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24
00623 Night Of Battle. =========================================================================
칠흑이 짙게 깔린 강철 산맥. 달빛조차도 차단해버리는 어두운 숲 안에서, 나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는 천천히 지면을 쓸어보았다.
‘이상해.’
흔적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야영하는 지역은 어제 북부 원정대가 야영한 장소였다. 말 그대로 여기서 야영을 하고 아침에 떠난 장소. 그 외에는 어떤 특별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하다. 분명 흔적만 보면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야영하고 떠나는 건 당연한 이치니까.
그렇지마는 너무 특별한 흔적이 없는 게 문제라고나 할까?
‘여기뿐만이 아니야.’
이제껏 북부 원정대의 경로를 따라오면서 잇따라 느낀 의문이었다. 강철 산맥 제 3지역이 어떤 지역인가. 괴물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아니었던가.
그러면 못해도 괴물과 충돌한 흔적을 한 번쯤은 발견해야 정상인데, 지금껏 시체는커녕 핏자국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거기다 거인들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나서는 확인한 거라고는 진군한 흔적뿐.
‘우리도 마찬가지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클랜원들도 조금씩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여기까지 오면서 단 한 번도 괴물과 마주치지 않았으니까. 오죽하면 갑자기 강철 산맥이 얌전해졌다고 말하는 클랜원도 있을 정도였다.
다른 클랜원들은 그렇다고 동의하며 깔깔 웃었지만, 1회 차를 겪어본 입장에서는 결코 수긍하지 못할 말이었다.
나는 도로 몸을 일으키고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보이는 거라고는 칠흑 같은 어둠과 무성한 수림뿐. 그리고 고요한 정적까지.
하지만 무언가 다르다. 주변을 둘러볼수록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든다.
아니, 확신이라고 해야 할까? 강철 산맥은 절대로 얌전해진 게 아니라, 오히려 숨을 죽이고 있는 거라고. 보이는 생물 하나하나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덜덜 떨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그래. 이 기분은 마치….
‘전운.’
부스럭!
그때였다. 예전 연합군과의 전쟁 직전 느꼈던 기운을 떠올린 찰나, 후방에서 마른 잎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마력 감지를 돌리자 적어도 괴물은 아니라는걸 알 수 있었다.
“우웅….”
야영지에서 다가오는 검은 인영은 다름 아닌 안솔이었다. 한쪽 눈을 쓱쓱 비비면서 잔뜩 졸린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아무래도 잠에서 깬 모양이다.
“안솔?”
“……?”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안솔의 정수리로 물음표가 반짝 떠올랐다. …참, 저건 언제 봐도 신기해.
“오라버니…?”
비척비척 걸어오던 안솔은 나를 발견하고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양팔을 천천히 벌리며 달려오려는 자세를 보였다. 물론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뀐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안 돼.”
강한 목소리로 타이르듯이 말하자 안솔이 멈칫했다. 그리고 입을 삐쭉 내밀기까지. 아직 몽롱해 보이는 기색이 가득함에도 저러는걸 보니 조금은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나만 보면 무조건 반사로 저러는 건가….’
“여기는 갑자기 무슨 일이야?”
“쉬….”
“쉬?”
“솔이…. 쉬야할래요오….”
희미하게 말한 안솔은 그대로 지면에 쭈그려 앉더니 고개마저 푹 숙여버렸다.
‘뭐지? 저 상태로 싸려는 건가?’
가서 손수 바지를 벗겨줘야 하나 고민이 들 즈음.
“…그런데, 이대로 계속 구경하실 생각이세요…?”
갑작스레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안솔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상태였다.
“응? 그런데 너 바지가….”
“빨리 가세요.”
“…….”
“빨리요, 빨리.”
‘나 참. 통과의례 때는 혼자서 오줌도 못 싸서 같이 손잡고 가자 하던 녀석이.’
아니, 원래 이러는 게 정상인가?
“알았다, 알았어.”
나는 어깨를 으쓱인 후 야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안솔을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더 늦으면….”
돌연히, 한 번 더 안솔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껏 나온 의미가 없어질지도….”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들려온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저기 앞에서 보이는 모닥불이 비추는 불빛이 사정없이 일렁였다. 갑작스레 온몸에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스치고 섬찟해지는 기분이 든다.
“안솔…?”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안솔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매우 느릿한 속도로 몸을 일으키는 안솔을.
‘더 늦으면, 기껏 나온 의미가 없어진다?’
이윽고 완전히 나를 돌아본 안솔은 아까와는 다른 스산한 눈빛을 뿌리고 있었다. 서로 눈을 마주친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작두 탔구나.’
