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7
67
“아님 말고.”
날 선 반응에 김인철이 어깨를 으쓱일 때 천소희가 신용카드와 칩이 든 플라스틱 케이스를 가져왔다.
조현태가 칩을 꺼내 기본 베팅을 걸자 잠시 게임을 멈추고 기다리던 배진환이 다시 카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다른 방에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던 혁권은 비스듬히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한쪽 팔을 들어 손가락을 까딱였다.
“하킴.”
“예, 보스.”
“이제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 같으니까 슬슬 작업을 시작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하킴은 바로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문자로 약속된 신호를 보냈다.
우웅.
한쪽에 서서 게임을 지켜보던 방갑수는 진동을 느끼고 몰래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바에 들어가 있는 천소희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손님한테 마티니 한 잔을 갖다 드려.”
그러자 말을 들은 천소희가 눈을 반짝였다.
마티니는 작업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네.”
능숙한 동작으로 금방 마티니 한 잔을 만든 천소희는 쟁반에 올려 게임 테이블로 가져갔다.
게임에 집중하고 있던 황광모는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천소희가 유리잔에 든 마티니를 내려놓자 고개를 들었다.
“목들 축이면서 하세요.”
눈앞에 놓인 마티니를 잠시 바라본 황광모는 이내 자연스럽게 50달러짜리 칩을 하나 집어 천소희가 들고 있는 쟁반 위에 올려놨다.
“감사합니다.”
황광모가 잔을 들어 마티니를 한 모금 마시자 그걸 슬쩍 바라본 배진환이 거둬 들인 카드를 통에 버리며 말했다.
“카드를 바꾸겠습니다.”
새 카드를 꺼낸 배진환은 빠른 손놀림으로 섞은 뒤 석 장씩 패를 나눠 줬다.
손가락으로 카드 윗부분만 살짝 들어 올려 패가 뭔지 확인한 황광모는 히든카드를 빼놓고 나머지를 오픈했다.
그러고는 등을 기댄 채 김인철과 조현태의 카드를 살펴보고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뒤집어 놓은 히드카드 뭔지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배진환이 바꾼 카드가 바로 뒷면에 보이지 않는 특수잉크로 표식을 해둔 표시목이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카드였지만 특수 제작된 렌즈를 눈에 낀 배진환과 황광모는 선명하게 표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대가 무슨 패를 가지고 있는지 훤히 다 알고 있다면 이기는 건 땅 짚고 헤엄치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거기다가 딜러까지 같은 편이었기에 이미 게임이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베팅하십시오.”
칩을 던져 넣는 황광모의 눈빛이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날카롭게 번득였다.
이걸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기 도박판이 벌어졌다.
슬금슬금 김인철의 승률이 떨어지더니 급기야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다이.”
오랜만에 좋은 패가 들어와서 베팅을 세게 들어가려던 김인철은 중요한 순간에 황광모가 카드를 뒤집어 버리자 김이 새어 버렸다.
미세하게 미간을 찡그린 김인철의 앞으로 칩이 밀어졌다.
하지만 승부에서 이겼다 해도 황광모가 금방 죽어 버린 탓에 액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렇게 깔짝깔짝 따내는 칩으로는 승리의 쾌감은커녕,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아 차라리 없는 것만 못했다.
더군다나 바로 앞에서 5만 달러짜리 판을 아깝게 졌기 때문에 더욱 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김인철은 어딘지 모르게 북받쳐 오르는 짜증을 잠재우려 와인 잔을 손에 들었다.
하지만 입술을 채 축이기도 전에 금방 바닥을 드러내자 급격하게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한 잔 더!”
탁, 소리와 함께 내려놓은 잔을 천소희가 재빨리 잡았다.
김인철과 조현태는 새롭게 돌려지는 카드 패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고, 그들이 옆구리에 끼고 있는 여자들은 점점 살벌해지는 분위기에 사내들의 눈치만 살피고 있어 바로 향하는 천소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소희는 벽장에 진열되어 있는 여러 술병들 중 빈티지 라벨이 붙은 고급 와인을 들고 돌아섰다.
