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23
923
이야기를 들은 혁권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안 그래도 매각 이야기가 없어서 궁금했었는데 잘됐군.”
-합의는 진즉에 이루어졌는데 인수하는 중국 측 업체에서 자금 조달에 차질이 생기면서 조금 지체됐다고 합니다.
“그럼 이제 계약이 완전히 마무리된 거요?”
-예. 일주일 안에 매각 대금을 전부 완납하기로 했다고 하니까 그 뒤로 태일그룹과 합의한 지분 거래를 진행하면 될 겁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태일그룹에 넣어 둔 자금을 상당 부분 회수할 수 있게 된 것에 그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문제가 없도록 처리해 주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해 온 L&S코퍼레이션과 스텐저였기에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고 이번에도 잘해 줄 거라 믿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몸을 뒤로 기대면서 말했다.
“참, 그리고 태일산업 지분 매각 대금 절반은 용산드림타워 건설 비용으로 쓸 생각이니까 굳이 비용이 나가고 번거롭게 해외 계좌로 가져올 필요 없이 그냥 국내에 놔두도록 하시오.”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혁권은 홀가분한 얼굴로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고는 옆에 서 있던 하킴한테 위성 전화기를 돌려줬다.
아테네 시내 힐튼 호텔.
혁권이 다른 곳으로 떠나기 전까지 다른 할 일이 없었기에 전용기 승무원들은 벌써 보름 가까이 이곳에서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승무원들을 배려한 혁권이 호텔의 객실도 꽤 괜찮은 등급으로 해 주었으므로 이들은 아무런 불편함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그중 여자 승무원은 단둘밖에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같은 방에 배정되었다.
“어디 나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로시가 이불을 둘둘 만 채로 고개만 빼꼼 내밀어 물었다.
“잠깐 산책 좀 하려고.”
거울 앞에 파운데이션이며 립스틱을 늘어놓고 화장을 하던 이벨라가 미안하다는 눈짓을 하며 대답했다.
그냥 산책하러 나가는 것 치고는 꽤 본격적으로 꾸미는 모양새였지만, 아직 잠기운이 덜 가셨기에 생각하기가 귀찮았던 로시는 ‘그래.’ 하면서 별 의심 없이 다시 침대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갔다.
화려한 외모만큼이나 놀기도 좋아하는 이벨라는, 일할 때를 제외하곤 선크림만 바르고 다니는 로시와 달리 간단한 외출에도 겉모습에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게다가 호텔에서 대기하는 동안에도 밤마다 클럽에 가서 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어제 괜찮은 남자를 하나 물었나 보다 하고 가볍게 넘겨 버렸다.
다시 잠든 듯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오자 거울 너머로 침대 쪽을 몰래 훔쳐보고 있던 이벨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붉은 립스틱을 입술에 펴 발랐다.
고데기로 말아 풍성하게 연출한 금발이 가슴께까지 흘러내렸고, 속눈썹은 마스카라를 잔뜩 발라 위로 아찔하게 치켜 올렸다.
이벨라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점검한 후 마지막으로 에르메스에서 산 오렌지색 트윌리를 목에 감고선 가방을 들고 호텔을 나섰다.
트램을 타고 호텔에서 몇 블록 떨어진 작은 광장에 내린 이벨라는 노천카페 테이블에 앉아 차가운 라떼를 주문하곤 오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내리던 비가 그치고 모처럼 날씨가 좋은 덕분에 광장에는 평소보다 햇볕을 쬐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분수 앞에서 사진을 찍는 부부로 보이는 관광객, 혼자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대학생, 개를 산책시키는 근처 주민들.
한낮의 여유를 즐기듯 평화로운 광경이었으나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이벨라의 눈초리에 조금씩 초조함이 생겨났다.
딱 한 모금만 마신 뒤 손도 안 대고 내버려 둔 라떼 잔 아래에 동그란 물 얼룩이 생겨날 때쯤, 가까이 다가오는 인기척에 이벨라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벨라 씨?”
확인하듯 묻는 물음에 이벨라가 반사적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남자는 이벨라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짙은 금발 머리였고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느낌상 제법 잘생겼을 것 같았다.
그는 주문을 받으러 온 카페 종업원에게 에스프레소를 부탁한 후 이벨라에게 묻지도 않고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인가요?”
주변 시선을 의식하면서 불안한 듯 묻는 이벨라에게 남자가 안심하라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 실제로 뵈니 더욱 아름다우시군요, 미스 이벨라.”
남자에게서 노골적인 칭찬을 들은 이벨라는 수줍은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살짝 꼬았다.
불안해하던 것도 잊고 무의식적으로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교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속으로 어리석은 여자라며 비웃었다.
‘골빈 년 같으니.’
남자든 여자든 이성 앞에서 저렇게 풀어지는 부류가 있기 마련이었다.
아마 남자가 양복을 입고 꽤 근사하게 보이지 않았어도 상대가 노숙자가 아닌 이상 이벨라는 똑같이 행동했을 게 분명했다.
남자에게 있어선 가장 이용하기 쉬운 타입이었으며, 실제로 이벨라는 그의 정체를 정확히 모르면서도 경계하기는커녕 은근히 유혹적인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뒤로 몸을 살짝 기댄 남자는 여유로운 얼굴을 입을 열었다.
“어떻게, 결심은 굳히셨습니까?”
그러자 이벨라가 표정을 굳히고는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지난번에 말한 대로 돈을 주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선금으로 이 자리에서 절반 나머지는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주도록 하지요.”
그러면서 일부러 보라는 듯이 옆에 놔둔 두툼한 종이봉투를 집어서 테이블에 올려놨다.
