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53
53화.
외전
I. 청혼
빗방울이 작은 별처럼 부서지는 밤이다. 카페에 커다란 창은 부서지는 별들 사이로 내 모습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어깨 길이 숱이 많은 머리칼을 하나로 꼭 묶은 까닭에 고스란히 드러난 뺨은 평소보다 야위어 보이지만 날렵한 턱선과는 거리가 있다. 에이치라인 스커트는 퓨어 블랙, 탑은 여린 풀빛이다.
풀빛, 솜털을 뒤집어쓴 새순이나 터지는 꽃망울을 시샘하던 추위를 단번에 걷고 봄의 여신이 대지를 장악하는 순간의 빛깔이다. 여리지만 강한, 그리고 압도적인 빛. 쇼윈도에서 그 탑을 우연히 마주쳤을 때, 나는 눈을 서너 번 빠르게 깜박였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눈알까지 뻑뻑해졌기 때문이다.
지난달이었다. 귀국하고 두 주째, 나는 대학 동기 P와의 점심 약속을 위해 G백화점 아케이드를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페디큐어를 받지 않아 창백한 발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뮬이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툭툭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미안해요, 누군가 ‘익스큐즈 미’를 그대로 옮긴 듯한 사과를 하면서 나를 스쳐 지나갔다. 매장을 나서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부딪힐 뻔했던 것이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이미 늦은 죄송합니다, 하는 인사를 벙긋거리는 순간 풀빛 탑을 발견했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매장에 들어서서 계산을 치렀다.
내 몸에는 도무지 붙지 않는 스커트 정장은 그녀의 차림새였고 풀빛은 그녀의 빛깔이었다. 날렵한 턱선과 절도 있게 떨어지는 몸매와 대지를 압도하는 봄의 빛깔을 가진 여자였다. 윤서진은. 몸에 맞지 않는 그녀의 옷을 입고 그녀의 빛깔을 덧칠하고 결코 그녀처럼 될 수 없는 턱선을 드러낸 여자 앞에 ‘그’가 앉았다.
“안녕, 잘 지냈어 ”
나는 사선으로 떨어지는 별들을- 혹은 빗방울을 보면서 답했다.
“네.”
“할 말이 있어서 보자고 했어.”
‘네.’라고 답했지만, 그는 나를 불러낸 그 ‘할 말’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앉아서 주문한 녹차를 반이나 마셨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비가 오는구나.”
“네.”
그를 만나서 단음절의 답만 세 번 하는 셈이었다. 그는 넥타이 매듭을 조금 느슨하게 늦추었다. 답답한 듯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티팟을 들어 그의 잔에 차를 조금 더 채웠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었다. 침묵이 목을 죄는 기분이다. 이번에는 내가 긴 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남아 있던 공기가 입속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순간, 심장이 등을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할, ‘할 말’이 무엇인지를.
말을 하기 전 그는 더할 수 없이 진지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짙어진 상념을 가릴 수 있을 만큼, 혹은 가렸다 인정해 주고 싶을 만큼 대단한 진지함이었다.
“결혼할까 싶어.”
나는 그 말만큼은 단음절의 답을 하지 않았다. 내 눈을 보면서 그가 결연한 어투로 덧붙였다.
“너였으면 해.”
‘왜요 ’라든가, ‘그래서요 ’ 같은 답 대신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무례하지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생…….”
그는 ‘생각했어.’라는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내가 그의 얼굴을 끌어안아 버렸기 때문이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코와 입이 내 배에 파묻힌 채였다. 뒤통수를 누르고 있던 팔을 풀자 켁켁 잔기침을 했다.
“죄, 죄송해요.”
그날 밤, 별이 부서지던 밤에 그에게 죄송할 일은 두 가지였다. 그의 숨을 느닷없이 막은 점, 그리고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 점―그의 기대와 다르게 말이다―.
돌이켜 보면 한 가지였다. 방정스레 끌어안은 점.
당연히 거절할 거라 생각했어. 그가 말을 마무리 지었다면, 그리고 언제나처럼 단호한 선 뒤에 물러서서 다정한 사촌 오라비와 같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면, 나는 그의 무례한 청혼을 조용히 거절했을지도 몰랐다. ‘죄송해요.’라고.
