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47
647
약속 시간에 맞춰 혁권은 양젠 대사와 함께 중국 대사관을 나와 만수르 회장의 저택으로 향했다.
자드란 비서실장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가자 흰색 이슬람 전통 복장을 한 만수르 회장이 두 사람을 맞이했는데, 상석에 뜻밖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인사드리시오. 내 형님이자 UAE 군 부사령관을 맡고 계시는 무하마드 왕세제시네.”
예상치 못한 만남에 혁권은 순간 당황했으나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고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존슨이라고 합니다.”
무하마드 왕세제는 자세를 바꾸지 않고 가만히 혁권을 쓱 훑어보았다.
짧은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이 날카로워 과연 직위에 어울리는 인물이다 싶었다.
“반갑네.”
무하마드 왕세제가 시선을 옆으로 옮기자 나란히 서 있던 양젠 대사가 얼른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지난번 왕실 파티에서 인사를 드리고 오랜만에 다시 뵙는군요.”
아무래도 직위가 있다 보니 친분이 깊어 보이지는 않았으나 무하마드 왕세제하고 안면이 있었다.
“그동안 잘 있었소?”
“네. 덕분에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네 사람은 원목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무하마드 왕세제가 앞에 있는 혁권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여길 왜 왔는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하오.”
오늘 만남의 결과에 따라 계약 성사 여부가 결정된다는 걸 알아차린 혁권은 티 나지 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러고는 무하마드 왕세제와 시선을 마주한 채 차분하게 이야기를 했다.
“저희 쪽에서 제시한 제안에 대해 중국 정부의 보증을 받고 싶어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소.”
혁권이 양젠 대사에게 살짝 눈짓을 했다.
그러자 품속에서 흰 봉투를 꺼낸 양젠 대사가 무하마드 왕세제에게 건넸다.
흠, 소리를 내면서 봉투를 받은 그는 안에서 여러 번 접힌 서류를 꺼내 펼치곤 눈으로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혁권이 신중히 운을 떼었다.
“보시다시피 중국 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 보낸 공식 문서입니다.”
중앙군사위원회는 중국이 보유한 군대를 관리하는 최고 기관으로 정부와 공산당 산하에 하나씩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두 곳의 구성원들이 서로 완전히 일치했기에 하나의 기관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렇게 똑같은 기능을 가진 기관이 두 개씩이나 있는 건 중국 인민해방군이 정부가 아니라 공산당에서 창설한 군대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민해방군은 정부가 아닌 공산당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다.
내용을 확인한 무하마드 왕세제가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예멘으로 가면 후티 반군과의 전투에 확실히 참가를 하는 거요?”
“중국에서 파견되는 인원들은 말 그대로 공격형 무인기를 원활하게 운용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보조하는 역할이지 파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얘기했던 것하곤 말이 다른데.”
순간적으로 응접실 내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중간에서 소개하는 역할을 맡은 만수르 회장 역시 굳어 버린 눈빛으로 혁권을 노려보았다.
존재감이 강한 두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옆에 있던 양젠 대사는 긴장한 것처럼 숨을 짧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혁권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대범한 것을 넘어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조적인 모습에 양젠 대사가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현지에서 무인기를 운용하는 중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폭 넓은 재량권을 가질 겁니다. 물론 외부에는 군사 교육단이 아닌 UAE군이 한 일로 알려질 거고 말입니다.”
그때서야 말뜻을 눈치챈 무하마드 왕세제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입을 뗐다.
“재량권이라…… 거기에는 자위적 무력 사용도 포함되어 있겠군.”
“언제 어디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전장으로 가는데, 그건 당연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야.”
무하마드 왕세제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머리를 끄덕이자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로 풀렸다.
자리를 고쳐 앉은 무하마드 왕세제는 아까와 달리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슬쩍 말을 던졌다.
“파견 기간이 1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건 조금 짧지 않겠나?”
상대의 마음이 거의 다 기울어졌다는 생각에 그는 흰 이를 드러낸 채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기간이 너무 길면 괜한 의심을 받게 될 수도 있으니 일단 1년으로 했다가 차후에 상황을 봐서 양측이 논의를 해 연장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되겠군.”
조금 아쉬웠으나 미국과 이란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걸고 넘어지게 되면 여러 가지로 피곤했기에 무하마드 왕세제는 수긍을 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만수르 회장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네 이야기대로 시간을 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구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같은 피를 나눈 형제간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위계가 느껴지는 대화였다.
무하마드 왕세제는 다시 혁권에게 눈을 돌려 말했다.
“다음 달 안까지 무인기와 군사 교육단을 파견하는 데 차질이 없도록 준비해 두게.”
“그리하겠습니다, 왕세제 전하.”
직접적인 허락은 아니었으나 이쪽하고 계약하겠다는 의향을 넌지시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혁권은 속으로 반색하며 감사하다고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여기까지 찾아온 용건이 다 마무리되자 무하마드 왕세제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른 일정이 있어서 난 먼저 일어나도록 하지.”
“배웅하겠습니다.”
당연하게 따라나서려는 세 사람의 행동에 무하마드 왕세제가 앉아 있으라며 손을 흔들었다.