살짝 벌어진 종이봉투 사이로 보이는 100유로 지폐 뭉치를 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탐욕으로 가득 찼다.
상대가 약속한 돈이면 명품을 사 모은다고 밀린 카드와 은행 대출을 전부 갚고 남태평양 휴양지에서 몇 년은 편히 놀고먹을 수 있을 터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벨라는 이내 결정을 내린 듯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 시키는 대로 할게요.”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남자는 씨익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잘 생각했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이벨라의 물음에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동그란 파우더 케이스를 꺼내 그녀 앞에 내려놨다.
“안에 들어 있는 액체를 음료에 넣어서 존슨한테 먹이면 됩니다. 아주 쉽죠.”
“······.”
파우더 케이스를 열자 안에 손톱만한 크기의 캡슐이 하나 들어 있었다.
“이게 뭐죠?”
그러자 남자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벨라를 노려보았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됩니다. 괜한 호기심을 가져 봤자 결코 좋을 게 없어요.”
어딘지 경고처럼 느껴지는 말투에 이벨라는 목을 움츠리곤 핸드백 안에 파우더 케이스와 돈이 든 종이봉투를 밀어 넣었다.
그걸 본 남자는 달래듯이 살짝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검을 한다고 해도 약 성분이 검출되지 않고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처럼 보일 테니,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들킬 염려는 없을 겁니다.”
“아······.”
낮게 탄성을 흘린 이벨라는 이내 자신이 약을 먹인 걸 들키지 않을 거라는 것에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의심을 살 수 있으니까 일이 다 끝나면 우리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그녀가 머리를 끄덕이자 남자는 지갑을 꺼내 지폐 몇 장을 테이블에 올려 두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오후 늦은 시간, 전병주 차장 검사가 퇴근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이용직 수사관이 조용히 그를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
“지난번 지시하신 일하고 관련돼서 보고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 일단 그리로 앉지.”
“예.”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상 앞에서 몸을 일으킨 전병주 차장 검사는 소파 가운데 자리로 가서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았다.
“보고할 일이라는 것이 뭔가?”
“뉴스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에 태일그룹이 중국 건설 기자재 사업을 매각하지 않았습니까.”
“들어는 본 것 같군.”
“이번 매각으로 13억 달러가 넘는 자금이 태일그룹으로 들어왔는데 오늘 주식 시장 마감과 동시에 공시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공시라고?”
“그렇습니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전병주 차장 검사는 소파 등받이에서 몸을 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태일그룹에서 자사주를 대량으로 매입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가뜩이나 재무 상황이 어려운데 자사주를 사들인다고?”
“네.”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지 전병주 차장 검사가 의아한 얼굴로 머리를 갸웃거렸다.
“혹시 주가를 부양하기 위해서 자사주 매입을 하는 시늉만 내는 거 아니야?”
“매입 규모가 8천억이 넘는다고 하는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8천억이라고? 아니, 태일그룹에 그만한 여유 자금이 어디에 있어서 주식을 사들인다는 거지?”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살짝 미간 사이에 주름살을 만들고는 이용직 수사관을 봤다.
“설마 처음 이야기한 중국 건설 기자재 사업 매각 대금을 여기에 쏟아붓는 거야?”
시선을 받은 이용직 수사관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게 아니면 지금 태일그룹 상황에서 그런 거액이 나올 데가 없지 않겠습니까.”
“허어. 미쳤군.”
대번에 전병주 차장 검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기껏 어려운 재무 상황을 개선시킬 거액의 자금이 들어왔는데, 그걸 엉뚱한 곳에 쓴다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주가 안정화와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한 자사주 매입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경영권 방어를 하려는 목적인 걸로 파악됩니다.”
“그렇겠지. 그 집안 형제들이 얼마나 욕심이 많은데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설사 발표한 의도가 맞다고 해도 제대로 된 경영자라면 쓸데없이 자사주를 매입하는 것이 아니라 부채를 줄이고 그룹을 정상화시키는 데 자금을 투자할 터였다.
그 난리를 겪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모습에 한심하다는 듯이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데 이게 내가 시킨 일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거래소를 통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태일그룹이 자사주 매수를 장내에서 실시하지 않고 대부분을 특정 상대하고 한 번에 블록 딜Block Deal을 하는 걸로 끝냈다고 합니다.”
블록 딜은 시장을 통하지 않고 대량의 주식을 보유한 대상과 매수자가 일대일로 거래를 하는 걸 뜻했다.
“흐음. 일반적인 행동은 아니군.”
“블록 딜로 지분을 매각한 상대가 어딘지 알면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지 아실 겁니다.”
“혹시······!”
“바로 오로라 펀드입니다.”
전병주 차장 검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그렇습니다. 그것도 거래 액수만 무려 8천억 원이 넘는 빅딜이었다고 합니다.”
“허어. 그럼 중국에서 들어온 자금이 대부분 오로라 펀드에 넘어갔다는 거야?”
“예.”
“도대체 어디 지분을 매입했기에 그런 거액을 쓴 거지?”
“태일산업입니다.”
“그렇군. 이제 어떻게 된 건지 알겠어.”
대답을 듣자마자 태일그룹의 의도를 파악한 전병주 차장검사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한꺼번에 8천억이라는 거액이 움직인 만큼 자금 이동 경로를 추적한다면 오로라 펀드의 실소유주가 어디인지 파악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전병주 차장 검사가 무릎을 치면서 눈을 반짝였다.
“그래. 그러면 되겠군.”
김인철이 맡긴 일을 해결할 방법이 생긴 것에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