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
5
그가 다가가자 청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전투용 조끼까지 걸친 자말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오셨소.”
“이 사람들이야?”
혁권이 묻자 자말이 몸을 약간 돌리며 대답했다.
“이쪽부터 알아바디, 하킴, 라미 그리고 아미르요.”
이름이 불릴 때마다 사내들이 한 명씩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는데,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에 눈빛이 매서운 것이 다들 범상치 않아 보였다.
거기다 하나같이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어서 더욱 살벌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쯤 되면 조금 주눅이 들만도 했지만 혁권은 전혀 그런 기색 없이 당당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김혁권이오. 함께하는 동안 잘해 봅시다.”
그러면서 먼저 손을 내밀자 잠시 주춤하던 경호원들은 이내 혁권과 악수를 나눴다.
“받으시오.”
자말이 내민 건 베레타 권총이었다.
“우리가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소.”
작게 고개를 끄덕인 혁권은 권총을 받았다.
손안에서 느껴지는 묵직하면서도 차가운 감촉에 그는 지금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려는 건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권총은 쓸 줄 아시오?”
“물론이지.”
심드렁하게 물어본 자말은 혁권의 대답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에서는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의무야.”
“그렇다면 다행이오.”
비록 하사관이 아닌 현역병이었지만 빡 세기로 유명한 공수특전대를 제대했기에 권총뿐만 아니라 웬만한 총기는 거의 다 다룰 줄 알았다.
위험천만한 이번 일을 망설임 없이 맡은 것도 군대 시절 배운 깡 때문인지도 몰랐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라싸지르에 도착해야 되니 이만 출발합시다.”
“그래.”
잠시 뒤 일행을 태운 사륜구동 차는 거친 엔진 음을 울리면서 호텔을 빠져나갔다.
거의 한달 넘게 호텔 안에서 감옥에 갇힌 것처럼 생활을 하다가 밖으로 나오자 홀가분한 기분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다.
특히 길거리를 지날 때마다 한눈에 봐도 무장 세력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AK47 소총과 탄띠를 잔뜩 몸에 두르고 서 있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내전 한복판에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긴장이 된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권총에서 탄창을 빼내 확인하고는 다시 끼워 넣었다.
어느새 시내를 벗어난 사륜구동 차는 라싸지르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타고 달려갔다.
사방에 보이는 거라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황량한 모래뿐인 사막 한가운데를 계속 가로질러 갔다.
아스팔트를 깐 도로였지만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제대로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곳곳이 부서지고 장애물이 있을 정도로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언제 무장 세력과 강도가 나타날지 모르는데 차가 고장이라도 난다면 큰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60킬로미터가 좀 안 되는 속도로 움직였다.
간혹 가다 보이는 불타 버려진 차량을 지나갈 때마다 일행은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녹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건조한 사막에 질린 혁권이 생수병을 꺼내 몇 모금 마셨을 때쯤 운전대를 잡고 있던 하킴이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멈춰 세웠다.
끼이익.
그 바람에 몸이 앞으로 쏠려 물을 옷에 다 흘린 혁권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자 50미터쯤 떨어진 전방에 불에 타고 있는 트럭 한 대가 보였다.
무기를 꺼내 든 자말이 빠르게 좌우를 살피며 말했다.
“알아바디, 라미, 너희 둘은 주위를 경계하고 아미르는 날 따라와.”
“옛.”
자말의 지시에 경호원들은 두말하지 않고 대답했다.
“보스는 어쩔 거요?”
계약을 한 순간부터 그를 보스라고 부르기 시작한 자말이 고개를 돌리며 묻자 혁권은 겁이 났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권총을 꺼내 들었다.
“나도 가야지.”
“대신 어디서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니까 조심하시오.”
“걱정 마.”
권총 안전장치를 푼 혁권은 약간 어색해 보였지만 한쪽 손으로 손잡이 바닥을 받치면서 사격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에 자말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
하킴을 제외하고 모두 차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면서 불에 타고 있는 차량으로 접근했다.