그러곤 첫 마개를 딴 와인을 따르는 척하면서, 조끼 주머니에서 꺼낸 물약을 손바닥 안에 숨겨 김인철의 잔에 섞었다.
그 일련의 동작이 얼마나 물 흐르듯 매끄러운지 만약 그 광경을 본 사람이 있어서 설마 약을 탔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여기 있습니다.”
천소희가 와인을 가져다주자 카드에 정신이 팔린 김인철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잔을 들어 입에다 댔다.
그러고는 목울대를 꿀렁이며 단번에 와인을 반이나 비워 버렸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걸 본 방갑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그사이 또다시 카드가 돌아갔다.
그렇게 몇 판이 지났을까 김인철은 마지막 카드를 받기 전에 플러시가 만들어졌다.
하트 3, 4, 6, K, J이었는데 K가 히든카드로 숨겨져 있어 상대편에서 이미 패가 완성됐다는 걸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동공이 커지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지만 상대가 눈치채고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김인철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칩을 적당히 집어 들어 앞으로 밀어 넣었다.
“2천.”
“2천 받고 이천 더.”
“콜.”
“……!”
뜻밖에도 옆에 앉은 조현태가 베팅 금액을 올리자 김인철은 반색을 하면서도 의아한 시선으로 상대편 카드를 살펴봤다.
다른 사람들 카드도 나쁘지 않았다.
조현태는 A나 K만 있으면 스트레이트였고 황광모 역시 자신과 똑같은 플러시 가능성이 있었다.
패가 이러니 레이스를 치는 건 당연했다.
“뭐 해?”
계속 끗발이 안 오르다가 오랜만에 좋은 패를 잡은 조현태의 재촉에 정신을 차린 김인철은 칩을 던져 넣으며 말했다.
“레이스. 1만.”
“콜.”
“콜.”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둘 다 따라왔고 어느새 판돈이 5만 달러가 넘었다.
여섯 번째 카드가 들어왔지만 이미 플러시가 만들어져 있던 김인철은 건성으로 보고는 다른 사람들의 패를 확인했다.
9가 들어온 조현태는 아직 스트레이트가 되지 않았고 황광모 역시 K가 들어와 엉뚱하게 투페어가 만들어졌다.
내심 미소를 지은 김인철은 마음 같아서는 크게 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눈치를 채고 두 사람이 떨어져 나갈까 봐 적당히 베팅을 했다.
“1만.”
그러자 이번에도 조현태가 판돈을 올렸다.
“1만 받고 1만 더.”
“콜.”
금방 베팅액이 2만 달러로 올랐고 비록 조현태처럼 레이스를 치지는 않았지만 황광모 역시 죽지 않고 따라오자 김인철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곁눈질로 테이블 위에 깔린 두 사람의 패를 다시 한 번 살펴본 김인철은 과감하게 베팅액을 올렸다.
“5만.”
짜르륵.
김인철의 베팅에 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황광모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쳐다봤다.
“이거 젊은 사람이라서 그런지 과감하구먼.”
“좋아. 어디 한번 해 보자고.”
잠시 망설이던 조현태는 1만 달러짜리 칩 10개를 집어 앞으로 던졌다.
“5만 더.”
“이러면 나도 빠질 수 없겠구먼.”
“5만 받고 10만으로 올립시다.”
죽기는커녕 한 바퀴를 돌면서 베팅액이 10만 달러로 커지자 김인철의 머릿속이 아주 복잡해졌다.
두 장이나 더 들어와야 되는 조현태는 자꾸 세게 레이스를 쳐 대며 판돈을 올리는 것이 아무래도 뻥카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계속 따라오는 것이 왠지 모르게 찝찝했지만 설사 패가 완성된다고 해도 스트레이트라 플러시를 쥐고 있는 김인철한테 이길 수 없었다.
