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96
796
차량 세 대가 시내에 위치한 선양고궁박물원[瀋陽故宮博物館院] 근처 도로가에 세워져 있었다.
미세먼지와 함께 어느새 짙은 어둠이 내려진 도로에는 인적이 드문 가운데 간간이 환하게 전조등을 켠 차량 몇 대만이 지나다닐 뿐이었다.
혁권은 뒷좌석에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차분히 가라앉은 표정을 하고 있었고, 그런 그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앞에 탄 하킴과 지병하 역시 입을 열지 않은 채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던 중, 보도블럭이 깔린 길을 걷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단순히 지나가는 행인은 아닌지 곧장 차량 쪽으로 걸어온 사내는 혁권이 탄 뒷좌석 쪽 창문을 손등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들어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혁권이 말했다.
“열어 줘.”
덜컥, 하고 잠금장치가 풀리자 사내가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는 옆자리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사내는 슬쩍 차안을 살핀 뒤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정규진입니다.”
“김혁권이오.”
“심 과장님한테 대략적인 상황은 이야기 들었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처럼 생긴 인상과 달리 정규진은 선양에 파견 나와 있는 베테랑 국정원 블랙 요원이었다.
“선양 공안에 알아보니 그쪽에서는 주 대리를 잡아가지 않았다고 하더이다.”
“그렇다면 북측의 소행일 가능성 크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따로 북한에서 인원이 들어왔다는 정보가 없는 걸 보면 기존에 있던 놈들이 움직인 것 같습니다.”
“짐작 가는 자들이 있으면 말해 주시오?”
그러자 정규진은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 하나를 띄워 그에게 보여 줬다.
“이름은 김형일, 북한 보위부 상위로 선양 일대의 탈북자 체포조를 지휘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아마도 북측에서 함정을 판 거라면 이자가 관련되어 있을 겁니다.”
사진을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본 혁권은 고개를 들어 정규진을 봤다.
“지금 이자는 어디에 있소?”
그러자 정규진이 돌려받은 스마트폰을 챙겨 넣으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놈들이 눈치라도 챈다면 아예 깊숙이 숨어 버리거나 납치된 사람한테 위해를 가할 수도 있으니까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흐음.”
마음이 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그는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소.”
“놈들이 거점으로 쓰는 곳을 파악해 둔 것이 있으니까 위치를 알아내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잠시 이야기를 멈춘 정규진은 혁권을 쳐다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납치해 간 곳을 찾아내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당연히 바로 구해 낼 거요.”
“총기를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데다 중국에 파견을 나와 있는 만큼 다들 특수훈련을 받은 놈들이라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그러자 혁권이 눈을 매섭게 번뜩이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누구든 상관없소. 내 사람을 건드렸으니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해 줄 거요.”
“…….”
진한 살기에 정규진은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쫙 끼치는 걸 느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정이 넘어서 다시 주성철이 묵었던 호텔 객실로 돌아오자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된 주정화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빠는 찾으셨어요?”
“아직.”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는 말에 주정화가 얼굴 가득 실망을 안고선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힘없이 축 늘어진 그녀에게 혁권이 위로 섞인 말을 건넸다.
“여기저기 손을 써 놨으니까 곧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벌써 뭔가 잘못된 건 아니겠죠?”
주정화가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한가하게 거울이나 보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하얗게 각질이 일어난 입술은 벌써 몇 번이나 짓씹은 듯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놈들도 얻어 낼 것이 있을 테니 주 대리에게 함부로 손을 대진 않을 거야.”
“네. ……그렇겠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주정화가 말했다.
“혼자 여기 있으니 계속 안 좋은 생각만 떠올라요. 안 그러려고 노력은 하는데, 그게 뜻대로 잘 안 돼요.”
거칠어진 뺨과 푹 꺼진 눈 밑이 그녀의 마음고생을 짐작케 했다.
“그래, 그럴 거야.”
혁권이 이해한다며 주정화를 다독이는데 불현듯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부웅 울렸다.
상대를 확인한 혁권은 곧장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뭐 좀 알아낸 것이 있소?”
-방금 연락을 받았는데 주성철씨 이름으로 된 한국 은행 계좌에서 17만 달러나 되는 돈이 인터넷 뱅킹을 통해 중국 은행 계좌로 송금됐다고 합니다.
“……!”
납치된 주성철이 스스로 돈을 송금하지는 않았을 테니 이건 분명 북한 쪽에서 한 짓이 틀림없었다.
혁권이 눈에서 이채를 띠는 가운데 귀에 댄 스마트폰에서 정규진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이걸로 주성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확인됐으니 좋은 신호입니다. 그리고 김형일이 있는 곳을 찾아냈습니다.
“거기가 어디요?”
-조선관이라고 선양 시내에 위치한 북한 식당입니다. 겉으로는 중국 사업가가 북한 사람들을 데려와 운영하는 걸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보위부에서 외화 벌이 겸 해외 공작 거점으로 사용하는 곳이지요. 내부에 심어 둔 협력자의 정보에 의하면 김형일과 부하들이 어제 낯선 사람을 한 명 끌고 와 지하실에 가뒀다고 하더군요.
말을 들은 혁권은 숨을 들이켰다가 소리를 죽여 뱉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뭐요?”
