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17
917
마이애미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처음으로 전용기를 타 보는 소현의 친구들은 신나서 기내 탐험을 하겠답시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더니 이제 좀 직성이 풀리는지 만족스런 얼굴로 각자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나 이 사진 얼굴이 너무 동그랗게 나오지 않았어?”
“몰라. 평소 그대론데.”
“좀 잘 봐 봐~! 관심을 가져 달라고!”
지수가 졸라 대는 소리에 소현과 도연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제일 얼굴이 사기적으로 나온 사진을 골라 주었다.
“이게 좋을 것 같아.”
“응. 꼭 포토샵한 것처럼 나왔어. 조명발을 잘 받았네.”
“니들 꼭 본판이 예쁘다는 소리는 절대 안 하지.”
그러자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깔깔 웃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타이밍 좋게 스튜어디스가 가져다준 음료수를 마시며 지수가 두 발을 쭉 뻗고 시트에 늘어졌다.
“휴우, 그나저나 이제 진짜 한국에 돌아가는구나.”
“가기 싫지?”
“당연하지! 또 매일 지겨운 일상에 치여 살아야 되잖아.”
즐거웠던 만큼 다시 치열한 취업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게 진절머리 나는지 지수가 으으, 하면서 몸서리를 쳤다.
“나도 그래. 이번만큼 편하게 지냈던 휴가는 없었던 것아.”
“혁권 오빠가 전부 다 최고급으로 준비해 줬으니까. 별장부터 시작해서 고급 요트, 비싼 레스토랑······ 거기다 거의 침대처럼 편안한 전용기까지.”
그 말엔 도연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1등석은 가끔 타 보긴 했는데 혁권 오빠가 타고 다니는 이 전용기가 훨씬 좋아.”
“아, 정말?”
“응. 거긴 다른 승객들도 있지만 이건 완전히 우리 전용이잖아. 게다가 뒤쪽에는 아예 누울 수 있는 침대도 있고.”
게다가 간단한 주류들이 갖춰져 있는 바와 샤워실까지 있으니, 쾌적한 걸 좋아하는 여자들에게는 최고의 환경이었다.
“혁권 오빠 최고! 사랑해요!”
갑자기 지수가 손을 번쩍 들고 외치는 소리에 대각선 쪽 반대편 자리에 앉아 있던 혁권이 피식 실소했다.
“기분 좋아요?”
어느새 친구들과 떨어져 혁권의 옆자리로 옮겨 온 소현이 샐쭉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여자한테 사랑한다는 소리 들으니까 아주 입이 찢어지는 것 같은데.”
“질투하는 거야?”
“아니거든요.”
혁권은 소현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한 후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손을 맞잡았다.
아직 서울까지는 10시간이 넘는 긴 여행이었으므로 이렇게 잠시 쉬고 있다가 나중에 식사 시간이 되면 알려 달라고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평화로움도 잠시, 백성균이 조용히 다가와 그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보스, 아테네에 있는 회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음.”
혁권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고 있는 소현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다고 말했다.
“알았어요. 나는 친구들이랑 놀고 있을게요.”
두 친구는 지치지도 않는지 이번엔 연예인 가십거리로 화제가 옮겨 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든 소현이 친구들과 얘기하면서 웃고 있는 것을 본 혁권은 자신도 몸을 일으켜 백성균과 함께 뒤쪽으로 향했다.
백성균이 커튼을 쳐서 시선을 가리고는 태블릿 PC를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태블릿 PC에는 군복을 비롯한 각종 군장부터 시작해 박격포와 RPG-7 그리고 전차까지 수많은 군수품과 무기 목록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잘 정리돼 나열되어 있었다.
혁권은 차분히 목록을 훑어보곤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꺼내 썼는데도 아직 갈라치 창고에 쌓여 있는 치장 물자가 많군.”
옆에 있던 하킴이 말을 받았다.
“루마니아군이 다른 곳에 있던 폐기 처분 무기들까지 전부 이쪽으로 옮겨다 놔서 그런 걸 겁니다.”
“그래?”
“미국에서 중고 F-16 전투기를 원조 받으면서 퇴역 처리된 미그 23 플로거Flogger 전투기까지 창고에 들어와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팔려고 내놓은 거야?”
“이미 고철로 서류에 올려놨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혁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중이 고기 맛을 보면 절간에 빈대가 남아나지 않는다고 하더니 딱 그 짝이군.”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한쪽 팔을 가볍게 내저은 혁권은 손에 든 태블릿 PC를 백성균한테 다시 돌려주면서 말했다.
“어찌 됐건 창고에 가져다 팔 수 있는 무기들이 충분히 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초반에 압도적인 화력으로 진격해 오는 자밀 의장의 예봉을 꺾어 놔야 되니까 전차를 비롯한 중화기와 탄약 위주로 화물을 준비해 놓으라고 해. 아부카 여단이 보유하고 있는 전차가 뭐지?”
“T-62 세대를 운용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똑같은 T-62로 가져다주면 되겠군. 그래야 바로 써먹을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러자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백성균이 태블릿 PC에 띄워진 목록을 확인하고 얼른 끼어들었다.
“T-62는 모두 62대가 있습니다.”
“전부 즉시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것들이겠지.”
“그런 걸로 되어 있습니다.”
“좋아. 그럼 한 10대를 빼내서 수송선에 선적하라고 해. 그 정도면 화력에서 밀릴 일은 없겠지.”
1965년도에 생산 배치된 구형 2세대 전차였지만 강력한 115mm 활강포는 철판을 덧댄 조잡한 장갑차량 정도는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었다.
“그쪽 상황이 급하다니까 자말한테 날 기다릴 필요 없이 가격 조율을 해서 거래를 완전히 끝내 놓으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부우우웅.
