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42
742
만수대 예술단 소속 가무단까지 불러 흥겨운 분위기를 만든 이날 술자리는 새벽 늦게까지 이어졌다.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고급 양주들이 모두 동나고 새로 술을 몇 번이나 더 가져오고 나서야 겨우 연회가 끝났다.
주량이 그리 낮지 않은 혁권이었지만 연거푸 술을 권하는 최룡해와 다른 참석자들 때문에 곤혹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트집을 잡히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린 덕분에 별다른 실수없이 술자리를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정오를 넘기고 일어나 취기를 겨우 털어 낸 혁권은 박희도 대좌의 연락을 받고 시내에 위치한 개인 식당에 도착했다.
개인이 운영하는 사설 식당이라지만 상당히 규모가 커서 3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꼭대기 층에 있는 별실로 안내됐다.
“번거롭게 나오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호텔은 보고 듣는 귀가 많아서 여기서 보자고 한 겁니다.”
고려 호텔에서 감시와 도청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걸 대놓고 이야기하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괜찮습니다. 저도 밖에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편합니다.”
“이야기를 듣기로, 어제 최룡해 부장 동지의 자택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을 했다고요.”
그는 힐끗 박희도 대좌 뒤에 서 있는 한광성을 쳐다봤다.
어제 있었던 일을 전부 보고한 걸 바로 눈치챘는데, 어차피 박희도 대좌가 보낸 사람이니 그럴 걸 예상하고 있었기에 별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옥류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친분이 있는 분을 만나 동행하게 됐습니다.”
“중국 국가 감찰위 부부장인 백수광 동지하고 의형제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전과 달리 말투도 조심하고 연신 그의 눈치를 보는 모습이 중국 정부의 권력 실세인 백수광 부부장의 위세에 알아서 몸을 사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어제 함께 술을 마신 최룡해만 해도 박희도 대좌 입장에서는 까마득하게 높은 존재였다.
그런 최룡해가 직접 나서 챙길 정도로 중요한 인물인 백수광하고 친분이 있다니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충 머릿속으로 상황을 파악한 혁권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의형제까지는 아니고 사업을 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관계입니다.”
“그렇군요.”
친분을 내세우지 않는 모습에 박희도 대좌는 혁권과 백수광이 상당히 끈끈한 관계라는 걸 확신했다.
그와 동시에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위치가 확 올라갔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내 박희도 대좌는 상체를 바로 하면서 뒤에 있던 한광성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한광성이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가죽 가방을 혁권 앞에 내려놨다.
“원하던 것이 안에 들어 있을 겁니다.”
가방을 열어 보자 표지에 1급 기밀이라는 붉은색 직인이 큼지막하게 찍힌 책 네 권이 안에서 나왔다.
바로 연어급 잠수함의 정비와 운용 교범이었다.
눈에서 이채를 띤 혁권은 책을 하나씩 펼쳐 인쇄되어 있는 내용을 천천히 훑어봤다.
전문적인 내용이라 살펴본다고 해서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한눈에 봐도 가짜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알고 있겠지만 절대 다른 데로 유출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웃으면서 대답한 혁권은 안주머니에서 도장과 함께 묶인 은행 통장을 하나 꺼내 박희도 대좌한테 내밀었다.
“정확히 100만 유로가 들어 있는 홍콩 HSBC은행 통장입니다. 비밀번호는 통장 뒤에 적어 뒀으니 아무 때나 꺼내 쓸 수 있을 겁니다.”
얼른 잔액을 확인한 박희도 대좌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통장을 챙겨 넣었다.
“잠수함 대금은 어떻게 지급해 줄 겁니까?”
“깔끔하게 코르사코프 항구에서 물건을 넘겨줄 때 전액을 다 현금으로 교환하는 걸로 하지요.”
추적이 어렵고 쓰기가 편한 현금을 선호하는 데다 거래 장소인 코르사코프 항구는 북한에 우호적인 러시아 영토였기에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합시다.”
머리를 끄덕인 박희도 대좌는 혁권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보름 뒤에 사할린으로 화물을 가져가도록 하지요.”
“그때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자리에서 일어난 혁권은 박희도 대좌와 손을 맞잡으며 악수를 나눴다.
이걸로 모든 협상이 다 끝났고 이제 마지막으로 사할린에서 만나 연어급 잠수함과 현금을 맞교환하기만 하면 됐다.
더 이상 평양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혁권은 다음 날 바로 국제 기차를 타고 단둥으로 넘어갔다.
대만 타이베이시 그랜드 하얏트 타이베이Grand Hyatt Taipei 프리미어 스위트 룸.
객실에서 가장 뷰가 좋은 거실 창가에 서면 화려한 타이베이의 마천루를 온전히 발아래 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자동차의 불빛들은 너울거리는 파도와도 같았고, 바로 앞에 보이는 101타워는 저 혼자 우뚝 서 있는 밤하늘의 등대처럼 푸른빛을 내뿜었다.
그렇게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며 얼마쯤 있었을까 등 뒤에서 들리는 객실 초인종 소리에 혁권은 몸을 돌렸다.
한쪽에 서 있던 정지택이 상대를 확인하고 문을 열자 심인성이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하나 더 있는 것을 발견한 혁권의 미간이 와락 찡그려졌다.
“야경이 굉장히 아름답군.”
심인성은 혁권의 표정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짐짓 모른 척 창가로 다가와 야경을 보곤 감탄사를 터트렸다.
“역시 비싼 객실이 다르긴 달라. 안 그러나?”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온다는 얘기는 없었지 않소.”
날 선 혁권의 목소리에 심인성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함께 온 샌더슨을 쳐다보곤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윗선에서 지시가 내려온 걸 어쩌겠소.”