그동안 몇 번 불안해하는 건 보긴 봤어도, 저렇게 확실한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사실 나도 뭔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안솔이 저렇게 말한 이상 100% 확실해진 것과 진배없다. 여태껏 안솔의 능력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으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클랜원들 깨워. 지금 당장.”
“그러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안솔 또한 곧바로 대답하고는 나를 지나쳐 야영지를 향해 달려갔다. 이내 서서히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머리를 젖히고는 밤하늘을 응시했다.
고요한 정적.
‘…형.’
문득 뜻 모를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야…?’
*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조용한 아침이었다. 야영지에도 조용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용자들은 간간이 보이나 딱히 어수선한 기운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야영지 남쪽 외곽에 쿠샨과 김유현이 서 있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응.)
쿠샨이 밝은 목소리로 말한 것에 반해, 김유현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어두웠다. 겉으로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으나 얼굴 곳곳에 그늘진 불안해하는 기색은 숨기지 못했다. …아니, 숨기지 않았다고 해야 정확할까?
그러나, 이러나저러나 김유현을 응시하던 쿠샨은 조금이지만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인간들, 아니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결과 김유현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이 불안해요?)
(하, 하. 들켰나?)
(…너무 걱정하지는 마요. 제가 말한 대로만 하면…. 형제들도 분명히 인간들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거예요. 어쩌면 바로 돌아올지도 모르죠. 다들 신역은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저, 정말 그럴까?)
김유현은 여전히 떨떠름해하는 낯으로 반문했다.
(저를 못 믿으시는 거예요? 친구라고 하셨잖아요.)
쿠샨은 어깨를 툭툭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김유현의 목울대가 작게 움직였다.
(아, 아니야. 믿어, 믿을게.)
(그래요. 저도 믿을게요.)
(응. 그런데….)
(아 정말, 너무 걱정 말라니까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바로 달려갈게요. 그래서 이것도….)
말끝을 흐린 쿠샨이 흘끗 자신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제야 김유현이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럼…. 부탁한다.)
(맡겨두시라고요. 대신 약속은 잊지 않으셨죠?)
(물론이다. 나도 최대한 노력해서 쿠샨 토르의 마음을 움직여보도록 하마.)
(헤헤.)
그 후로 김유현이 (죽기는 싫으니까….)라고 자그맣게 중얼거렸지만, 쿠샨은 그저 바보처럼 헤헤 웃기만 할뿐이었다.
(그럼, 이제 진짜로 가봐야겠네요. 저도 시간에 맞추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하니까요.)
(응. 괜히 붙잡아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그나저나 잊지 말아요. 내일 오후….)
(그래 그래. 반나절 정도 가면 나오는 드넓은 초원까지였지.)
결국에는 꼭 가겠다는 확답을 두 번 세 번 받고 나서야 쿠샨은 몸을 돌렸다. 마침내 그동안 함께 해온 인간과 거인이 작별한 것이다. 서로 모종의 목적을 갖고서.
그리고 잠시 후, 서서히 숲 속으로 사라지는 쿠샨을 확인한 순간 김유현의 얼굴이 일변했다. 조금 전까지가 따뜻한 봄바람 같았다면, 지금은 차가운 북풍한설처럼 냉랭하기 그지없다.
한동안 차가운 눈초리를 빛내며 쿠샨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김유현은, 곧 몸을 돌려 야영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천막이 있는 방향이었다.
천막에는 여러 사용자들이 탁자를 두고 앉아 있었다. 그저 그런 사용자들이 아닌, 각 클랜의 클랜 로드인 지휘관급 사용자들이었다.
“방금 쿠샨과 그들이 떠났습니다.”
김유현이 상석에 앉으며 말을 꺼내자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사용자들이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딱히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이제 시작됐구나.’라는 기색이 다분했다.
“그러면….”
“예. 이제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접선 장소는 여기서 반나절 거리의 초원, 시간은 해가 떨어지는 오후입니다. 아마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출발하면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놔야 합니다.”
웅성웅성.
그러자 사용자들 사이로 어수선한 소란이 일었다. 그러나 가볍게 탁자를 두드려 소란을 잠재운 김유현은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전력 분석과 편성 현황은 어떻습니까? 대충이라도 통계가 나왔습니다?”
김유현의 물음에 오른쪽에 앉은 사내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입을 열었다.
“전력 분석은 이미 마쳤고, 편성도 1차적으로 완료한 상태입니다.”
“말씀해보세요.”
“아마 거인 1명당 50명이면 어느 정도 여유롭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0명이나요? 그건 너무 많은데.”