벽에 기댄 등으로 미세하게 떨리는 진동음이 느껴졌다.
한쪽 벽면에 설치된 철제 간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혁권은 사뭇 불편함에도 전혀 거리끼는 기색 없이 익숙한 자세였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자동 재생시켜 놓은 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빠른 박자에 드럼을 두드리는 강한 비트가 주변의 소음과 어우러져 기묘한 화음을 만들어 내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음악에 귀를 기울이던 혁권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느낌에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올려다보았다.
위아래가 하나로 된 원피스 승무원복을 입은 알란이 러시아 억양이 강하게 섞인 영어로 크게 말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둥근 방풍창 너머로 황토색 모래사막에 세워진 부두와 시가지가 내려다 보였다.
바로 미스라타였는데 부두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있는 거대한 원유 저장 시설들이 인상적이었다.
서울에 갔다가 바로 루마니아로 날아간 혁권은 갈라치에서 출항한 수송선을 타지 않고 이반이 조종하는 AN-26 수송기를 이용해 먼저 후세인 준장을 만나러 온 거였다.
수송기 화물칸 중앙에는 후세인 준장한테 줄 선물이 든 화물 컨테이너 두 개가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다.
시가지를 한 바퀴 크게 선회를 한 수송기는 이내 천천히 고도를 낮춰 도시 외곽에 있는 간이 활주로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후방 램프가 내려지고 짙은 색 선글라스를 쓴 혁권이 일행과 함께 수송기에서 내리자 뜻밖에도 후세인 준장이 마중을 나와 있다가 그를 반겼다.
“존슨, 어서 오시오!”
검게 탄 피부 때문에 더욱 하얗게 보이는 이를 드러내며 앞으로 다가온 후세인 준장은 양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고는 볼을 맞대면서 친근감을 표시했다.
“오랜만입니다.”
“얼굴을 보기가 너무 힘든 거 아니요?”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자주 찾아오도록 하지요.”
미소를 지은 후세인 준장은 수송기에서 내려지고 있는 화물 컨테이너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저것들은 다 뭐요? 군수품과 무기 들은 배편으로 오는 것이 아니었소?”
“준장님께 드릴 선물입니다.”
“선물이라고 했소?”
눈을 크게 뜨며 관심을 보이자 그가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좋아하시는 쿠바산 시가와 스코틀랜드산 스카치위스키 몇 박스하고 이런저런 물품들을 좀 챙겨 왔습니다.”
“하하, 하나같이 내 마음에 쏙 드는 것들뿐이로군. 이거, 고맙게 받겠소.”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후세인 준장은 혁권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함께 뒤쪽에 세워져 있는 군용 험비 차량에 올라탔다.
“자, 이제 같이 사령부로 갑시다.”
“그러시죠.”
험비가 움직이자 호위 병력을 태운 도요다 픽업트럭 네 대가 앞뒤로 따라붙었다.
오랜 내전에 보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도로 사정이 엉망이라 차가 덜컹거리면서 달려가는 가운데 후세인 준장이 옆에 나란히 앉은 혁권을 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자밀 의장 때문에 신경이 계속 쓰였는데 정말 잘 왔소.”
힐끗 후세인 준장의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겁니까?”
“어제 은밀하게 진행 중이던 양측의 평화 협상이 완전히 결렬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결국 그렇게 됐군요.”
“과격 이슬람 세력이 장악한 의회의 해산을 요구했다는데, 이쪽 편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지 않겠소.”
“하긴 그건 애써 잡은 권력을 전부 내놓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바로 그거요. 그걸 보면 자밀 의장은 처음부터 협상 따위는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오.”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혁권이 말했다.
“과격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다는 명분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진짜 원하는 건 리비아를 통치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아 생산해 낸 원유를 제한 없이 수출하는 걸 테니까요.”
“맞소.”
현재도 자밀 의장은 중남부 유전 지대를 차지해 하루에 100만 배럴이 넘는 원유를 생산해 내고 있었다.
하지만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은 정부가 아니라 군벌 세력에 불과한 상태이다 보니 원유를 수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러시아를 비롯한 일부 국가에 원유를 수출할 때도 국제 시세에 훨씬 못 미치는 헐값에 처분해야 됐다.
이런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서는 트리폴리 통합 정부를 없애 버리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었다.
“트리폴리 통합 정부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혁권의 물음에 후세인 준장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연일 자밀 의장의 행동을 비난하며 결사 항전을 외치고 있지만, 입만 나불대고 있을 뿐 정작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최전선에는 아무런 지원도 해 주지 않고 있소.”
“듣기로는 급히 이슬람 민병대까지 모집하고 있다던데, 병력이 모이면 지원군을 보내겠지요.”
후세인 준장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그럴 생각이 있다면 벌써 병력이나 물자를 작게라도 어떻게든 지원해 줬을 거요. 안 그렇소?”
“······.”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그는 표정을 굳힌 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밀 의장이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지가 있다면 이미 뭔가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십중팔구 자신들과 다른 세속주의자인 후세인 준장을 희생양으로 삼아 먼저 부딪치게 만들어서 자밀 의장이 이끄는 혁명단의 전력을 줄이는 의도인 것이 분명했다.
사실 딱히 특별할 것도 아니었는데 샤라빌 대통령한테 벌써 한번 겪었던 일이었다.
눈을 사납게 번들거리면서 후세인 준장이 씹어뱉듯 말했다.
“피 터지게 싸우다가 내가 뒈지길 바라는 모양인데, 절대 그렇게는 되지 않을 거요.”
“언제나 그래 왔듯이 이번에도 잘 이겨 내실 겁니다.”
“그리 말해 줘서 고맙소.”
오랫동안 든든한 친구가 되어 준 혁권을 바라보는 후세인 준장의 시선에 신뢰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