자말과 아미르가 선두에 서고 그 뒤로 혁권을 가운데 둔 채 알아바디와 라미가 좌우를 경계하는 대형이었다.
코를 찌르는 휘발유 냄새를 참으며 가까이 다가가자 피투성이가 된 시신이 세 구나 눈에 들어왔다.
언제든지 총을 쏠 수 있도록 무릎에 올려 둔 채 한쪽 다리를 꿇고 시신을 살펴본 자말을 이내 이맛살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총상을 입은 걸로 봐서 강도에 당한 모양이오.”
아니나 다를까 화물칸이 텅 비어 있고 바닥에는 희생자들의 것으로 보이는 지갑이 아무렇게나 팽개쳐 있었다.
차창은 산산조각이 난 채 부서져 있었고 보닛과 유리조각에 묻어 있는 시뻘건 피가 끔찍했던 상황을 잘 보여 줬다.
엉망이 된 운전석을 들여다보며 혁권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 때 짐칸에 올라간 아미르가 짧게 휘파람을 불면서 말했다.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제대로 한 건 한 것 같습니다.”
아미르의 손에 들린 건 동그랗게 생긴 자동차 브레이크 패드였는데 강도들이 흘려 놓고 간 걸 찾은 모양이었다.
내전의 여파로 인해 수출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리비아에서는 모든 생필품들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특히나 자동차 부품 같은 건 가져오기만 하면 3~4배는 기본적으로 받을 수 있었으니 강도들이 눈독을 들일 만했다.
“이런 걸 싣고 오면서 달랑 세 명만 타고 있었으니 죽으려고 작정을 한 거지.”
AK47 소총을 어깨에 걸친 라미의 말에 혁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왠지 황량한 사막 한복판에 쓸쓸히 죽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진 거였다.
그런 혁권을 힐끔 쳐다본 자말은 일부러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하고 모두 차에 타.”
“예.”
혁권과 경호원들이 사륜구동 차에 타자 자말이 하킴을 보며 말했다.
“출발해.”
부우웅.
사륜구동 차는 도로 한복판에 방치된 트럭을 지나쳐서는 다시 서서히 속력을 높였다.
뉴욕 양키즈 야구 모자를 눌러쓴 자말은 고개를 돌려 뒷좌석에 앉아 있는 그와 경호원들을 보며 주의를 줬다.
“방금 봐서 알겠지만 우리도 언제 공격을 받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긴장을 놓지 말도록 해.”
대답 대신 경호원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무심코 고개를 든 그는 영어로 라싸지르까지 20킬로미터라고 적힌 표지판이 옆으로 지나치는 걸 봤다.
걱정과 달리 그 뒤로는 별다른 일 없이 이동을 계속했는데 도시에 가까워지자 진흙으로 지은 집들과 도로를 지나다니는 차량들이 하나들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예정대로 해가 떨어지기 전에 라싸지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국경을 오가는 사람들을 위한 숙박 시설들이 꽤 많이 있었는데 내란이 계속되고 있는 현재도 다행스럽게 대부분 정상 영업을 하고 있었다.
물론 제대로 된 호텔이 아니라 여관 수준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였다.
가구라고는 낡은 철제 침대가 전부인 데다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아 지저분한 방이었지만 종일 긴장을 하고 있느라 지쳤던 혁권은 씻지도 않고 옷을 입은 채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렇게 얼마쯤 잤을까.
누군가 자신을 흔드는 느낌에 혁권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배게 밑에 넣어둔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자말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양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워워. 진정하시오.”
총구를 내리자 슬쩍 그가 들고 있는 권총을 쳐다보면서 자말이 어깨를 으쓱였다.
“잠을 깨우러 왔다가 까딱 잘못했으면 몸에 총구멍이 날 뻔했네. 설마 장전된 건 아니겠지요?”
