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61
861
#백기사
원목으로 만들어진 넓은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김인철이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자 차민성 과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비록 구속은 면했지만 여전히 비난 여론이 크고 일부 시민단체들이 태일그룹 상품 불매 운동까지 벌이면서 그를 곤욕스럽게 하고 있기 때문인지 김인철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분간 칩거를 하며 분위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연이은 악재에 임직원들이 동요하고 있는 데다가 큰형인 김성균 사장이 호시탐탐 회사를 노리고 있었기에,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서 매일 빠뜨리지 않고 출근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됐어?”
등을 뒤로 기대면서 묻자 일이 잘됐는지 차민성 과장이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지시하신 대로 사과 상자들을 다 전달했습니다.”
“담당 지법 원장은 뭐라고 해?”
기자나 수사관이 냄새를 맡고 따라붙을 수도 있었지만 재판을 지연시키기 위해서 꼭 회유해야 되는 인물이었기에 차민성 과장이 직접 만나러 갔었다.
“다음 달까지 재판 배정을 미루고 판사도 우리 쪽에 유리하게 조정을 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대답을 들은 김인철은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제 한시름 놨군.”
“이러면 1심 판결은 총선이 훨씬 지나서야 나오게 될 겁니다.”
“좋아. 그때쯤이면 재판에 대한 관심이 크게 떨어져 있겠지.”
대신 옥살이를 할 총알받이도 구해 놨으니 총선이 끝날 때까지만 버티면 전방위로 로비를 벌여 집행유예 판결을 충분히 끌어 낼 수 있었다.
그러면 경제에 악영향을 주는 걸 우려하며 검찰에서 항소를 포기하고 그룹 차원에서 사과 성명과 함께 수십억 규모의 공익사업을 발표하는 걸로 화답해 사건을 흐지부지 끝내 버리는 것이 계획이었다.
“문제는 건설 쪽에서 그때까지 얌전히 있느냐 하는 겁니다.”
차민성 과장의 말에 김인철이 얼굴을 구겼다.
“가만히 있을 턱이 없지.”
그러다 퍼뜩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들어 차민성 과장을 보며 말했다.
“오로라 펀드를 우리 쪽으로 회유하고 건설 지분을 매입하는 건 어떻게 되고 있어?”
“협상을 계속 진행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지시를 내린 것이 언젠데 아직도 이야기만 하고 있다는 거야!”
인상을 쓴 채 김인철이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늦어지는 이유가 뭐야!”
“지분 매입 가격에서 이견이 있고 오로라 펀드에서 추가로 요구하는 조건까지 있어서 합의점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지분값으로 얼마를 더 달라고 하는 거야?”
시선을 받은 차민성 과장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조병득 증권 사장의 말로는 8천억 이상을 요구하고 있답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거친 욕설이 튀어 나왔다.
“이런 썅! 이것들이 아주 미쳤군.”
“그리고······.”
“또 뭘 바라는 것이 있는 거야?”
“태일산업의 사내 이사를 하나 자신들 몫으로 주길 원한다고 합니다.”
눈썹을 치켜 올린 김인철은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책상을 세게 내려쳤다.
“이건 대놓고 그룹 경영에 끼어들겠다는 거잖아!”
태일그룹 순환 출자 구조의 정점에 있는 회사가 바로 태일산업이었기에 단순한 이사 자리 하나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인철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주 당연한 거였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늑대를 쫓아내려다가 호랑이를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절대 이사회에 자리를 내줄 수 없어.”
“아무래도 우리가 상황이 급하다는 걸 알고 욕심을 부리는 걸로 보입니다.”
“하이에나 같은 놈들.”
경멸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김인철은 달아오른 머리를 식히려는 것처럼 길게 숨을 내뱉더니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룹 경영권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이사 자리를 주는 건 안 돼.”
“그러면 협상이 조금 더 길어질지도 모릅니다.”
“쯧.”
짧게 혀를 찬 그는 앉은 채로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 지분 가격을 올려 주는 걸로 합의를 보라고 해.”
“자금 조달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우려를 나타내자 김인철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을 쏘아붙였다.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도저히 설득이 먹힐 것 같지 않은 모양새에 차민성 과장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예. 알겠습니다.”
무리수라는 걸 김인철 역시 알고 있었지만 당장 경영권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이것저것 따지며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태일그룹이 헤지 펀드 따위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에 치욕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냥 조용히 찌그러져 있지 않고 싸움을 걸어와서 일을 이렇게 만든 김성균 사장을 떠올리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눈에 띄게 긴장한 소현은 자꾸 거울을 보면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뭐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어요?”
머리를 손보던 최현정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묻자 그제야 소현이 민망한 표정으로 하하, 웃었다.
“처음이라 긴장했나 봐요.”
“소현 씨도 참.”
최현정이 새삼스럽다는 듯 말했다.
“여태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잖아요. 촬영 처음 들어갈 때도 현장이 낯설어서 그랬지 원래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익숙한 덕에 전혀 떨지도 않았으면서.”
“그래도 오늘처럼 팬분들을 직접 보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소현은 가슴이 떨린다며 제 심장 위에 손까지 얹었다.
“다들 좋아해 주셔야 할 텐데.”
꼭 이럴 때만 소심한 태도를 보이는 소현의 모습에 최현정이 걱정하지 말라고 어깨를 두드렸다.
“소현 씨 팬인 사람만 오는 사인회인데 그렇게 긴장할 것까지야. 게다가 50명 한정이라서 금방 끝날 테니 그렇게 힘들지도 않을걸요.”
소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약간 초조한지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계속 신경 썼다.
최현정은 어쩔 수 없다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곤 다시 머리 손질하는 것에 집중했다.
