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93
00592 웃으며 안녕. =========================================================================
성녀의 예언 발동을 감지했다는 메시지가 보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메시지였다.
왜, 하필, 지금….
머릿속에 끊이지 않고 복잡함이 차오른다. 나는 안솔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하고 있으면서도 살이 패일 정도로 입술을 짓씹고 있다. 절대로 기적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단호함이 엿보인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안솔.”
“…….”
“사실대로 말하마. 나는 아직 자세한 상황을 몰라. 하지만, 적어도 굉장히 위급한 상황이라는 건 알 것 같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아까울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만 물어보자.”
“…….”
“이번 일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 간에.”
“…….”
“너는,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
말인즉, 나는 네가 기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안솔은 사용하지 않겠다고, 아니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차후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간에, 안솔은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내가 물어 보고픈 요지였다.
안솔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눈을 꼭 감는다. 또다시 한 줄기 눈물이 처연히 흘러내리고, 핏물이 나올 정도로 세게 물고 있던 입술이 서서히 떼어졌다.
“네.”
그리고, 안솔이 말했다.
…좋다.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고, 등을 돌렸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같은 조였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니요?”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마침 한소영이 서 있는 쪽에서 사내와 여인이 말다툼을 벌이는 광경이 보였다. 벌컥 화를 내는 사내는 유지태였고, 당혹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여인은…. 처음 보는 사용자였다. 활을 걸고 있는 걸 보니 궁수 같기는 한데. 일단은 한 번 가보자.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야기를 끊으며 끼어들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마치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겠다는 태도랄까?
“머셔너리 로드.”
잠시 후, 한소영이 약간 착잡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우선 경청하겠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이윽고 고요한 미성이 빠른 속도로 이어졌다. 한소영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간단하게 상황을 요약해주었다. 서른 명 남짓한 사용자가 주현호를 추격했다는 것부터 시작해, 중간에 조를 4개로 나누었고, 지금 신재룡 포함 안현과 헬레나가 돌아오고 있지 않다는 것까지.
“저, 저는….”
유일하게 돌아온 사용자는 지금 말을 더듬는 궁수 여인뿐.
다른 사용자들과는 달리 따로 홀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까부터 잘 모르겠다는 말만 연발하고 있는데, 사실상 듣지 않아도 뻔하다.
신재룡의 조가 주현호를 만났고,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홀로 도망쳤을 것이다.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다. 한소영의 초감각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테니까.
“…….”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익숙한 클랜원들이 몇 명 보이지 않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저 마음속 불안감이 한층 깊어지고 다급해질 뿐이다.
『신상용(사망).』
한순간, 그때의 생각에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 3의 눈으로 사망을 확인했을 때의 기억이, 잠자듯 편안히 눈을 감고 있던 신상용의 얼굴이.
『안현(사망).』
『신재룡(사망).』
『헬레나(사망).』
그리고 확실하게 이어질 미래가…. 아니 가장 가능성 높은 미래가 그려졌다.
…이제는 형의 시체를 버려두고 달려야만 했던 기억마저 떠오른다.
“싫어….”
나는, 곧바로 감았던 눈을 떴다.
여전히 천장이 갈라지고 암석 같은 흙덩이들이 떨어지는 가운데, 모두가 나를 주시한 채 입을 다물고 있다.
아깝다.
지금 이렇게 서 있는 시간조차 너무나도 아깝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네.”
“우선은 사용자들을 데리고 탈출하시는 게 옳을 듯합니다. 헬레나가 없다고는 하지만….”
“바깥의 사용자들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미 연락했어요.”
그렇다는 말이지.
머릿속은 아직도 복잡하다. 지금 바로 문을 나가 그들을 찾아내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뜻 모를 불안감이 아직도 온몸을 강하게 엄습하고 있다.
여기서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찾아서 살리는 게 전부가 아니다.
그래. 그들을 살리는 것뿐만이 아닌, 살린 채로 데리고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또 하나의 장치가 필요하다.
“좋습니다. 그럼 제 클랜원인 안솔을 이곳에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안솔을 백업으로 남기겠다. 한소영이라면 이 말의 뜻을 이해했을 것이다.
“…아.”
그 순간, 한소영의 얼굴이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를 보였다. 그 얼굴이 의미하는 바는 모르겠으나, 나는 지체 않고 몸을 돌렸다.
이제는, 가야 한다.
“잠시….”
“잠시만요.”
그렇게 땅을 박차려는 찰나, 누군가 나를 덥석 부여잡았다. 흘긋 시선을 돌리자 꽤나 진중해 보이는 얼굴을 한 유지태가 보였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러나 머셔너리 로드. 지금은 이성적으로 사고하셔야 할 때입니다.”
시끄럽다.
나는 잡힌 팔을 비틀어 빼내며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지금 머셔너리 로드뿐이 아니라…!”
“도와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유지태를 돌아보았다.
“제 클랜원들이니까, 제가 구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어, 어…. 에….”
그때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눈을 마주친 유지태가 갑자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거기다 주춤주춤 물러나기까지. 비단 유지태만 그런 게 아니라, 인근의 모든 사용자들이 그러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그 순간.
『사용자 한소영의 권능, 파괴 • 돌격이 부여됩니다.』
“다녀오세요. 머셔너리 로드.”
약간은 아련하게 들려오는 한소영의 목소리와 동시에, 시원한 기운이 온몸을 바람처럼 휘감아 올랐다.
비로소 한소영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최대한 빠르게 몸을 날렸다.
*
간신히 폭발이 가라앉을 즈음, 신재룡은 힘겹게 머리를 들어 안현을 찾았다. 안현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쓰러져 있었다.
“안현!”