한국말로 대화를 나눠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로 대충 상황을 파악한 샌더슨이 능청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우리한테도 귀뜸을 해 줬어야지, 조금 실망이군.”
혁권이 눈썹을 찡그리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쪽은 말을 안 해 줘도 이렇게 알아서 냄새를 맡고 오잖소.”
“후후후. 반박은 못 하겠군. 아무튼 이번 일에 우리도 끼기로 했으니까 앞으로 잘해 보자고.”
“쯧.”
짧게 혀를 찬 혁권은 두 사람을 쳐다보면서 깊이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둘이 함께 객실에 나타난 걸 보면 이미 국정원과 CIA 간에 합의가 끝났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지만, 그렇다고 일이 여기까지 진행됐는데 못 하겠다고 판을 엎어 버릴 수는 없었다.
“둘 다 앉으시오.”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그대로 소파로 향하자 두 사람도 그를 따라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린 혁권은 셋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된 건지 말이나 들어 봅시다.”
그러자 미리 상의를 했는지 샌더슨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가운데 심인성이 나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CIA에서 측면 지원을 해 주는 대신 이번에 획득하는 잠수함 관련 정보를 함께 공유하기로 한 것 말고는 바뀐 게 없으니까 김 대표는 원래 작전대로 움직이시오.”
“재주는 내가 넘고 돈은 양쪽에서 다 챙기는 것 같아서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군.”
불쾌함을 그대로 드러내며 툭 내뱉자 심인성이 그를 달래려는 것처럼 말했다.
“참, 그리고 말인데 전에 말했던 자들은 모두 체포해 지금 경찰에서 조사 중이오. 혹시 궁금해할까 싶어서 말해 주는 거요.”
“······.”
무슨 의도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바로 눈치챈 혁권은 잠깐 똑바로 심인성을 쳐다보다가 이내 뒤편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백성균한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백성균이 다가와 탁자에 가죽으로 된 서류 가방을 하나 내려놨다.
“연어급 잠수함에 대한 정비 운영 교본이 들어 있으니 확인해 보시오. 100만 유로나 주고 받은 거니까 가짜는 아닐 거요.”
두 사람의 눈이 반짝이는 걸 보며 그는 안주머니에서 초소형 카메라가 숨겨진 명품 넥타이핀을 꺼내 가방에 올려놨다.
“지하 갱도 안에 들어가 있는 잠수함 수리 시설과 부두를 촬영하기는 했는데, 제대로 찍혔는지는 모르겠소.”
흥미로운 표정을 지은 샌더슨이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물었다.
“지하 부두에 혹시 신포급으로 불리는 SLBM 탑재 신형 잠수함이 없었소?”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그런 것이 있는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소. 하지만 부두에 정박해 있던 잠수함이 여러 척 됐으니까, 혹시 있었을지도 모르니 영상을 확인해 보시오.”
자신이 성급했다는 생각에 샌더슨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잠수함은 이제 날짜가 지났으니까 13일 뒤에 사할린 코르사코프 항구에서 현금하고 교환하기로 합의했소.”
“어뢰도 가져오는 거요?”
“533mm어뢰 4발을 함께 넘기기로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아직 완전히 손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원하던 것들을 모두 받아 냈다는 걸 확인한 심인성의 얼굴에 짙은 웃음이 떠올랐다.
“역시 잘 해낼 줄 알았소.”
정색을 한 채 심인성과 샌더슨의 얼굴을 차례대로 쳐다보면서 그가 말했다.
“미리 말해 두는데 행여라도 거래 중간에 끼어들어서 일을 망칠 생각 같은 건 아예 꿈도 꾸지 마시오.”
거래 현장을 잡는다면 북한 UN 제제를 어기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겠지만, 그것과 동시에 혁권은 정보기관하고 손을 잡은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 다시는 이쪽 사업을 할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국정원과 CIA에서 협조 사실을 숨기고 정보를 조작한다고 해도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었다.
특히나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면서 거래를 한 것이 아니라 아예 두 정보기관에 붙어서 협력한 것이 밝혀진다면 자칫 공공의 적이 될 수도 있었다.
“그냥 지켜보기만 할 테니 염려 마시오.”
사전에 약속했던 일이었기에 심인성은 약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고 샌더슨 역시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러시아에서 사고를 벌이면 우리도 뒷수습이 어려우니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완전히 신뢰를 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서 아무리 말로 약속을 해 봤자 상대가 깨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기에 혁권은 이야기를 길게 안 했다.
대화가 거의 다 마무리된 가운데 그는 마지막 남은 문제를 거론했다.
“북한 쪽에서 남미 마약 카르텔에 소형 잠수함을 대거 팔 수 있을 거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그건 어쩔 거요?”
그러자 샌더슨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말했다.
“다음 달에 마이애미 인근 해역에서 마약을 잔뜩 실은 소형 잠수함 한 척이 마약단속청(DEA) 해상 초계기에 발각돼 추격전을 벌이다가 격침당하는 사건이 있을 거요.”
“······.”
“첫 밀수 시도가 실패하고 조사 결과 북한이 마약 카르텔에 몰래 팔아넘긴 잠수함이라는 것이 밝혀져 UN에서 공론화가 된다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바짝 몸을 움츠리게 되지 않겠소.”
이미 북한을 옴짝달싹 못하게 엮어 넣을 시나리오를 다 마련해 둔 걸 알아차린 혁권은 새삼 CIA의 무서움을 체감할 수 있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북한쪽하고 거래를 끝낼 수 있었기에 혁권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계획을 조율하고 북한에서 빼낸 잠수함 교본과 영상 파일을 넘긴 혁권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만에서 계속 머물면서 다음 일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