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38
838
#각오는 됐겠지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표현구 국정원장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간부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석으로 가서 앉은 표현구 원장은 간부들을 쓸어 보다가 제일 끝자리에 있는 심인성 과장을 발견하곤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또 사고를 쳤더군.”
시선을 마주하게 된 심인성 과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표현구 원장이 못마땅한 것처럼 혀를 찼다.
“어떤 상황이야?”
국내 파트를 담당하고 있는 이철웅 2차장이 약간 경직된 얼굴로 대답했다.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많이 심각한 거야?”
“벌써 사건 당시를 찍은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가 SNS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인 데다가 주변에 아파트 대단지들이 많아 총성과 폭음을 들은 주민이 한둘이 아닐 테니 애초에 사실을 감추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난번처럼 물 타기를 할 방법이 없겠어.”
이철웅 2차장이 난감한 듯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너무 많이 올라와 있어 대놓고 검색을 차단하지 않는 이상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제 곧 언론 보도도 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끄으응. 골치 아프게 됐군.”
사건이 알려지면 정국이 크게 소란스러워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에 사무실 안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러자 왼편에 앉은 백정선 1차장이 표현구 원장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히려 이번 사건이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무슨 말이야?”
표현구 원장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김혁권을 습격한 무리가 일본 야쿠자 조직원들이라는 걸 아실 겁니다.”
아직 외부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현장에서 수습된 시신들 가운데 야쿠자 조직원이 두 명 있었다.
여권을 비롯한 신분증 같은 걸 일체 소지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일본에서 범죄 이력이 있어 경찰 전산에 요주의 인물로 등록되어 있는 덕분에 신원 확인을 하자 바로 누군지 알아낼 수 있었다.
사무실로 오던 중에 그런 내용을 보고받았던 표현구 원장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이걸 잘만 활용한다면 최근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한일 관계를 경직시키고 있는 일본을 압박해 분위기를 반전시킬 카드로 쓸 수 있을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표현구 원장은 눈에서 이채를 띠었다.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자는 건지 설명해 봐.”
등받이에서 몸을 떼며 관심을 보이자 백정선 1차장이 얼른 생각해 둔 걸 이야기했다.
“언론에 살짝 가공한 내용을 흘려서 일본 야쿠자 조직원들이 국내에서 중요 요인을 상대로 테러를 벌인 걸로 발표하는 겁니다.”
“테러라······.”
“그러면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영상 안에 서로 총격전을 벌인 것도 해명이 되고 일본 정부의 입장이 아주 난처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듯하군.”
표현구 원장이 팔짱을 낀 채 머리를 끄덕였다.
“야쿠자 조직원의 시신까지 있으니 발뺌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직접 벌인 일이 아니라고 해도 이슈화시킨다면 일본 정부를 충분히 난처하게 만들 수 있었다.
단순한 이권 다툼이라도 불법 총기가 쓰인 이상 문제가 될 텐데, 테러라는 단어가 들어간다면 제아무리 뻔뻔한 일본 정부라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 끝으로 툭툭 두드리면서 잠시 고심하던 표현구 원장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이철웅 2차장을 쳐다봤다.
“자네가 보기엔 어때?”
힐끔 맞은편에 있는 백정선 1차장을 보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은 생각 같습니다. 야쿠자 조직이 일을 벌인 건 사실이니 나중에 문제가 될 것도 없고 말입니다.”
긍정적인 반응에 표현구 원장은 굳어 있던 표정을 펴며 말했다.
“좋아. 아침에 청와대로 들어가 각하를 뵐 때 보고드릴 수 있도록 1차장하고 함께 최대한 빨리 계획을 세워 봐.”
“알겠습니다.”
몸을 뒤로 기댄 표현구 원장은 심인성 과장을 보면서 다시 정색을 한 채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만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확실히 관리하도록 해!”
“예. 명심하겠습니다.”
심인성 과장은 대답을 하며 앉은 자세로 머리를 숙였다.
질책을 듣기는 했지만 다행히 이 정도로 마무리가 된 것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날이 밝고 대통령의 승인이 떨어지자 발 빠르게 움직인 국정원은 정오가 되기 전에 경찰을 통해서 약간 손질이 된 내용을 언론 브리핑을 통해 공식 발표 했다.
그와 동시에 외교부 장관이 주한 일본 대사를 불러 이번 사건을 공식적으로 항의하고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으~흠흠~.”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뽀얀 수증기와 함께 커다란 타월을 몸에 두르고 거실로 나온 소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장대 앞에 앉았다.
에센스와 크림을 차례대로 바르면서 피부 상태를 점검하는데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연신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화장대에서 아로마 오일을 집어 한 방울 떨어트리자 달콤한 꽃향기가 퍼져 나갔다.
연예인이든 모델이든 제 몸이 재산인 것은 똑같았기에 열심히 손부터 다리 끝까지 크림을 펴 바르고 있는데, 갑자기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액정에 뜬 혁권의 이름을 보고 표정을 환하게 밝힌 소현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빠!”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내일 데이트 때문에 전화했나, 하고 생각했다.
뭐니 뭐니 해도 내일은 1년에 딱 한 번 있는 크리스마스이브가 아닌가.
혹시 특별한 계획을 짜 놨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반갑게 전화를 받지만 혁권의 목소리는 예상과 정반대로 어둡고 무거웠다.
-밤늦게 미안.
그는 피곤한 듯 잠시 후, 하고 숨을 내뱉고는 갑작스러운 말을 입에 담았다.
-내일 만나기로 한 약속······ 취소해야겠어.
“아······.”
순간 누군가 찬물을 머리에 끼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요?”
소현은 추궁하는 말투가 되지 않게 주의하며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좀 복잡한 일이 생겼어. 내일은 못 만날 것 같아.