주얼리 브랜드인 미리내의 백화점 입점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므로 가급적이면 몸에 걸친 주얼리가 돋보일 수 있게 목선과 귀가 잘 보이는 헤어스타일로 해 달라는 요청이 있던 터였다.
일단 고데기로 머리카락에 크게 웨이브를 준 후, 하나로 땋아서 위로 틀어올리자 소현의 길고 가는 목과 우아한 어깨가 드러났다.
너무 꾸몄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일부러 잔머리를 자연스럽게 흐트러트린 다음 윗부분의 볼륨을 살리고 스프레이와 헤어핀으로 모양을 고정시키고 나니, 영화제 레드카펫에 서야 할 만큼 완벽한 스타일이 완성되었다.
“끝났어? 그럼 주얼리는 이걸로······.”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방영실이 준비해 놓은 귀걸이와 목걸이를 가져와 소현의 앞에 내려놓았다.
전부 미리내 브랜드에서 나오는 액세서리들로 은색이 잘 받는 소현을 위해, 화이트 골드와 아주 작은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세공된 이번 시즌 대표 상품들이었다.
좀 더 화려하고 묵직한 고가의 컬렉션도 있지만 백화점에서 하는 간단한 팬 사인회에서는 너무 과도하다는 의견이 있어 이번엔 다소 심플한 디자인들을 골랐다.
마지막으로 양손에 작은 실반지들을 여러 개 레이어드해서 끼운 방영실은 음,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주렁주렁 매단 느낌이면 몇 개는 빼려고 했는데 딱 잘 어울리네.”
“소현 씨도 꾸미면 화려한 인상이니까요.”
화장에 따라서 풍기는 느낌이 확확 달라지는 타입이라 쇼에 설 때도 메이크업해 줄 기분이 난다며 몇 번 칭찬을 받은 적이 있던 소현은 고맙다고 웃었다.
5분 후 진행요원의 안내를 따라 백화점 로비로 들어온 소현은 벌써 중앙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후우, 심호흡을 했다.
로비는 물론이고 위층에도 줄줄이 구경꾼들이 난간에 기대어 섰는데, 처음엔 단순히 연예인이 왔다고 수군덕대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이내 소현이 등장한 것을 알고는 스마트폰을 들이대며 사진을 찍기 바빴다.
“우와.”
“엄청 예쁘네.”
“얼굴이 무슨 주먹만 하냐.”
둥글게 쳐진 가이드라인 밖에 선 사람들 중 대부분은 얼굴을 알아보고 감탄사를 터트렸으며, 특히 스타일 아이콘으로 유명한 소현이라 여자들의 반응도 열렬했다.
“언니~!”
“손 한 번 흔들어 주세요!”
소현은 생각보다 여자들이 많은 것에 안도하며 포토존 앞에 서서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브랜드 홍보 팀에서 나온 직원들이 사진을 찍다가, 이내 시간이 되어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자 진행요원이 사인회에 당첨된 사람들을 한 명씩 앞으로 안내했다.
소현은 한 명 한 명 눈을 다 맞춰 주면서 상냥하게 이름을 물어봐 주고 어디서 왔냐, 멀리서 왔다고 하면 ‘어머, 그래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 마치 좋아하는 아이돌을 눈앞에서 본 소녀팬처럼 다들 기쁜 얼굴이 되어 대답하다가 다른 사람 차례가 되어 비켜 줘야 하는 것을 알고는 ‘다음 작품도 꼭 볼게요.’ 하고선 악수하고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처음 하는 팬 사인회에 무척 긴장했던 소현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익숙해져서 줄이 끝에 다다랐을 때는 무척 아쉬워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 팬까지 다 사인을 해 주고서 행사가 끝나자 직원들이 재빨리 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소현 씨는 이쪽으로 오세요.”
뒤쪽 통로로 안내해 주는 직원과 매니저를 따라 걸으면서 소현은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아, 조금만 더했으면 좋았을 텐데······.”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앞에 가던 직원이 웃으며 돌아보았다.
“무척 마음에 드셨나 봐요.”
“예. 다들 너무 친절하고 저를 너무 좋아해 주셔서······.”
가슴이 벅차올랐다는 말을 하려던 소현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음에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 화면엔 메시지가 하나 도착해 있었는데, 바로 혁권의 어머니였다.
마침 친구들 모임이 있어서 나가는데 옷차림이 어떻냐고 물어보는 메시지였다.
현관 앞 유리에서 찍은 듯한 사진에 소현은 바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이모티콘을 보냈다.
-너무 예쁘세요. 어머니!
-호호, 그러니? 오랜만에 하는 모임이라 옷차림에 신경 좀 썼단다.
-어디서 모이시는데요?
-명동에 있는 펠리스 백화점. 거기 9층 식당에서 밥 한 끼 먹고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어.
어머, 하고 소현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면서 얼른 손가락을 움직였다.
-재미있는 시간 보내세요.
-그래. 너도 점심 맛있게 먹어.
-네, 어머니.
SNS 대화를 끝낸 소현은 앞에서 걸어가는 매니저를 불렀다.
“형석 오빠.”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요?”
항상 같이 붙어 다니다 보니 이제는 많이 편해진 도형석이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다음 스케줄까지 시간이 좀 남았죠?”
항상 손에 들고 다니는 다이어리를 펼쳐 보곤 대답했다.
“넉넉잡아서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요.”
그러자 소현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여기서 점심을 먹고 가요.”
“······?”
“여기 9층에 엄청 맛집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뜬금없는 발언이긴 해도 도형석은 그러려니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이 끝나 스케줄에 여유가 있는 데다 회사에서도 법인카드 한도액을 넉넉히 채워 줬기 때문에 어차피 식사를 할 거면 소현이 원하는 쪽으로 해도 크게 안 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알았어요. 현정이하고 영실 씨한테 연락해서 이리로 오라고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