기다리고 있던 수행원과 함께 성큼 걸어 나가는 무하마드 왕세제의 뒷모습을 문이 닫힐 때까지 지켜보고 있던 만수르 회장은 몸을 돌려 혁권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형님께서 아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걸 보니 계약은 성사된 것이나 마찬가지일 걸세.”
“모두 다 회장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나야 자네 말을 중간에서 전해 준 것밖에 없지 않나.”
만수르 회장은 옆의 양젠 대사에게도 축하를 건넸다.
“대사께서도 수고하셨소.”
시선을 받은 양젠 대사는 미소를 지으면서 살짝 머리를 숙였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입니다.”
원하던 결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인지 세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기쁨을 나눴다.
며칠 뒤, UAE 국방부는 신형 공격형 무인기 사업자로 중국 항천신저우 비행기 공사를 선정했다.
총사업 비용은 6억 5천만 달러로 예멘에서 후티 반군을 상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UAE 정부는 발표와 동시에 일사천리로 항천신저우 비행기 공사 대표하고 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 업체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계약한 무인기 수량 가운데 절반을 곧바로 인도해 주기로 한 계약 내용 일부를 공개하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그만한 수량을 짧은 시간 동안 만들어 낼 역량이 안 되는 데다 중국처럼 미군에 공급할 기체를 다른 국가로 돌리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에 대해서는 10억 달러가 넘는 최첨단 탄도미사일 방어 시스템인 사드THAAD 1개 포대를 추가로 도입하는 걸로 화를 누그러뜨렸다.
일을 다 끝낸 혁권은 이륙 대기 중인 비즈니스 제트기 안에서 백수광 부부장의 전화를 받았다.
-역시 김 대표 자네라면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네.
“부부장님께서 당 중앙군사위원회를 움직여 주신 덕분입니다. 기체 조기 인도와 군사 교육단 파견이 없었더라면 사업을 따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공을 슬쩍 넘기면서 비위를 맞춰 주자 백수광 부부장은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자네가 없었더라면 그런 방법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걸세.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천 부국장한테 이야기를 해 놨으니 약속한 대로 수입 쿼터가 2배로 늘어났다는 연락이 곧 갈 거네.
마침내 원했던 소식이 귀에 들어오니 혁권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수고를 끼쳐 드렸군요.”
-자네가 일을 잘 처리해 줬으니 나도 당연히 보답해야지.
상부상조라는 건 이럴 때 쓰는 거라면서 백수광 부부장이 흡족한 투로 말했다.
-그런데 다음엔 언제쯤 북경에 올 일이 있는가? 오랜만에 술이나 함께했으면 싶네만.
“가게 되면 제일 먼저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약속한 거네.
이번 일로 수입 쿼터가 늘어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큰 이득은 권력 실세인 백수광 부부장하고 꽌시 관계가 더욱 두터워졌다는 거였다.
그렇게 백수광 부부장의 전화를 끊은 혁권이 잠시 숨을 돌리고 있자 곧 금발에 미끈한 몸매를 가진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안전벨트를 매달라고 했다.
혁권은 알겠다고 말한 후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을 기다리며 가볍게 목을 돌려 뻐근한 근육을 풀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며칠째 회사에 나가지 않고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김종원 회장은 뒷짐을 진 채 서재 창가에 서서 물끄러미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개가 잔뜩 낀 것처럼 뿌연 회색 하늘도 그렇고, 소리도 없이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가 기분을 더욱 울적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얼마쯤 서 있었을까 등 뒤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김종원 회장은 상념에서 깨어나 몸을 돌렸다.
서재 문을 열고 들어온 박상빈 비서실장이 꾸벅 머리를 숙이자 김종원 회장은 한쪽에 있는 소파로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앉게.”
“네.”
날씨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에 김종원 회장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오랫동안 보필해 온 박상빈 비서실장은 바로 알아차렸다.
조심스럽게 비어 있는 자리로 가서 앉자 김종원 회장이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린 채 박상빈 비서실장을 보며 물었다.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나?”
“검찰과 구치소 측의 조사에 의하면 사소한 시비 끝에 벌어진 우발적인 살인이라고 합니다.”
김종원 회장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필이면 둘째를 살해한 범인이 재판 중에 구치소에서 흉기에 찔려서 죽었는데, 그게 우연히 일어난 거라고.”
“그렇습니다.”
“자네 생각은 어때?”
“예?”
“이게 정말 지지리 재수가 없어서 벌어진 일인 것 같냐고!”
손바닥으로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면서 김종원 회장이 다그치듯 묻자 박상빈 비서실장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왜 말을 못 해!”
연달아 터져 나온 노호성에도 불구하고 박상빈 비서실장은 쉽사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요즘 부쩍 기력이 쇠해 보이는데 행여나 화병이 도져서 드러눕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그룹 전체가 휘청거릴 일이었으니 당연했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신중하게 단어를 고른 박상빈 비서실장이 회장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지만 두 번째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얼굴을 굳힌 김종원 회장이 한쪽 뺨을 실룩였다.
“누군가 뒤에서 개입한 일이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둘째가 당한 교통사고도 우연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벌어진 일이겠군.”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을 겁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종원 회장이 눈을 치켜뜨고는 서재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도대체 어떤 놈이 그딴 짓을 벌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