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94
894
불을 켜지 않아 방 안이 어두웠으므로 벽에 붙어 있는 스위치를 더듬거리며 겨우 불을 켜고 선 김인철은 곧장 경제면을 찾아 기사를 발견하곤 억눌린 신음성을 흘렸다.
거기엔 태일그룹의 수장이 바뀌었다는 큰 머리글 아래로 새로운 회장으로 큰형인 김성균 사장이 선출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려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큰형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노려보던 김인철은 이내 전신을 경련하듯 부들부들 떨며 소름 끼치는 고함을 내질렀다.
“으아아아!”
그 뒤는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벽을 장식하고 있던 액자는 유리와 함께 산산 조각이 나서 쓰레기처럼 처박혔으며, 소파에 놓여 있던 쿠션은 천이 갈가리 찢겨 털이 사방에 흩날렸고, 의자는 몇 번이나 바닥에 내리친 탓에 다리가 망가져 못 쓰게 되었다.
손에 집히는 것은 모조리 던지고 부수면서 김인철이 미친놈처럼 날뛰는 동안 로페즈는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벽에 붙어 대기했다.
한국에 있던 그의 부하들이라면 그나마 말리는 시늉이라도 했을 텐데, 사내는 단순히 돈으로 고용된 경호원이니 의리도 충성도 없어 직접적으로 신변에 위협이 가는 일이 아니라면 굳이 움직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온 방 안을 엉망으로 만들면서 미치광이처럼 발광하던 김인철은 마침내 기력이 떨어졌는지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반쯤 남아 있던 헤네시 꼬냑 병을 잡아 꿀꺽꿀꺽 목 안으로 흘려 넘겼다.
다 삼키지 못해 셔츠 앞섶을 흠뻑 적셨지만 그래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듯 입에서 시큼한 단내가 풍겼고,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는 광기와도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런 김인철을 보며 로페즈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려 드릴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김인철은 대답 대신 짐승처럼 형형하게 타오르는 눈동자를 그에게로 향했다.
“인터폴에서 새로 보내온 지명수배자 명단에 사장님이 포함되어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게 사실이야?”
“직접 보시죠.”
안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낚아채듯 가져가서 펼쳐보자 정말로 지명수배자 전단에 자신의 사진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진 밑에는 460만 페소(PHP), 한화로 1억 원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고작 1억? 내 몸값이 이것밖에 안 된단 말이야?”
작게 콧방귀를 뀌면서 심드렁하게 말을 내뱉자 로페즈가 낯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이야기를 했다.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뭐?”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이 사내를 향했다.
“사장님한테는 별거 아닐지 몰라도 그 돈이면 필리핀에서는 팔자를 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거액입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짜증을 내는 김인철을 똑바로 쳐다보며 로페즈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100달러로 사제 권총을 하나 살 수 있고 1만 달러면 살인 청부도 가능한 곳입니다. 그런데 460만 페소, 9만 달러 가까이 되는 거액의 현상금이 붙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
그때서야 상황을 파악한 김인철은 얼굴을 굳히고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불법 총기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살인, 납치 같은 온갖 강력 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필리핀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월 평균 노동자 임금이 한화로 10~20만 원 정도에 불과했기에 1억이면 정말로 눈이 돌아갈 만한 거액이었다.
막말로 지금 앞에 서 있는 로페즈도 현상금에 욕심을 내 그에게 권총을 들이댈 수도 있었다.
“계속 집 안에 계셨지만 처음 오셨을 때 얼굴을 본 사람도 있고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 신고를 하거나 엉뚱한 생각을 할 수도 있으니, 험한 꼴을 보기 전에 은신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겁니다.”
“으음.”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는데 괜히 불필요하게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잠시 고심을 한 김인철은 이내 고개를 들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로페즈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 거 같아? 자넨 이곳 사람이니까 나보다 여기 사정을 더 잘 알 거 아니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로페즈가 대답했다.
“앙헬레스Angeles는 어떠십니까?”
김인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거긴 여기서도 알아주는 우범지대잖아.”