II. 조카
혼인을 하게 된다면 얻어질 새로운 가족과 친지와 인사를 하는 일은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피부가 미어질 정도의 긴장감이다.
파리하다 싶도록 얼굴이 흰 그의 어머니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었는데 꼭 그려 놓은 듯 우아하게 입술 선이 올라간다. 어쩌면 그분도 미소 뒤에 피부가 미어지는 불편함을 더러운 빨랫감을 숨기듯 개켜 두었을지도 모른다. 정 씨 집안에 들어오는 이방인을 바라보는 느낌은 어떨까. 사십 년 전에는 본인이 앉았을 저 자리에 새로운 이방인을 채워 넣음으로써 획득하는 완벽한 집주인의 느낌이 자못 궁금해졌다. 오늘도 주인의 우아한 미소를 보겠거니 했다.
‘좀 더 편안하게 입고 나오렴. 똑 떨어지는 정장을 차릴 자리는 아니지 않니, 우리끼리 밥 먹는데. 기훈이 만날 때도 그렇게 하고.’
저번 식사 자리에서 하던 말씀이다. 그의 어머니의 말투는 기와의 곡선을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기와 빛 풍성한 스커트에 러플이 잔뜩 달린 하얀 블라우스를 입었다. 수녀와 소녀의 조합 같다. 수녀 같은 소녀에 매혹되지 않는 남자가 있을까, 하는 발칙한 생각을 잠시 해 본다. 나를 보면서 단 한 번도 뺨이 붉어지지 않는 남자, 단 한 번도 시선을 어색하게 갈무리 짓지 않는 남자. 36.5도, 체온과 꼭 같은 온기를 담은 눈동자와 예의 바른 몸가짐만이 내 몫이다.
“어디로 가나요 ”
핸들을 잡은 그의 손과 강남대로를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프렌치라고 말 안 했던가 ”
“S호텔이라고 생각했어요.”
S호텔과는 거의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 아니야. 거기보다 더 맛있는 곳.”
그의 아버지 계열사 중 하나인 호텔을 가볍게 무시하면서 고른 레스토랑은 아주 작았다. 테이블도 작고, 의자도 작고 통로는 좁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맛있어. 믿어 봐.”
당황스런 기분으로 레스토랑을 훑어보자 그가 어깨를 툭 두드리면서 웃었다.
레스토랑에서 단 두 개밖에 없는 4인석 중 하나가 우리의 예약석이었다. 빨간 소파는 등이 벽으로 고정되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갈색이 도는 붉은 벽돌로 마감된 구석 자리로 엉거주춤 들어가 내가 안쪽으로 앉고, 그가 내 옆으로 앉았다. 팔이 닿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꼭 붙어 앉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레스토랑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달팽이를 비린내가 나도록 조리하고 스테이크를 뻣뻣하게 태워서 내어 온다고 해도 나는 다음에도 이 식당을 고집하리라 맘먹었다.
네 개의 코스 요리만 준비된 메뉴를 다 보기 전에 그가 조용히 말했다.
“오는구나.”
꼭 읊조리는 듯해서 누굴 향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누가, 어머님이 아가씨가 물을 틈도 없이 한 남자가 우리 테이블 앞으로 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웃음기가 전혀 없는 인사였다. 귀가 완전히 보일 정도로 짧은 머리칼 덕분에 놀랍도록 잘생긴 얼굴이 가려지는 부분 없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만들어 붙인 듯 정확하여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이목구비를 빤히 쳐다보는 동안 남자가 반듯하게 앉아서는 그와 나 사이 벽면만 응시했다. 그가 여어, 과장된 감탄사를 질렀다. 맞은편 남자의 시선에서 완전하게 비켜진 나는 괜스레 목이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머리 잘랐니 ”
“더워서요. 너무 짧게 잘라졌어요.”
“좋은데 뭘.”
“애처럼 보여서요.”
“애잖아, 나더러 늘 애 취급한다고 불만하는 못된 애.”
순간 정돈된 이목구비가 묘하게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여자보다 예쁜 입술을 아무렇게나 벌리고 고개를 조금 기울이면서 후후, 남자가 웃었다. 남자를 둘러싸고 있던 기운이 일시에 깨어졌다. 대부분 눈부신 외모라 찬양하겠지만, 나에게 비친 그는 보는 이까지 불안하게 만드는 우울감과 음산함을 케이프처럼 두르고 있는 서부 활극의 주인공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은 마치 허물을 벗는 노랑나비처럼 완벽했다. 정말 애 같은데 슬며시 따라 웃는데 남자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숙모님 ”
“응.”