미간을 좁히며 묻자 정규진이 약간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분명 놈들이 저항을 심하게 할 텐데 시내 한복판이라 소란이 일면 여러 가지로 골치가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계속 지켜보다가 주성철을 데리고 밖으로 나오면 그때 손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칫 일이 커질 수도 있었기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정규진과 달리 언제 놈들이 납치된 주성철에게 위해를 가할지 몰랐기에 그는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공안에서 우릴 방해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쪽하고 따로 이야기가 된 것이 있는 겁니까?
“그렇소.”
-이거 여러 번 절 놀라게 하는 군요.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내자 초췌한 얼굴을 한 주정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희 오빠가 어디에 있는지 찾은 거예요?”
“그래.”
머리를 끄덕이자 금방이라도 몸을 일으키려는 듯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어디에 있어요? 설마 벌써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끌려간 건 아니죠.”
“진정해.”
혁권은 주정화의 어깨를 살며시 눌러 그대로 침대에 앉아 있게 하곤 대신 객실 한쪽에 비치된 소형 냉장고에서 차가운 생수병을 꺼냈다.
컵에 따라 마시라고 건네주자 주정화는 뭐라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다 하는 수 없이 받아 들었다.
물을 반쯤 비운 뒤 입에서 떼니 혁권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차분히 말했다.
“머리는 좀 식혔나? 그렇게 흥분해서 될 일이 아니야.”
“죄송해요. 그래도 소식을 들으니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주정화가 젖은 눈으로 혁권을 쳐다보았다.
“마음은 이해해.”
아무래도 가족 일이니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을 터였다.
“주 대리는 우리가 구해 낼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도록 해.”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자신이 가 봤자 짐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그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포기했다.
“알겠어요.”
선선히 머리를 끄덕인 주정화가 시선을 들며 말을 이었다.
“대신 오빠를 꼭 데려와 주세요.”
“약속하지.”
눈을 마주치며 자신있게 대답한 혁권은 이내 그녀를 남겨 두고 부하들과 함께 객실을 나갔다.
부우우웅.
엔진 소리를 내며 호텔을 떠난 차량 행렬은 아직 새벽의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 거리를 빠르게 달려갔다.
뒷좌석 가죽 시트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그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정면을 주시했다.
부하들 역시 곧 있으면 한바탕 격전을 치러야 한다는 걸 알기에 차 안은 말 한마디 없이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혁권은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액정에 뜬 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몇 번 울리고 나서 자다가 일어났는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누군가 전화 받았다.
-웨이[喂].
“납니다, 양천 국장님.”
양천은 선양 시를 관할하는 공안국 수장으로 백수광 부부장의 소개를 받아 어제 안면을 튼 사이였다.
-아. 김 대표님.
“이른 시간에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양천 국장의 물음에 그는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용건을 이야기했다.
“어제 부탁드렸던 걸 이행해 주셨으면 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납치범들이 어디 있는지 찾아낸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다행이군요. 은신해 있는 곳이 어딥니까?
“조선관입니다.”
-거기라면 시내에 있는 북한 식당을 말하는 겁니까?
활동을 모르는 척 눈감아 주고 있었지만 공안에서도 자국에 들어와 있는 북한 보위부를 항상 예의 주시하고 있었기에 이름을 대자 어딘지 금방 알아차렸다.
“맞습니다.”
-일이 벌어지면 조금 시끄러워지겠군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중심가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내에 위치해 있는 데다가 곧 날이 밝으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가 더 어려울 터였기에 여러 가지로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고민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던 양천 국장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 움직일 생각입니까?
“지금 가고 있는 중입니다.”
-흐음. 알겠습니다. 바로 부하들을 출동시키도록 하지요.
원하던 대답이 나오자 그는 소리없이 숨을 내쉬고는 손에 든 스마트폰을 고쳐쥐며 말했다.
“이번 일은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나중에 백 부부장님께 말씀이나 잘해 주십시오.
“물론이지요.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종료 버튼을 누른 혁권은 굳어 있던 표정을 조금 펴며 몸을 뒤로 기댔다.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직접 나서는 건 어렵더라도 뒤를 봐 주는 것만으로도 한결 가볍게 일을 벌일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혁권과 부하들이 탄 차량 세 대가 가로등만 환하게 불을 켜고 있는 거리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온 것 같습니다.”
조선관에서 한 블록 떨어진 거리에 밴을 세워 두고 있던 정규진은 운전석에 탄 국정원 요원의 말에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그러자 환한 전조등 불빛을 밝힌 채 차량 세 대가 일렬로 다가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렇군.”
상대도 이쪽을 봤는지 천천히 속력을 줄이더니 몇 미터 거리를 두고 밴 뒤편에 차례대로 멈추어 섰다.
혁권이 부하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자 정규진도 밴에서 내렸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해가 뜰 텐데 정말 이대로 일을 벌일 겁니까?”
“그럼 여기까지 왜 왔겠소.”
단호한 대답에 정규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밴 뒤편 짐칸 문을 열었다.
“일단 급한 대로 가지고 있는 걸 다 긁어 왔으니 필요한 만큼 가져가십시오.”
넓은 짐칸에는 AK47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총기와 탄약 그리고 수류탄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