목이 터져라 부르는 외침. 다행스럽게도 안현이 꿈틀 반응했다. 이내 한껏 찌푸리면서도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걸 보니 그래도 목숨은 붙어있는 모양이다. 호신강기가 어느 정도 폭발의 충격을 막아준 것이다.
“큭!”
그러나, 100% 막아주지는 못했다. 몸을 일으키는 와중 안현이 좌우로 살짝 흔들렸다. 몸이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것으로 보아 오른 다리가 다친 모양이다. 신재룡은 침음을 삼켰다. 목숨에 지장이 없는 건 다행이나, 상황이 최악이라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나빠졌다.
이윽고 겨우 몸의 중심을 잡은 안현이 비척비척 걸어왔다.
“재룡이 형. 죄송한데 저 치료 좀…?”
그러나 신재룡의 상태를 확인한 순간, 절로 입을 다묾과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언뜻 봐도 신재룡의 상태가 안현보다 갑절은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다. 주저앉은 주변으로는, 이미 질척거리는 핏물이 흘러나와 자그마한 웅덩이마저 고인 상태였다.
안현의 얼굴을 확인했는지 신재룡이 쓰게 웃었다.
“미안하구나. 지금 회로가 텅텅 빈 상태라 주문을 외울 수가 없어.”
“아니, 아니요. 형. 그것보다 상처가….”
“별거 아니다. 아무튼, 최대한 서두르자꾸나.”
“아.”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안현이 빠르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는 감정이 눈동자에 서렸다.
왕의 굴에는 아직 수십 명의 여인이 있었다. 오래 전에 붙잡혀온 여인도 있지만, 가장 최근에 잡혀온 동료도 있는 것이다. 그런 여인들은 하나같이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있고, 살아남은 애벌레 괴물들한테 젖을 빨리는 중이었다.
당연하지만, 이 모두를 구하는 건 단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끙.”
힘겹게 몸을 일으킨 신재룡은 돌연 정신이 또렷해지는걸 느꼈다. 자꾸만 흐려지려는 시야가 갑작스럽게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옆구리에서 전해지는 고통이 줄어들고, 온몸의 세포가 힘을 보내주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흡사, 촛불이 사그라지기 전 한 차례 크게 불꽃을 일으키는 것처럼.
…본인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잠깐 숨을 들이킨 신재룡의 눈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여전히 서 있는 안현의 어깨를 짚었다.
“현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야.”
“…….”
“안타깝지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그러니 가서 헬레나양을 데려오거라.”
“알겠습니다.”
조금 망설이기는 했지만, 안현 또한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아는 터라 빠르게 걸음을 움직였다.
“헬레나, 헬레나!”
안현이 애타는 마음으로 불렀으나, 헬레나는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안현은 덜컥 겁이 나는걸 느끼면서도 손수 헬레나를 업으며 몸을 일으켰다. 차갑게 식은 몸이 혹시나 하는 경우를 상상케 했지만, 안현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입구 쪽을 응시했다. 그리고 재차 놀라고야 말았다.
“됐니? 그럼 가자.”
어느새 입구 쪽에 서 있는 신재룡은, 어깨로 한 명 사내를 부축하고 있었다. 거센 기침을 하면서도 비몽사몽 해 보이는 사내는, 다름 아닌 무사 로드 고오환이었다.
그랬다. 고오환 또한 심한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아직 죽지는 않은 상태였다.
“혀, 형?”
“자자.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클랜 로드가 이 상황을 인지했다면, 분명 구조의 여지를 남겨두셨을 게다. 우리는 그걸 믿고 가는 거야.”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 사용자는 왜!”
“…….”
처음으로 안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슴이 터질 듯이 갑갑해졌다. 저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은 탓이다.
물론 자신도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경우가 다르다. 헬레나는 무조건 구해야 하는 사용자였다. 그러나 신재룡은 척 봐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이거니와, 목숨을 걸고 무사 로드를 구할 의리는 없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내의 사이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스스로한테 떳떳해지고 싶으니까.”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곧 신재룡이 말했다.
“예?”
안현은 입구를 향해 어기적어기적 걸으면서도,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신재룡은 미약한 신음을 흘리는 고오환을 잠깐 바라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현아. 나는 말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후회를 남길만한 짓은 하고 싶지 않구나.”
“형. 왜 이러세요. 제발, 제발요. 상식적으로 형이 지금….”
“할 수 있다.”
“…아니요. 아니에요.”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할 수 있으니까 이러는 거다.”
“할 수 없어요.”
“그리고 나는…. 차후 클랜 로드에게 상황을 설명할 때, 떳떳해지고 싶다. 나는,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같이 싸운 동료를 버리지 않고, 여력이 닿는 한에서 할 수 있는 만큼 구해왔다고.”
“…….”
그런 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는 의미는 그런 의미였던 건가.
결국 안현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실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은 굴뚝같았으나, 신재룡이 얼굴을 보자 차마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쳐다보는 신재룡의 얼굴에는 자신이 차마 알지 못할 무언가의 감정이 잠재돼있었다.
잠시 이야기가 끊기는 것과 동시에, 안현도 입구에 다다랐다.
“나는 사제다.”
마지막으로 말한 신재룡이 차분히 몸을 돌렸다. 안현은 아직 걱정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피로 얼룩진 등을 응시했다.
============================ 작품 후기 ============================
코멘트를 쭉 읽어보는데…. 아마 예전에 신상용의 죽음이 독자님들께 상당한 충격을 드린 것 같네요.(사실 저는 그 정도로 같이(?) 슬퍼해주실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사실 지금 말씀 드려보면, 구상에 아주 약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독자님들이 제가 그려낼 상황에 대한 여러 의견을 말씀해주셨고, 제가 깊이 고민해보게 만들어주시더군요.
음. 지금은 여기까지만 말씀 드릴게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