“혹시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답지 않게 차가운 대답을 듣자 소현은 가슴에 작은 생채기가 난 것만 같았다.
회사 일에 대해서 세세하게 말해 주는 편은 아니어도 이런 식으로 밀어내는 듯한 태도를 취한 것은 처음이었다.
혁권도 아차 했는지 금방 수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말뜻은······ 걱정하지 말라는 거였어. 어차피 이건 내가 해결해야 될 일이고.
평상시처럼 다정하진 않지만 그래도 아까보단 한결 나았다.
소현은 실망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알았어요.”
이럴 때는 어른스럽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편이 나을 터였다.
소현의 반응에 혁권은 다행스러워하며 그래, 하고 짧게 답하곤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웬만하면 사랑해라든가 다음에 또 전화할게 같은 작별 인사를 남길 텐데, 그런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 사정이 나쁜 모양이었다.
그래도 서운한 감정이 다 사라지진 않았다.
소현은 까맣게 변한 스마트폰의 액정을 바라보다가 이내 머리카락을 둘러맨 수건을 풀어 버리곤 양 얼굴을 감싸 쥐었다.
“힘내자.”
크리스마스이브 직전에 데이트를 바람맞다니.
솔직히 말해서 울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소현은 입술을 꽉 깨물며 기분전환을 하려고 노력했다.
“모처럼 만든 휴일이잖아. 즐겁고 편하게 보내야지!”
혼자면 뭐 어때.
혁권을 만나기 전엔 항상 밸런타인데이든 크리스마스든 항상 혼자였으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소현은 오랜만에 친구들에게 전화라도 해 볼까 하고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한번 입을 열면 서러운 감정이 마구 쏟아져 나올 것 같아서 덜컥 두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대신 소현은 가벼운 티셔츠와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그 위에 두꺼운 패딩을 걸쳤다.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쓰니 얼굴이 거의 가려져서 밤에 다른 사람이랑 마주쳐도 쉽게는 못 알아볼 것 같았다.
노트북에 전원을 켜 놓고 소현은 오늘 밤 내내 먹고 마실 맥주와 안주를 사러 편의점에 갈 생각으로 집 열쇠만 주머니에 쑤셔 넣곤 현관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으. 추워.”
나름 단단히 옷을 챙겨 입고 나왔지만 추운 기운에 그녀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오후부터 내린 새하얀 눈은 길 한쪽에 둥그렇게 쌓여 있었다.
늦은 밤이라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대신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소현이 사는 오피스텔 건물 앞에도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사람 키 정도 되는 작은 트리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꼬마 전구들이 깜박거리며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보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더욱 울적해졌다.
“칫.”
괜히 입술을 삐죽인 소현은 조금 떨어져 있는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자동차 옆을 지나 얼마쯤 갔을까 갑자기 승합차 한 대가 빠르게 달려오더니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추어 섰다.
끼이이익.
“······!”
화들짝 놀란 소현이 그대로 얼어붙은 가운데 옆문을 열고 시커먼 사내 서너 명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양옆에서 강제로 그녀를 붙잡았다.
“꺄아악! 왜 이래요?”
“뒈지기 싫으면 입 닥쳐!”
“이거 놔! 살려 주세요.”
마구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치자 사내 한 명이 인상을 쓰곤 주머니에서 전기 충격기를 꺼내 소현의 몸에 대고 작동시켰다.
치지직!
순간 강한 전류가 흐르자 그녀는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어서 실어.”
죽은 것처럼 축 늘어진 소현을 승합차에 태우려고 할 때 뒤에서 조용한 밤공기를 깨는 총성이 터졌다.
타아앙!
퍽!
날아온 소금 탄환이 옆에 있던 가로등 쇠기둥에 부딪치면서 하얀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혼비백산해서 고개를 돌리자 혁권이 붙여 준 여자 경호원 두 명이 소금 탄환을 쓰는 호신용 권총을 쏘며 다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거기 멈춰!”
일정을 소화할 땐 어쩔 수 없었지만 하루 종일 경호원이 붙어 있는 걸 그녀가 부담스러워했기에 거리를 두고 따라가다가 괴한이 납치를 하려 들자 황급히 막으려고 오는 거였다.
“제길. 어서 태워!”
승합차에 타고 있던 마에다의 외침에 사내들은 얼른 늘어져 있는 소현을 안으로 밀어 넣고는 차 문을 닫았다.
“출발해!”
“옛.”
부우우웅.
대답과 함께 운전대를 잡은 부하가 가속페달을 밟자 요란한 엔진 소리를 울리면서 승합차가 그대로 출발했다.
간발의 차이로 바로 눈앞에서 승합차를 놓친 경호원들은 뛰어서라도 따라가려고 하다가 결국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야 마는 뒷모습을 낭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빨리 보스한테 연락을 해.”
짧은 커트 머리를 한 여자 경호원은 동료에게 그리 말하곤 짜증스럽게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이 실수를 어떻게 만회해야 할지.
성남에 위치한 안가로 거처를 옮긴 혁권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얼음을 채운 술잔에 든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보스, 밤이 늦었습니다. 이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옆으로 다가온 백성균의 말에 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킴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습니다. 저녁에는 음식을 남기지 않고 다 비웠다고 하더군요.”
“다행이군.”
만약 습격을 당할 때 타고 있던 대형 SUV가 하체까지 방탄 처리가 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날 습격한 놈들이 야쿠자라고 했지?”
“예. 현장에서 죽은 자들의 신원을 조회한 결과 야마구치 구미에 소속된 야쿠자들이었다고 합니다.”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말했다.
“그놈들하고 내가 얽힌 일이 있었던가?”
“제가 알고 있는 한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군.”
술잔을 꽉 움켜쥔 채 혁권이 이를 부득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