마닐라에서 북서쪽으로 약 83.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앙헬레스는 근처에 오랫동안 주둔하던 미군 기지의 영향을 받아 싼값에 유흥을 즐길 수 있다는 향락의 도시로 유명했다.
필리핀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큰 사창가를 중심으로 수많은 유흥업소들이 밀집해 있다 보니 하룻밤 유흥을 즐기기 위해 돌아다니는 돈 많은 관광객들을 노린 범죄가 수시로 벌어졌다.
가뜩이나 몸조심을 해야 되는 상황에서 강도는 물론이고 납치에 살인까지 온갖 강력 범죄로 필리핀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도시로 가자고 하니, 화가 나는 걸 넘어 상대가 혹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까지 들었다.
“시내 중심가는 위험하지만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클라크필드는 아주 안전합니다.”
“클라크필드라고?”
의아한 얼굴로 묻자 로페즈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예전에 미군 기지로 쓰이던 곳을 새롭게 정비해서 특별 경제 지구로 만들었지요. 외국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정부에서도 각별히 신경을 쓰는 지역이라, 치안 상태가 괜찮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만약을 대비해서 경호원을 몇 명 더 채용하는 좋겠지요.”
제대로 면도를 하지 않아서 수염이 아무렇게나 나 있는 턱을 한쪽 손으로 매만지며 괜찮을지 생각을 해 본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러다가 오히려 내가 수배범이라는 것이 발각되면 낭패 아니야?”
“그거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째서지?”
“그곳 경찰들도 뇌물을 좋아하는 건 마찬가지이니까요.”
“하긴 돈 싫어하는 놈은 없지.”
콧방귀를 뀐 김인철은 손에 들고 있던 현상수배 전단지를 찢어서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방에 들어갔다가 얼마 뒤에 나온 그는 가방을 하나 가져와 술병이 어질러져 있는 탁자에 올려놨다.
“8만 달러야. 이걸 가지고 가서 클라크필드인가 뭔가 하는 곳에 지낼 장소를 구하도록 해. 1만 달러는 보너스니까 챙겨 넣고.”
슬쩍 가방을 쳐다본 로페즈는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돈 가방을 챙겨서 나가는 로페즈의 뒷모습을 지그시 쳐다봤다.
보너스로 쥐여 준 돈은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는데, 눈치가 빠른 놈이니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알아차렸을 터였다.
예전 같았으면 저런 놈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겠지만 도망자 신세였기에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안전하게 있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쯧.”
짧게 혀를 찬 김인철은 먹다 남은 양주병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서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편 오랜 시간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김종원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뒤로 물러나고 김성균이 새롭게 오너 자리에 오르면서 태일그룹 일이 마무리되자, 혁권은 사우디아라비아 군에서 발주하는 공군 정밀유도폭탄 추가 구매 계약을 따내기 위해 직접 리야드로 출국하기로 했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어쩐지 누런빛을 띠고 있는 것 같은 하늘 색깔을 보더니 눈살을 찡그리면서 중얼거렸다.
“오늘도 미세먼지가 많은가 보군.”
안 그래도 뉴스에서 연신 마스크를 쓰라고 난리이긴 했다.
대기 흐름이 정체되는 바람에 벌써 일주일째 미세먼지 수치가 400을 넘기고 있으니 어지간하면 외출을 자제하라고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쉴 순 없었기에 일반인들한테 별로 득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
“밖에 오래 있으면 안 좋습니다.”
열어 놓은 차 문을 잡고 서 있던 하킴이 그리 말하자 혁권은 고개를 끄덕이며 뒷좌석에 올라탔다.
잠시 뒤 커다란 저택 문이 열리자 그가 탄 육중한 롤스로이스 컬리넌이 경호 차량에 둘러싸인 채 밖으로 나왔다.
부우우웅.
큰길로 나온 차량 행렬은 전용기가 기다리고 있는 김포 공항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하지만 방탄 처리까지 되어 10억이 훌쩍 넘는 최고급 SUV답게 혁권은 마치 호텔 스위트룸에 앉아 있는 것처럼 아주 편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미세먼지 때문에 목이 턱턱 막히는 바깥과 달리 차 안은 대용량 공기청정기가 가동돼 숨을 편하게 쉴 수 있었다.