황광모 역시 같은 플러시였지만 점수 계산에서 제일 낮은 클로버였기에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자신이 질 수 없는 판인 데다 플러시를 손에 쥐고 겁을 먹고 죽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히든카드가 들어왔고 테이블에 쌓인 판돈은 50만 달러 한화로 거의 6억 원에 육박하는 거금이 됐다.
금방 확인을 하고 카드를 엎은 김인철과 달리 조현태는 두 장을 겹쳐서 손에 들고는 천천히 쪼았다.
그것만 봐도 아직 패가 다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반면 황광모는 힐끗 카드를 확인하고는 그대로 엎어 놨다.
가만히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황광모의 얼굴에서는 패가 어떻게 됐는지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게 자꾸만 그의 신경을 건드렸지만 김인철은 애써 외면했다.
“베팅하시죠.”
K투페어로 오픈된 카드 가운데 가장 높은 점수를 가진 황광모가 딜러의 이야기에 칩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10만.”
그러자 조현태가 바로 맞받아쳤다.
“10만 받고 5만 더.”
“콜.”
“레이스.”
김인철은 줄곧 해 오던 것처럼 점점 오르는 판돈을 가볍게 따라갔으나 뜻밖인 것은 황광모였다.
여태까지 크게 생각하지 않은 황광모가 레이스를 외치며 치고 나오는 것이다.
순식간에 베팅액이 30만 달러로 치솟았다.
처음 판을 벌릴 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커져 버린 판돈에 김인철 또한 신중해졌다.
조현태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미간을 찡그린 채 바닥에 눕힌 카드 윗부분을 손끝으로 들춰 살짝 훔쳐보고선 속으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딜러가 재촉을 해왔다.
그러자 조현태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이내 제 앞에 쌓아 놓은 칩을 단숨에 밀어 넣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사내가 뒤꽁무니를 뺄 순 없지.”
쫘르륵.
호기로운 말과 함께 칩들이 테이블 중앙으로 쏟아졌다.
순식간에 작은 산을 쌓은 칩 무더기를 보고 김인철이 입술을 살짝 비틀어 올렸다.
“그럼 나도.”
“하하, 다들 배포가 크시군. 어디 한번 해 봅시다.”
김인철의 뒤를 이어 황광모도 자신이 가진 칩을 모두 베팅했다.
모두 올인을 외치면서 칩을 다 밀어 넣자 실내는 긴장감이 흘렀다.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김연미와 윤상아도 엄청나게 커진 판돈에 눈을 껌뻑이며 숨을 죽였다.
“그럼 카드를 오픈해 주십시오.”
딜러의 말에 조현태가 먼저 패를 보였다.
예상대로 10부터 A로 이어지는 스트레이트였다.
김인철은 씨익 미소를 지으면서 앞에 놓인 카드를 뒤집었다.
그러자 주위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머.”
자신보다 높은 패에 조현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했는데 플러시였다니, 젠장!”
“그러게 왜 따라와?”
간만에 맛본 짜릿한 승리의 쾌감이 척추를 타고 흐르는 듯 했다.
‘이럴 때야말로 진정 살아 있는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지.’
희열에 벅차올라 무의식적으로 기분 좋은 웃음을 내뱉은 찰나,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잠깐.”
“…….”
고개를 옆으로 돌린 김인철은 패를 보고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황광모의 얼굴에 가슴이 철렁했다.
“이거 미안하게 됐소.”
그러면서 황광모가 패를 보이는 순간 김인철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치켜떠졌다.
“풀하우스요.”
숨겨져 있던 히든카드에서 3이 나오면서 풀하우스가 되어 있었다.
실내가 크게 술렁이며 놀람과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 어떻게…….”
플러시만 생각하고 있다가 엉뚱한 패로 뒤통수를 맞은 김인철은 그대로 몸이 굳은 채 황광모의 카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덕분에 주머니가 두둑해졌소이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황광모의 말에 약이 바짝 오른 김인철은 이를 부드득 갈며 한쪽에 서 있던 오윤태에게 소리치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