어안이 벙벙한 나를 위해 그가 대신 답했다. 그리고 내게는 짤막한 소개가 전부였다.
“내 조카. 한혁이.”
III. 소나기가 내리던 밤
더 이상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 최한혁, 바람직하지 못한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그의 큰고모의 손자, 그의 사촌 형이 이십 대 초반에 얻은 혼외자. 그리고 내게는 고마운 사람인가
와인 세 병을 곁들인, 혹은 와인에 곁들어진 식사를 마친 후에, 최한혁이 필요 이상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숙모님, 축하드립니다. 행복하세요.”
나는 어색하게 머리를 까닥이면서 꼭 소나기라도 내릴 듯이 후텁지근한 바람이다, 애써 다른 생각을 했다. 이 미끈거리는 시간이 빨리 마감되기만을 기다렸다. 집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서 까마득한 수면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싶었다.
그가 자신보다 반 뼘이나 키가 큰 조카를 껴안았다.
“혀엉.”
아이처럼 오래 안겨서는 뭐라고 내게는 들리지 않는 말을 속삭인다. 그의 뺨이 발그스름해졌다. 맹렬한 감정이 활활 속을 모조리 태워 버릴 기세로 솟았다. 어울리지 않는 비장감을 케이프처럼 두른, 노랑나비 같은 남자를 향한 것인지, 내 남자를 간단하게 버리고 그 남자를 선택한 풀빛 여인에 대한 것인지 분간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기뻐할 처지인지 비통해해야 하는지조차 분간되지 않았으니까.
한 병 반을 마신 그 대신 핸들을 잡았다. 옆자리에 기댄 그가 숨을 쉴 때마다 달착지근한 와인 냄새가 났다.
“안 해도 돼.”
처음 들어 보는 거친 목소리다.
“네 ”
“결혼 말이야.”
나는 급브레이크를 잡아 강남 대로에 차를 멈추고는 ‘뭐예요! 더러운 관계에 나를 끌어들이고는 고작 하는 말이 결혼 안 해도 된다라니요!’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는 급브레이크에 잡혀 목구멍에 걸려 버린 상상일 뿐이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서 핸들을 잡은 손을 떨며 안전 속도를 지키고 신호를 준수하는 모범 운전을 계속하였다.
“두 사람, 결혼시켜 주고 싶어. 내가 먼저 해야 깔끔하거든. 나는 누군가와 다시 선을 볼 수도 있어. 여자는 충분히 많으니까.”
충분히……. 꼼꼼한 경제학 교수님 같은, 실제로 전직 경제학 교수님이었던 그가, 팔을 움직이는 범위까지 정해 놓은 듯 예의 바르고 다정하기 짝이 없는 사촌 오빠 같았던 그가 심장을 후벼 내는 잔인한 소리를 할 수 있구나 놀라워서, 그 순간에도 차분하게 운전을 하는 내가 놀라워서 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단지, 그 누군가에게 이 설명을 해야 하는 과정이 귀찮아.”
“숨기면 되죠.”
“아니.”
그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왜죠 ”
“평생, 부부로 살아갈 거니까. 아무것도, 더군다나 그렇게 중요한 점을 숨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어차피 그런 성실함에 반했었다. 1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도 알고 나도 아는 ‘자연스러운’ 교제라는 부모님들의 소망에 충실히 따르는 척, 결코 쳐다봐 주지 않는 그의 곁에 강아지처럼 발밑을 뱅뱅 돌면서, 한 치도 달라지지 않는 고집스런 성실함을 사랑하게 되었다.
평생, 그가 접두어처럼 붙인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얄궂게도 가슴이 벅차다. 그의 성실함을 평생토록 누릴 수 있는 반려가 될 수 있다니.
“나는, 충분히 많은 여자들을 물리치고 1순위로 꼽혔네요.”
빈정거리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가 키득키득 웃는다.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의성어지만, 지금은 그렇다.