황사가 온 것처럼 뿌연 서울 하늘을 차창 너머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지석영입니다, 사장님.
고문 변호사인 지석영의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바로하며 말했다.
“어쩐 일이오?”
-김인철 사건에 대해서 알려 드릴 일이 있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이야기해 보시오.”
-검찰에서 차민성을 비롯한 피의자들에 대한 조사를 끝내고 조만간 기소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혁권이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눈썹을 찌푸렸다.
“아직 김인철이 안 잡혔지 않소?”
-그렇기는 한데 외국으로 도피해서 행방이 묘연한 상황에서 언제까지 사건을 처리하지 않고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제때 출국금지를 내리지 않아 핵심 피의자가 도주하도록 놔둔 것에 대한 비난 여론이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고 말입니다.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지어서 비난을 덮으려는 거군.”
-그런 마음이 클 겁니다.
초임 검사도 하지 않을 실수에 온갖 비난과 조롱이 쏟아지고 있었게 검찰로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교도소에 처박아 놓고 오랫동안 푹 썩히려고 했던 김인철이 쏙 빠졌기에 그로서는 불만스러운 결정이었다.
“그러면 김인철은 어떻게 되는 거요?”
-신병이 확보될 때까지 일단은 기소 중지 상태를 유지할 겁니다.
기소 중지는 사건에 대해 공소조건이 구비되고 범죄의 객관적 혐의가 충분하더라도 피의자나 참고인의 소재 불명 등의 이유로 수사를 종결할 수 없는 경우에 검사가 그 사유가 없어질 때까지 수사를 중단시키는 거였다.
언제든지 체포가 되면 다시 처벌할 수 있었지만 수사가 진행 중일 때하고 달리 수배만 걸어 놓고 사실상 김인철을 찾는 건 손을 놔 버릴 가능성이 컸다.
그건 혁권이 원한 결과가 아니었다.
“기소를 조금 더 미루게 하는 방법이 없겠소?”
-검찰 수뇌부에서 내려온 지시라서 그건 어려울 겁니다.
잠깐 오천구 비서실장을 통해 청와대의 도움을 받아 볼까 생각했지만, 기소를 얼마간 미룬다고 해도 김인철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그냥 단념하기로 했다.
“후우. 상황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인터폴 적색수배가 내려졌으니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곧 잡히게 될 겁니다.
애써 하는 위로의 말도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다.
“더 할 말이 없으면 이만 끊겠소.”
-예. 계속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가 끝난 후 까맣게 변해 버린 스마트폰 액정에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은 혁권의 얼굴이 비쳤다.
얼마 뒤 김포공항에 도착한 혁권은 일행과 함께 간편하게 출국 수속을 끝내고는 VIP 전용 게이트를 이용해 전용기 전용 터미널로 향했다.
밖으로 나오자 늘씬하게 잘 빠진 흰색 제트 여객기 한 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까지 그가 임대를 해서 쓰던 것과 다른 기체였다.
예전에 캐나다 붐바디어Bombardier사에 주문을 했던 글로벌 6000 전용기로 며칠 전에 최종 완성돼 서울로 온 반짝반짝한 신형기였다.
혁권이 기체 가까이에 다다르자 기장과 부조종사 그리고 스튜어디스 두 명이 나란히 서서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탑승을 환영합니다.”
절도 있는 인사에 깍듯한 태도는 네 사람 다 숙련된 승무원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혁권 또한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계단을 올라 기체 내부로 들어서서 새것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푹신한 가죽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신형인 만큼 모든 것이 최신식에다 새로웠는데 특히 이 기체는 VIP를 쾌적하게 모시기 위해 뒷부분에 작은 파티 룸과 침실까지 겸비하고 있어, 일단 이륙한 뒤에 안전벨트를 풀고 나면 푹신한 소파자리로 옮겨 술과 간단한 식사까지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다.
일단 기체 내부는 나중에 살피기로 하고 앉아서 편하게 단추를 풀고 있으니 머리 위에 달린 스피커에서 기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곧 이륙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