 말고도 많으니까요. 당장 폴란드만 해도 독일에서 전차를 구입하면서 T계열 전차들을 대거 퇴역시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으음.”
얼굴을 구긴 채 코자레바 중장이 눈가를 찌푸렸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실제로 폴란드를 비롯한 상당수 동구권 국가들이 EU 체제에 들어가면서, 그동안 보유하고 있던 러시아제 무기들이 대거 창고에 들어가거나 폐기 처분되고 있었다.
대부분 경제 사정이 좋지 않고 부패지수가 높은 곳들이었기에, 혁권이 돈을 주고 사겠다고 하면 너도나도 무기를 넘길게 분명했다.
만약 정말로 혁권이 거래를 끝낸다면 돈을 더 챙기려다가 황금 알을 낳는 오리의 배를 스스로 가른 꼴이 되는 거였다.
그러나 먼저 꺼낸 말이 있는 데다 체면 때문이라도 섣불리 앞서 요구한 걸 취소하지 못하고 속으로 애만 태웠다.
잠시 말없이 그런 코자레바 중장을 바라보던 혁권은 손에 든 온더록스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마지막으로 제안을 다시 드리도록 하지요. 거래 가격을 더 이상 올리는 건 곤란하지만, 중장님께 따로 커미션을 드릴 수는 있습니다.”
“지금 커미션이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눈을 반짝인 코자레바 중장은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면서 혁권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매번 거래를 할 때마다 총 금액의 5%를 현금으로 드리겠습니다.”
“…….”
“이번 거래부터 적용한다면 대략 300만 달러 정도가 되겠군요.”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여기에다가 앞으로 거래가 계속될 걸 생각하면 코자레바 중장이 챙기게 될 돈은 상당할 터였다.
사실 코자레바 중장이 거래 대금을 올리려는 것도 국가를 위한 거라기보다는 중간에서 더 많은 돈을 착복하려는 의도였다.
처음 욕심을 낸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몰래 따로 커미션을 받게 된다면 어느 정도는 목적을 이루는 거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지막 제안을 한 혁권은 가만히 상대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
코자레바 중장은 잠시 말이 없었다.
속으로 저울질을 한참 하다 마침내 혁권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론이 난 듯, 그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대꾸했다.
“썩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아니로군.”
“그럼 거절하신다는 겁니까?”
“아니, 여기까지 찾아와 준 성의를 봐서 이번엔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소.”
그는 선심을 쓰는 것처럼 아주 관대한 표정으로 등을 뒤로 기댔다.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그러자 혁권도 그와 눈을 마주치며 훗 하는 웃음을 흘렸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피차 간에 손해 보는 거래는 안 될 겁니다.”
협상을 끝내고 나와 차를 타고 좁은 길을 따라 산장을 벗어나자 함단이 몸을 살짝 뒤로 돌리고는 혁권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보스.”
“할 말이라도 있나?”
“정말로 코자레바 중장과 거래를 끝내실 생각이셨습니까?”
시선을 마주친 혁권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상대가 계속 과한 욕심을 부렸다면 아마도 그렇게 했을 거야.”
“그러시군요.”
차창을 살짝 내린 혁권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저런 사내는 자주 봐서 잘 알지. 한번 원하는 걸 들어주면 끝도 없이 요구하는 타입이야. 처음부터 선을 딱 그어 놓는 게 낫지, 아니면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진다고. 안 될 것 같으면 아예 빨리 관계를 정리하는 편이 낫고.”
그가 내뿜은 담배 연기가 차창 틈 사이로 빨려 흘러나갔다.
“저쪽도 우리 상태를 볼 테니 당분간은 얌전히 굴겠지만, 그게 언제까지 계속되지는 않겠지. 그때를 대비해서 다른 루트를 뚫어 둬야 하니 미리 알아보는 편이 좋겠군.”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함단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거래한 화물들은 언제 배에 실을 수 있지?”
“늦어도 이틀 안으로는 작업이 끝날 겁니다.”
“그렇군.”
중간에 코자레바 중장이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지체되기는 했지만, 그 정도면 얼추 약속을 지킬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혁권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가죽 시트에 몸을 깊이 파묻자, 대화가 끝났음을 짐작한 함단이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자세를 바로하고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어느새 좁은 비포장 길을 빠져나온 차량은 한적한 국도를 달려 멀리 보이는 갈라치 시내로 향했다.
오늘도 손주아하고 시간을 보낸 김성균은 자정이 훌쩍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식사를 차려 드릴까요?”
입주 가정부의 물음에 그는 한쪽 팔을 가볍게 내저었다.
“괜찮으니까, 물이나 한잔 주고 들어가 봐요.”
“네. 그럼…….”
김성균은 약간 피곤한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 넥타이를 풀었다.
그러고는 입주 가정부가 가져온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한 물이 들어가자 손주아하고 마신 술이 조금 깨는 것 같았다.
불과 1시간 전까지 손주아하고 보냈던 뜨거운 열락의 순간을 떠올린 김성균은 자신도 모르게 아랫도리가 불끈 솟는 것 같았다.
그의 기준에서 눈이 확 돌아갈 만큼 예쁜 건 아니었지만, 모델답게 균형 잡힌 몸매와 남자를 빨아들이는 색기가 있었다.
남자를 알고 욕구를 채워 주는 손주아와 달리 아내는 목석木石이나 다름없었다.
처음부터 집안끼리 필요에 의해서 맺어진 관계였기에 결혼을 한 지 벌써 십수 년이 넘었지만 애정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가정보다는 다른 상류층 인사들과 만나 사교를 즐기는 걸 더 중요시했다.
사교 모임과 파티 그리고 크고 작은 행사에 다니느라 어떤 때는 회사를 경영하는 자신보다 더 바쁜 것 같았다.
하지만 애초에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간섭을 하지 않기로 했었기에 김성균은 그리 큰 불만이 없었다.
아내 역시 그가 밖에서 젊고 예쁜 여자들과 만나는 걸 알면서도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자식까지 낳고 한집에 사는 부부이면서도 철저하게 필요에 의해서 유지되는 관계였다.
유리컵을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우우웅.
스마트폰을 꺼내 확인하자 고 실장이라는 이름으로 메시지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뭐지?”
집까지 그를 보필하고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고동욱 실장이 전화도 아니고 메시지를 보냈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 싶어 메시지를 열어 본 김성균은 이내 이맛살을 찌푸렸다.
-고민주 실장입니다. 고객님은 최저 이율로…….
대출을 권유하는 스팸 문자에 김성균은 짜증을 내면서 바로 문자를 삭제해 버렸다.
그러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갔다.
인적이 끊긴 상가 내부.
낮에는 그렇게 많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썰물처럼 빠지고, 지금은 짙은 어둠과 정적만이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릴 없이 담배를 사러 나오는 이의 발길마저 끊어진 야심한 시각.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 것 같은 구석진 가게의 닫힌 셔터 아래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됐다!”
모니터 앞에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던 이강우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뭐, 뭐야?”
그러자 뒤쪽의 낡은 소파에서 백성균이 지루한 표정으로 잡지를 뒤적거리다 말고 허둥지둥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건데? 성공했어?”
그의 짧은 지식으로는 모니터를 봐도 뭐가 뭔지 하나도 몰랐지만 어쨌든 열심히 살피는 척이라도 했다.
의자 채로 몸을 빙글 돌린 이강우가 우쭐한 얼굴로 턱을 세우면서 말했다.
“이 정도는 껌이라고 했잖아요. 이제 여기서 저쪽 스마트폰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