“세상에 아버지 어머니가 결혼해도 좋다는 여자가 이토록 많았던 건지, 지난 5년간 엄청나게 놀라워하던 중이었거든.”
“나한테 처음 온 건가요 ”
구차하게 확인한다.
“응.”
성실한 대답.
“나랑 한 약속 때문에 ”
맨해튼 5번가, 서늘할 정도로 정돈된 분위기의 쇼핑 몰에서 그 남자는 풀빛 여자를 향해 다섯 살배기 아이처럼 소리치면서 달려갔다. 힐끔거리는 시선들은 멀어진 그를 쫓는 대신 내게로 따갑게 꽂혔다. 그 일주일 전, 약속을 했었다. 그녀와 결혼할 수 없게 되면, 내게로 와 주겠다고. 그건, 내가 아니라 누구든 가능한 약속이었다. 그에겐 그럴 가능성이란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마도.”
목이 멘다. 푸른색 신호등 불빛이 번져서 눈을 깜박였다.
“이렇게 오만한 까닭은, 뭐죠 ”
오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멍청한 질문을 한 까닭은, 그가 한국 최고 그룹의 총명한 아들이라는 변할 수 없는 사실은 그를 만나기 전까지만 중요한 부분이었으니까. 캠퍼스에서 그는 대부분의 젊은 교수들처럼 유연하고 소탈했고 그리고 부드럽고 자상하기만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는 오늘 내가 본 중에서 가장 비싼 수트 차림이다. 손목의 시계는 미국에서 차던 것의 100배는 넘는 가격이 분명할 브랜드다.
“너를 믿나 보지.”
자상한 손가락이 눈가를 스친다.
“나는, 결혼할 거예요.”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이런 나랑 ”
“네.”
그런 당신과.
그가 눈두덩을 손으로 슬며시 눌렀다.
“결국 울렸어. 내내 조마조마했는데, 울릴까 봐 조심했었는데.”
투투둑, 가슴이 떨어져 나간다.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누르면서 물었다.
“그 결혼을 꼭 시켜 주고 싶은 이유는 누구 때문이죠 누굴 그렇게나 좋아하는 거예요 ”
역시 바보구나, 하는 표정으로 그가 하아, 숨을 쉰다.
“당연하지 않아 귀여운 내 조카지. 그 녀석이 죽는 꼴은 못 봐.”
그가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내렸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습기를 잔뜩 먹은 무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양 창문을 여는 것으로 성에 차지 않는지 위로 뚫린 선루프까지 활짝 열어 두었다. 나는 습기 덕분에 푹 주저앉아 볼썽사납게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바로잡았다.
“……나, 괜찮기는 해요 ”
“무슨 소린데 ”
“1순위였다고 하니까 문득.”
“정작 묻고 싶은 건.”
그가 턱을 쥐고는 고개를 자신을 향하도록 만들었다.
“너를 좋아하냐는 말이야 ”
시선을 피하고 싶은데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남아 끈적거리는 뺨에 헝클어진 머리칼이 들러붙는다.
“꼭 그렇지는 않아도, 적어도 말이에요. 나를…….”
“너를 ”
턱이 잡힌 채로 침을 삼켰다. 창피해서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가 눈썹을 치켜 올린다. 제대로 답을 못하는 학생을 압박하는 눈초리다. 효과가 탁월하여 무슨 답이든 쥐어짜게 만드는.
“그러니까, 나를.”
투툭, 앞창으로 굵은 물방울이 부딪힌다 싶은 순간 쏴아, 순식간에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물론, 차 속으로도 위쪽으로 뚫린 창으로 사정없이 빗줄기가 꽂혔다.
저런, 그가 급히 창을 닫았지만, 나는 누군가가 턱을 잡아당긴 까닭에 정확하게 창 중앙 아래에 머리를 두고 있었던지라 이미 흠뻑 젖어 버렸다. 실은, 그가 턱을 쥔 손을 놓고 창을 닫느라 분주한 동안에도 멍청하게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앞 창문 두 개까지 다 닫고 나서 푹 젖은 꼴을 한 나를 보면서 그가 웃었다. 물론, 그도 젖었지만 짧은 머리 수트 차림과 컬을 말았던 머리에 얇은 블라우스는 젖는 차원이 다르다. 그가 양복윗도리를 벗어 걸쳐 준다. 그럴 정도는 아닌데. 젖은 머리칼을 손으로 넘겨주고. 미안, 소나기 덕분에 술은 깨는걸. 싱겁게 말했다.