대답을 하지 않고 혁권이 어제 받은 홀더에 권총을 집어넣고는 허리에 차자 자말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거야 원. 긴장을 풀지 않는 건 좋은데 그러다 사고는 내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걱정 마.”
퉁명스럽게 말한 혁권은 방 한쪽에 달린 욕실로 가서 녹이 잔뜩 슬어 있는 수도꼭지를 옆으로 틀었다.
끼릭.
시뻘건 녹물이 나오고 얼마 있지 않아 그럭저럭 깨끗한 수돗물이 나왔지만 시원하게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가느다란 물줄기가 쪼르륵 떨어졌다.
그나마 이런 수돗물을 쓰는 것도 감지덕지였는데 오랜 내전으로 인해 상수도를 비롯한 사회 기관 시설들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아 주변 민가에 사는 주민들은 임시로 판 우물에서 힘들게 물을 길어 와야 했다.
대충 세수만 한 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나오자 방 안에 서 있던 자말이 턱을 까딱이며 말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지만 화물을 빨리 들여오려면 검문소 놈들한테 미리 기름칠을 좀 해 두는 것이 좋을 거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혁권은 소지품이 든 배낭을 한쪽 어깨에 메고는 밖으로 나갔다.
새벽까지만 해도 얇은 이불을 덮고 잘 정도로 쌀쌀했지만 해가 뜨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가 온몸을 덮쳐 왔다.
벌써 리비아에서 지낸 지 한 달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더위만큼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강하게 내려쬐는 햇볕을 피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꺼내 쓴 혁권이 자말과 함께 내려오자 다른 일행이 사륜구동 차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도시 안이었지만 일행은 AK47 소총 같은 무기를 감추지 않고 버젓이 꺼내 손에 들거나 어깨에 메고 있었다.
“어서들 타.”
“알았수.”
자말의 말에 경호원들은 각자 자리에 탔고 혁권도 뒷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차가 출발하자 차창 밖을 내다보던 혁권이 조수석에 타고 있는 자말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국경 검문소는 정부군이 관리를 하는 건가?”
그러자 한쪽 팔을 차창에 올린 자말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트리폴리 하나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데 여기까지 신경 쓸 정신이 있겠소.”
“그럼 누가 국경을 관리하고 있는 거지?”
“ADDI라는 무장 세력이오. 라싸지르뿐만 아니라 주와라Zuwarah까지 다 그놈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보면 될 거요.”
“그렇군.”
격렬했던 내전을 겪으면서 통치 체계가 모두 무너진 리비아는 새롭게 구성된 정부가 트리폴리에 존재했지만, 우호죽순처럼 생겨난 수많은 무장 세력들이 무기를 내려놓지 않고 각자의 영역을 장악한 채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애초에 인구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아랍계와 북아프리카 지역 원주민인 베르베르Berber족 그리고 사하라 지역 원주민인 투아레그Tuareg족에다가 아랍과 흑인 혼혈에 유럽계까지 여러 종파하고 종족이 한데 뒤섞여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강력한 중앙 권력의 공백은 혼란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가 막대한 부를 가질 수 있는 석유에 대한 이권까지 걸리자 단순한 갈등을 넘어, 서로 죽고 죽이는 투쟁으로 변해 갔다.
그러는 사이 차가 국경 검문소에 도착했다.
국경 검문소라고 해서 뭐가 거창하게 있는 게 아니라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바리케이드를 쳐 놓고 무장한 병사들이 듬성듬성 선 것이 다였다.
한쪽에 벽돌로 지어진 2층짜리 건물이 하나 보였는데 병사들의 숙소 겸 사무실로 쓰는 곳 같았다.
먼저 내린 자말이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르고 지저분한 모자를 눌러쓴 무장 세력 병사에게 담배를 한 개비 건네주고는 자연스럽게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이내 다시 차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