이윽고 김유현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50명은 너무 많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아요. 거인의 힘이 약화됐을 때를 대비해 편성을 새롭게 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으음. 애당초 거인의 힘도 추측된 자료에 불과하고, 설령 약화된다손 치더라도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없어서….”
“1명당 25명으로 줄여보세요.”
“2, 25명이요? 그건 너무…!”
사내가 불가능하다며 기함했지만 김유현은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1차 편성 조는 우선 그대로 두시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반으로 나누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예. 그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난색을 표하던 사내는 곧바로 표정을 바꾸며 알겠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김유현은 이번에는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걸로 편성은 됐고, 트랩 준비는 어떻습니까?”
“궁수들과 암살자들을 총동원해서 만들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따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그러자 왼쪽에 앉아 있던 여인이 곧바로 대답했다.
“어떤?”
“트랩에 관해서요. 아무래도 휴대할 수 있는 트랩만 만들려니 위력이 떨어지는 것들이 대다수에요. 그러니 함정을 추가로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함정이요?”
“네. 접선 장소가 정해져 있는 만큼, 미리 도착해서 함정을 설치하는 거죠. 트랩보다 더욱 위력적인 함정을요. 어쩌면 살상까지 노려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인지라, 김유현은 또 한 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생각이 끝났을 때, 김유현은 이번에도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그 장소는 거인들의 앞마당이라고 합니다. 괜히 함정을 설치하다가 거인들의 눈에 걸리면 의심만 살 수도 있으니까요. 최악에는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흐응.”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에게 기회는 단 한 번 밖에 없습니다. 제가 신호하기 전까지 우리는 최대한 거인들이 방심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가요. 어쩔 수 없네요.”
여인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이후로도 김유현이 하나씩 묻고 확인하는 회의가 이어졌다.
그렇게 2시간이 흐른 후, 어느덧 길었던 회의도 서서히 끝에 다다랐다.
“…알겠습니다. 우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김유현은 짧은 숨을 흘린 후 살짝 몸을 비틀었다. 두둑두둑, 자그마한 뼈 소리가 조용한 천막을 울렸다.
이윽고 한 차례 몸을 푼 김유현이 주섬주섬 기록을 정리하는 사용자들이 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감사합니다.”
“……?”
느닷없는 감사 인사에 사용자들이 기록을 정리하던걸 멈추고서 김유현을 빤히 응시한다.
김유현의 말이 이어졌다.
“계획을 수립한 건 저지만, 그 외의 것들은 준비해주신 건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약간 의문을 가졌지만…. 뇌제의 계획을 듣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괴물을 그저 괴물로만 보는 저였다면, 절대로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제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는군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운도 실력이죠. 그러니까 빼지 마세요. 이번 계획이 맞아떨어진다면, 공략 성공의 주역은 바로 뇌제에요.”
김유현은 그러지 말라는 듯 겸손히 대꾸했으나 왼쪽의 여인이 더욱 추켜세워주었다.
물론 이러는 와중에도 누군가는 이렇게도 생각할 것이다. ‘정말 계획대로 될까?’라고.
그러나 누구도 그 사실을 입에 담지 않는다. 쿠샨이 떠난 것을 기점으로 계획이 실행되기 시작했다. 늦어도 내일 밤까지는 이 계획의 성패 결과가 나올 것이다.
목숨을 건 사용자들의 입장에서는, 계획의 실패보다는 성공을, 또는 어떻게 성공시켜야 할까 만을 생각해야 할 시기였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잠시 후, 머리를 끄덕거리는 사용자들 속에서 누군가 두 손바닥을 마주쳐 소리를 냈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용자들은 뇌제를 향해 가벼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짝짝짝짝….
쏟아지는 박수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김유현이 가볍게 머리를 숙임으로써 간단히 답례했다. 이내 박수 소리가 살짝 잦아듦과 동시에, 뇌제의 입이 열렸다.
“그럼 이 시간 부로 작전명 자명고, 그리고 동시 작전인 트로이 목마의 시행을 선포합니다.”
자명고(自鳴鼓).
트로의 목마(Trojan Horse).
그렇게 작전 시행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걸 마지막으로 회의의 종료를 알렸다.
그리고 다음날.
북부 원정대는 해가 떨어지는 시간에 약속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생각보다 빠르게 업데이트할 수 있었습니다. 🙂
요즘 코멘트 분위기는 무척 마음에 드네요. 예전에는 작품에 관한 코멘트보다는 저(…….)에 관한 코멘트가 압도적으로 많은 경우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모두 작품에 관해서 말씀해주시니 저도 참 기분이 좋아요. 😀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