빗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세차다. 창에 부딪히며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을 보고 있자니 들끓는 감정 때문에 미칠 듯 괴롭던 마음이 식어 간다.
“그러니까, 너를. 다음은 뭐지 ”
술이 깬 그는 사촌 오빠같이 다정한 음성이다. 차분한 얼굴이겠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놀랍게도 그의 볼이 발그스름하다.
“저…….”
내 뺨을 감싸는 손이 난로처럼 뜨겁다.
“키스해 봤던가, 우리 ”
“……아니요.”
답하는 내가 너무 어이없었지만, 그가 물으면 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이든.
눈을 감자, 더운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진다. 사이좋은 어린 오누이 같은 입맞춤이다.
“역시, 아닌 거죠 ”
나는 스스로가 놀랄 만큼 맹랑한 구석을 그에게만 보이곤 한다. 선을 본 후, 열흘 뒤 경제학과 건물 그의 사무실에 불쑥 찾아가서 밥 사 주세요, 했던 날처럼 그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관찰하듯이 살핀다. 그날부터 1년이다. 갑자기 내 자신이 불쌍해서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이 되어 버렸다. 도깨비방망이처럼 잔뜩 가시가 돋친 덩어리가 울컥 목을 뚫고 나왔다.
“나를, 도저히 여자로 느끼지 못하는 거죠 내가 지금 저 빗속에서 속옷 바람으로 춤을 춘다 해도!”
내 검지가 가리키는 비가 쏟아지는 도로변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데 빗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여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럴 리가 있나.”
“관두세요. 거짓말.”
“거짓 위로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
“거짓말. 됐어요. 이 결혼 그만둬요.”
“키스에 대한 투정치고는 강도가 높군. 결혼을 무르자니.”
반 시간 전만 해도 이 결혼을 관둬도 좋다던 사람으로선 지나치게 뻔뻔한 답이었다. 차 문 레버를 잡아당기는데, 그가 손을 붙잡았다.
“충분히 그래.”
눈물이 주룩 흐른다. 그가 내 손을 잡은 채로 눈물을 닦는다.
“너와 당장 이 빗속에서 뒹굴 수도 있을 만큼.”
손등에 경건하게 입을 맞추면서 하기엔, 온몸이 붉어질 정도로 음란하고 방탕한 고백이었다.
거짓이라도 상관없었다.
남편은 이번 여름, 그리고 돌아오는 가을, 두 계절 동안 연애를 하자했다. 그래도 내가 좋다면 다시 청혼을 하겠다고. 거짓말처럼 소나기가 그치고 도심 하늘에 거짓말처럼 별이 빛났다. 결코 거짓말은 아닌.
IV. 핫핑크
두 번째의 청혼은 꿈처럼 달콤하고, 유원지처럼 유쾌했다.
‘윌 유 메리 미 ’
물었을 때 나는 까르르 웃었다. 양팔을 벌려 그의 목을 두르면서.
‘슈어, 아이 윌.’
……하고 답했다. 내 손가락에는 샛별보다 더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져 있고 홀 안은 온통 수소 풍선으로 가득했다. 건물 전체가 둥실 떠서 날아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색깔은 단 두 가지. 당연히, 내가 좋아하는 핑크와 핫핑크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첫 번째의 청혼이 진정한 청혼이었다고 생각한다. 진정은 절박과 닿아 있으니까. 남편은 업무가 많고 꼭 만나야 할 사람, 만나 줘야 할 사람은 훨씬 더 많다. 늦는다는 메시지를 받았지만 오늘처럼, 그가 새벽까지 집으로 들어오지 않을 때면 가끔 절박한 심정이 되곤 한다. 그 칙칙한 절박감이 핫핑크 빛 사랑과 가장 가까운 색이라고 나는 믿는다.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거실로 나간다. 손에 쥔 핸드폰에서 메시지 수신음이 울린다.
[10분 후 도착.]어느 날은 기다리다 먼저 잠들어 버리기도 하지만, 남편은 메시지를 빠뜨리는 법이 없다. 난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 본다. 현관 앞으로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걸어간다. 눈을 감고 남편이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